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세편정도로 끝내고 싶었는데 아마 네편은 써야할듯합니다. 왜냐면 자녀들 이야기를 따로 다룰꺼거든요.
자녀들이 많은데다가 정략결혼으로 인해 해야될 말들이 좀 많아서 말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한후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게 뺏기긴 했지만, 합스부르크가문(정확히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은 확고부동하게 제위를 유지하게 됩니다. 카를 6세가 죽고 난뒤의 불안정한 상황을 생각하면 굉장히 안정된 모습이었죠.
그런데 참고하던 책이 사라져서 어떻게 써야할지 좀 난감하다죠..ㅎㅎㅎ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들...(39)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프란츠 슈테판의 황후 (세번째)
유럽에서 고립된 상황에 엮였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외교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대로 숙적관계였던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방법이었죠. 오스트리아 주변의 나라들인 바이에른이나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적대적이 되었으며 특히 프로이센이 뺏은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만했습니다. 그를 위해서 프랑스와 손잡을 궁리를 하게 되죠.
이것은 매우 혁명적인 일이었는데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가 관여되었던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만 하더라도 이미 합스부르크와 프랑스는 앙숙관계에 놓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루이 14세가 팔츠의 상속권을 주장하면서 공격한 일등도 있었죠.
마리아 테레지아
1762년
물론 이것은 매우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일관되게 부르봉 가문과의 동맹에 열을 올리게 되고 이것은 자녀들의 결혼과 연결됩니다. 큰아들인 요제프2세의 첫번째 부인은 부르봉-파르마의 이사벨라였으며, 마리아 아말리아는 이사벨라의 동생인 파르마 공작과 결혼시키죠. 둘째아들인 레오폴트는 에스파냐 공주와결혼시켰고,마리아 카롤리나는 역시 부르봉 가문이었던 나폴리-양시칠리의 국왕과 결혼시킵니다. 그리고 막내딸인 마리아 안토니아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소원대로 프랑스와의 동맹관계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프랑스의 왕위계승자와 결혼하게 되고,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되죠.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마리아 안토니아 여대공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1756년 7년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 대해 슐레지엔을 회복하기 위한 일이었고, 유럽 외에서는 프랑스와 영국간의 식민지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러시아와 프랑스와 함께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에 대항해서 싸웟고 프로이센은 영국과 동맹을 맺게 됩니다. 한때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러시아 동맹이 프로이센을 궁지에 몰았지만,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가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러시아가 빠지게 되었기에 결국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도 물러날수 밖에 없게 됩니다.
슐레지엔을 되찾겠다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목표는 결국 7년전쟁이후 완전히 포기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7년전쟁을 끝내는 조약중 하나
7년전쟁이 끝난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를 더 강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여러가지 개혁정책을 펴게 됩니다. 가장 우선시 한것은 군사분야였죠. 군사분야에서 매우 강한 개혁정책을 펼쳤는데 이를테면 사관학교에 대한 편의시설과 대우를 매우 좋게 했으며 평민에게도 장교가 될수 있는 길을 열어줘서 인재를 찾게 했습니다. 또 교육도 매우 중시해서 초등교육에 열을 올렸으며 사회적 문제에도 관여해서 매춘등을 금지하기도 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65년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이 사망한뒤 아들인 요제프가 황제가 된뒤에 아들과 공동통치를 합니다. 남편이 죽은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다른 많은 왕실 과부들처럼 평생 상복을 입고 남편을 기념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려던 아들 요제프와는 의견이 맞지 않았습니다. 요제프의 정책은 사실상 세대를 너무 앞서간것으로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물론 신하들이나 백성들도 이해할수 없는 정책들이었죠.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에 대해서 그다지 신뢰를 하지 않았던듯합니다. 수많은 전쟁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왕좌에 앉아있었던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요제프 2세의 정책은 "어리숙한 행동"들로 인식되어었던듯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평생 군주로써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요제프 2세는 늘 자신을 간섭하는 어머니에 대해서 불만이 점점 커지게 되죠.
남편이 죽은뒤 자녀들과 함께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는 폴란드를 분할할때 처음에는 이 분할에 반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프로이센이나 러시아가 오스트리아가 참가하던 않하던 간에 폴란드를 분할하려고 하자, 그녀 역시 이에 동의했고 꽤 많은 영토를 차지하게 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80년 11월 말경 독감에 걸리게 된후 위중해졌으며 종부성사를 받은 다음날 사망하게 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묘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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