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복잡하기 이를테없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시기까지 오네요.
사실 마리아 아말리아나 언니인 마리아 요제파의 입장에서 보면 마리아 테레지아가 상속받는 것을 옳지 않은 일이었죠. 자신들의 서열이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우선이었을테니까요.
....ㅠ.ㅠ 죄송합니다. 사실 미리 글을 써놨는데 글 예약을 잘못해놨는걸 이제서야 봤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들...(36)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 카를 7세의 황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여대공
바이에른의 선제후비
신성로마제국의 황후
Maria Amalia of Austria
(Maria Amalie Josefa Anna)
(22 October 1701 – 11 December 1756)
마리아 아말리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요제프1세와 그의 부인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빌헬미네 아말리아의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오빠인 레오폴트 요제프 대공이 죽은지 11주후에 태어났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마리아 아말리아를 낳고 더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죠.
마리아 아말리아의 부모
황제 요제프 1세와 그의 부인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빌헬미네 아말리아
당시 합스부르크가문은 후계자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합스부르크가문의 에스파냐쪽 가계는 단절되었는데 이때문에 마리아 아말리아의 숙부가 에스파냐 왕위계승을 요구하게 되죠. 이때 합스부르크 가문내에서는 요제프와 카를 대공사이의 상속문제를 정리했는데 카를 대공이 에스파냐를 얻게 되면 요제프와 그의 후손들은 영원히 오스트리아 그 인근 영지를 상속받으며 카를 대공과 그 후손은 에스파냐쪽을 상속받기로 했었습니다. 여기에는 "여성 후손"도 포함되었죠.
하지만 마리아 아말리아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한후, 카를 대공은 에스파냐에서 돌아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며 이때문에 에스파냐 왕위를 얻지는 못합니다. 당초 프랑스를 저지하기 위해 카를의 왕위계승을 지지하던 영국등은 카를이 황제가 되자 도리어 합스부르크가문의 힘이 커질것을 우려하게 된것이죠. 결국 에스파냐 왕위는 부르봉가문으로 넘어가게 되죠.
마리아 아말리아
카를 6세는 조카들인 마리아 아말리아와 마리아 요제파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권을 인정하는 문서를 1713년 통과시킵니다. "국사조칙"( pragmatic sanction)이라고 불리는 이 서류에 대해서 마리아 아말리아의 어머니인 빌헬미네 아말리아는 강하게 반대하고 활르 냅니다.
하지만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을 위해 조카들이 "상속권을 포기"하기 전에는 결혼할수 없다고 못을 박습니다.
처음에 마리아 아말리아는 시칠리 왕국과 사보이 공작령의 후계자인 비토리오 아메데오와 혼담이 진행됩니다.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동안 사보이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은 적대적이었는데 이 결혼으로 두 가문 사이가 훨씬 나아지길 바란것이죠. 하지만 빅토리오 아메데오의 아버지가 이 결혼을 거부하면서 혼담은 끝납니다.
피에드몬트 공 비토리오 아메데오
마리아 아말리아의 혼담 대상
그는1715년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이후 마리아 아말리아와 혼담이 오간 사람은 바이에른 선제후의 후계자였던 카를 이었습니다. 그는 합스부르크가쪽에서 전쟁에 참여하기도 하는등 합스부르크가문에 호의적인 사람이었죠. 결국 1722년 마리아 아말리아는 국사조칙에 동의하는 서명을 한후 카를과 결혼합니다.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 그녀는 엄청난 혼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마리아 아말리아의 남편인 카를은 많은 정부들이 있었고 마리아 아말리아는 이때문에 힘들어했습니다만, 남편과 함께 취미를 공유했으며, 함께 사냥을 다니고 여행을 하는등 남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했습니다. 또 어머니처럼 매우 자비로운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마리아 아말리아의 남편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7세
바이에른의 선제후
그는 황제로 즉위한 직후 영지를 오스트리아군에게 장악당했으며 즉위했던 프랑크푸르트에 거의 갇혀서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그에 대해서 당대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좋은 황제"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숙부인 카를 6세가 사망하자, 마리아 아말리아의 남편인 카를은 국사조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가 아내의 권리를 주장할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죠. 그리고 늘 우호적으로 지냈던 프랑스와 함께 에스파냐, 프로이센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7세"로 선출되죠. 마리아 아말리아의 언니인 마리아 요제파는 동생과 제부를 위해 자신의 권리를 양보했습니다. 남편이 황제가 되면서 마리아 아말리아도 황후가 되죠. 하지만 카를 7세가 즉위한 직후 오스트리아군에 의해서 카를의 영지였던 바이에른이 장악당햇고 카를은 이름밖에 없는 황제가 됩니다.
카를 7세의 즉위식
바이에른의 군대가 다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기 시작햇으며 결국 바이에른을 떠나게 되고 카를 7세는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으로 돌아온 직후 사망합니다. 남편이 죽은후 마리아 아말리아는 더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게 됩니다. 그녀는 아들인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에게 오스트리아와의 평화 협정에 서명하라고 요구하죠. 이때 바이에른은 전쟁을 주장하던 파와 평화를 주장하던파로 나뉘었는데 이 평화를 주장하던 파의 대표가 마리아 아말리아였죠. 결국 바이에른군이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는 오스트리아와 평화를 위해 자신의 황위계승권리를 포기하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이 황제가 되는것을 인정합니다.
마리아 아말리아의 장남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마리아 아말리아와 카를 7세 사이에는 모두 일곱명의 아이가 태어납니다. 장남인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바이에른의 선제후가 됩니다. 하지만 그는 자녀가 없었고 이때문에 바이에른 선제후령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또다른 분가인 팔츠 가문으로 넘어가는데 이것은 후에 바이에른 계승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또 막내인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큰아들인 요제프 2세와 결혼했습니다만 둘의 관계는 매우 불행했다고 알려져있죠. (그러고 보니 바이에른 계승전쟁 보다가 말았군요..-0-;; 도대체 왜 전쟁이야기에 필을 받았던건지..ㅠ.ㅠ -사실 전쟁이야기보다는 그 당시 인물에 필을 받은거긴 하지만요.)
마리아 아말리아는 남편이 죽은 12년뒤 뮌헨의 님펜부르크 궁전에서 사망했습니다.
마리아 아말리아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독일어+구글 영어 번역 포함)
2.영원한 국모 마리아 테레지아(오영옥,나남,2009)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역사이야기 > 신성로마제국의황후들(완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들...(38)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 프란츠 슈테판의 황후 (두번째) (0) | 2012.07.26 |
---|---|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들...(37)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 프란츠 슈테판의 황후 (첫번째) (0) | 2012.07.19 |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들...(35)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 카를 6세의 황후 (0) | 2012.07.05 |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들...(34)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빌헬미네 아말리아 : 요제프 1세의 황후 (0) | 2012.06.28 |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들...(33)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르 마그달레네 : 레오폴트 1세의 황후 (0) | 2012.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