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신성로마제국의황후들(완결)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들...(38)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 프란츠 슈테판의 황후 (두번째)

엘아라 2012. 7. 26.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마리아 테레지아 이야기는 너무 복잡해요...ㅠ.ㅠ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들...(38)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 프란츠 슈테판의 황후 (두번째)




헝가리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1740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였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6세가 서거하게 됩니다. 황제가 죽었을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임신중이었는데 이전에 세명의 딸을 낳았었죠. 아버지가 죽자 상황은 복잡하게 돌아갑니다. 

카를 6세가 사망할 당시 국고는 거의 바닥이었으며 군대도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면 이전까지 오스트리아는 계속 전쟁을 치뤄왔는데 카를 6세는 황제가 되기 전에는 에스파냐 계승전쟁에 관여했으며 이후에는 터키와 의 전쟁이 있었고 또 폴란드 계승전쟁도 있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스스로 자신과 자신의 상속권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인 재산과 군대였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직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스스로 신성로마제국의 여제가 될수 없다는것을 알았으며 합법적 상속을 위해 남편을 공동 통치자로 만드는 작업을 합니다. 헝가리와 보헤미아는 여성의 왕위계승을 인정했는데 특히 보헤미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할수 있는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을 보헤미아의 공동국왕으로 황제 선풀에 투표권을 행사할수 있게 하려했던것입니다. 이후 오스트리아에서도 같은 작업을 추진하게 됩니다. 제 생각으로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을 공동통치자로 즉위시킨것은 남편을 사랑한것도 있었지만, 여성인 자신이 제약받는곳에서 남편의 이름을 내세우는것이 더 유리했던것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사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할 당시 꼭 필요로 했었던 군사적 재능이 매우 부족한 인물이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이 시할아버지처럼 뛰어난 장군이긴 바랬을테지만 불행히도 프란츠 슈테판은 할아버지의 군사적 재능을 물려받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인 로렌 공작 샤를 5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할아버지인 레오폴트 1세때 빈이 터키에 포위당했을때 제국군의 사령관으로 폴란드 국왕과 함께 빈을 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정치문제에서도 아내에게 양보했는데 대신 그는 뛰어난 재정관리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카를 6세 사후 텅빈 국고를 풍족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프란츠 슈테판이었던것이죠.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

가문의 명성과 달리 그나 그의 동생은 군사적으로 그다지 뛰어난 재능이 없었다고 합니다.

친할아버지는 빈을 구한 영웅이었고, 외할아버지는 "비록 여자같았지만" 군사적 재능은 좀 있다고 알려져있었는데 말입니다.--;; (오를레앙 공작이 의외로 군대에 열광했다고 하더군요.-0-;; 하지만 형의 뜻대로 형이 사준 집에서 노닥대는걸 더 즐겼다고...-0-;; 하긴 피부의 적인 햇빛을 쬐야해서 ..ㅎㅎㅎ)



이런식으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계승을 하려하고 있었던때, 다른 군주들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에 대해서 이전의 외교적 합의는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하고 있었죠. 그 중심에는 바이에른의 선제후와 프로이센의 국왕이 있었습니다.

바이에른의 선제후인 카를 알브레히트는 두가지 면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을 반대할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촌이자 백부의 딸이었죠. 카를 6세의 강요로 상속권을 포기하게 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상속받는다면 아내의 상속권도 인정되어야한다고 여겼을듯합니다. 하지만 그가 든 근거는 더 오래전의 합스부르크가문과 비텔스바흐 가문의 협약이었습니다. 1546년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딸인 안나와 바이에른의 공작이었던 알브레히트 5세와의 결혼때 맺었던 협약이었습니다. 이를 근거로 카를 알브레히트는 보헤미아,상 오스트리아등의 상속권을 주장합니다.

프로이센의 국왕이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는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막아낼수 없을것을 파악하고 독일의 알짜 요충지인 슐레지엔을 공격해서 차지합니다. 그는 "헝가리 여왕"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슐레지엔을 장악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나쁜넘"으로 지목했을 두명

바이에른의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황제 카를 7세)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


슐레지엔을 뺐겼다는 소식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고, 그녀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전쟁도 불사했습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시작된것이었죠.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초반에 엄청난 참패를 당합니다. 다 부족했던 오스트리아군은 당시 최고의 정예중 한명이었던 프로이센군을 이길수가 없었죠. 오스트리아의 패배는 프로이센에 힘을 실어준것이었며, 다른 나라들 역시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권을 노리게 됩니다. 이후 바이에른 군대는 프랑스군과 함께 보헤미아를 점령했고 바이에른의 선제후는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나중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기까지 하죠.


프로이센군에 패배를 당한 직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헝가리의 여왕으로 즉위식을 거행합니다. 그녀는 패배로 인해 헝가리나 보헤미아가 동요하거나 독립할 기회로 여기는것을 우려했을듯합니다.. 그녀는 헝가리를 위해 엄청나게 공을 들였는데 말타는것을 중요하게 여기던 헝가리 사람들을 위해 이전에는 말을 타본적이 없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승마까지 배울정도였다고 합니다. 헝가리에서의 대관식은 성공적이었지만, 헝가리 귀족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것은 아니었습니다.  헝가리에서의 협상은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어느날 마리아 테레지아는 즉위식이 있기전 태어난 아들이자 후계자인 요제프를 안고 헝가리 의회로 나아가 헝가리 귀족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여왕의 모습에 결국 헝가리 귀족들은 여왕과 그의 후계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게 됩니다. 헝가리가 여왕의 편에 선것은 매우 중요한 일로, 여러 나라에 공격받고 있던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헝가리라는 버팀목하나가 세워진것이었죠.



역사화

아들 요제프를 안고 헝가리 귀족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이러는 동안 바이에른의 선제후인 카를 알브레히트는 보헤미아 국왕이 된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7세로 선출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즉위식을 갖게 됩니다. 프리드리히 3세가 1457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처음으로 황제로 대관한이후 한번도 끊긴적없었던 합스부르크가문의 제위가 여기서 끊어지게 된것이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카를 7세가 프랑크푸르트에 가있는 동안 그의 영지인 바이에른 지방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뮌헨을 장악하게 되죠. 합스부르크가문은 제위를 잃었지만, 카를 7세는 영지를 잃고 아무것도 할수없는 황제가 됩니다.


수많은 적과 상대할수 없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결국 프로이센과 조약을 맺었고 슐레지엔의 점령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프로이센이 빠진후에 좀더 수월하게 프랑스와 바이에른을 공격하게 되죠.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헤미아를 수복했고, 프랑스군을 몰아냅니다. 하지만 다시 프로이센이 끼어들게 되고 일은 복잡하게 흐릅니다. 

카를 7세가 사망하고 바이에른 군대가 오스트리아 군에 패배한후, 오스트리아와의 평화협정을 체결합니다. 바이에른의 선제후는 더이상 황위를 주장하지 않았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이 제위에 오르는데 동의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포기하는 댓가로 프로이센의 지지도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평생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살게 되죠. 물론 프리드리히 2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프리드리히 2세 부인이 마리아 테레지아 사촌이던가 그렇던데 말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

그리고 후계자 요제프


전쟁이 끝난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피폐된 나라를 개혁하는데 힘쓰기 시작합니다. 프로이센 군대에게 깨진 것이 무척 충격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대 조직을 개편하고 군인들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습니다. 또 텅빈 국고때문에 전쟁초기 자신의 보석들을 저당잡혀야했던것을 기억하고는 징세제도등 재정확보를 위한 개혁도 추진하죠. 이런 여러가지 개혁은 "악마같은 넘"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견제하기 위한것이 가장 큰 목표였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적개심은 합스부르크가문의 영원한 숙적일 것같았던 프랑스와의 동맹을 모색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자료출처

1.영원한 국모 마리아 테레지아 (오영옥,2009,나남)

2.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