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마리아 테레지아 어머니까지 왔습니다.
다음은 마리아테레지아의 사촌인 마리아 아말리아고 그 다음이 마리아 테레지아죠.
마리아 테레지아는 두편으로 나눌까합니다
워낙 내용이 많은데다가 책도 있거든요.-0-;;;;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들...(35)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 카를 6세의 황후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신성로마제국의 황후
Elisabeth Christine of Brunswick-Wolfenbüttel
(28 August 1691 – 21 December 1750)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는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루드비히 루돌프와 그의 부인인 외팅겐-외팅겐의 크리스티네 루이제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여동생만 둘이 있었는데 이 세명의 자매들은 할아버지인 안톤 울리히의 뜻에 따라 결혼합니다. 루드비히 루돌프의 아버지이자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할아버지인 안톤 울리히는 정치적으로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브라운슈바이크의 다른 분가인 하노버와 뤼네부르크쪽이 레오폴트 1세를 지지했을때, 안톤 울리히는 프랑스편을 듭니다. 이때문에 하노버쪽에서 안톤 울리히와 그의 형이 다스리던 영지를 점령하기도 했었죠.
안톤 울리히는 자신의 손녀딸들인 루드비히 루돌프의 딸들을 정략결혼시키는데 큰 손녀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오스트리아의 대공이자 당시 에스파냐 왕위계승을 주장하던 카를 대공과 결혼시키려합니다. 둘째인 샤를로테는 후에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의 아들이었던 알렉세이와 결혼했고 표트르 2세의 어머니가 되죠. 막내인 안토니에테는 친척인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와 결혼했고 그녀의 남편이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공작으로 영지를 상속받게 됩니다. 안토니에테의 자녀들중 안톤 울리히는 러시아의 안나 여제의 조카이자 후에 이반 6세의 어머니로 섭정이 되는 안나 레오폴도브나와 결혼했고, 딸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결혼했습니다. 또다른 딸인 율리아나 마리아는 덴마크 국왕과 결혼했죠. 또 루이제는 프로이센 왕가로 시집갔으며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어머니가 됩니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부모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루드비히 루돌프와 그의 부인인 외팅겐-외팅겐의 크리스티네 루이제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두 여동생
샤를로테와 안토니에테
샤를로테는 표트르 대제의 며느리로 표트르 2세의 어머니였습니다. 안토니에테의 아들인 안톤 울리히는 안나 레오폴도브나의 남편이기도 했습니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당시에 매우 아름다운 여인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녀의 미모는 당대 최고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에스파냐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던 카를 대공에게 괜찮은 신부후보였는데 특히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아버지인 루드비히 루돌프는 카를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1세를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되기도 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카를 대공의 혼담은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가 13살이 되던해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할아버지와 카를 대공의 형수였던 빌헬미네 아말리아 황후 역시 이 혼담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빌헬미네 아말리아 황후 역시 브라운슈바이크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일듯합니다. 하지만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신교도였고 가톨릭을 믿는 합스부르크가에서는 신교도인 신부를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있었죠.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결국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열여섯살이 되던 1707년 가톨릭으로 개종합니다. 그리고 1708년 카를 대공과 결혼하기로 결정됩니다. 당시 카를 대공은 에스파냐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있었고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결혼하기 위해 에스파냐로 갑니다. 1708년 열일곱번째 생일을을 며칠 놔두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자신보다 여섯살 많은 카를 대공과 바르셀로나에서 결혼합니다. 이때 카를대공을 위해 일하던 궁정음악가인 안토니오 칼다라는 결혼축하를 위해 Il più bel nome를 작곡했고 결혼식에서 공연했습니다.
칼다라의 Il più bel nome중
카를 대공
후에 황제 카를 6세
1711년 요제프 1세가 사망하자 카를 대공은 형의 뒤를 잇기 위해 서둘러 독일로 돌아가야했습니다. 카를은 아내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를 카탈루냐 섭정으로 남겨두고 떠났는데 이때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현명하게 일을 처리했습니다. 1713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역시 에스파냐를 떠나 남편이 있는 빈으로 갑니다.
오스트리아로 간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카를 6세와의 사이에서 네명의 아이를 낳습니다. 첫째는 후계자가 될 아들이었습니다만 이 아들은 영아기를 넘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명의 딸을 낳게 되죠. 결국 후계자가 될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계자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카를 6세는 자신의 큰딸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후계자로 선택했으며 그녀에게 제국을 물려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죠.
세명의 딸들과 함께 있는 카를 6세와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역시 이런 노력에 동참하는데 여동생인 안토니에테의 자녀들을 유럽의 여러 왕실과통혼시키는데 주력합니다. 그 결과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조카이자 같은 이름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프로이센의 왕위계승자인 프리드리히 (후에프리드리히 대왕)과 결혼했고 또다른 조카인 안톤 울리히는 러시아의 안나 여제의 조카인 안나 레오폴도브나와 결혼했는데 안톤 울리히와 안나 레오폴도브나의 아들은 안나 여제가 죽은후 이반 6세로 즉위하죠.(하지만 옐리자베타 여제가 쿠데타를 일으켜 이부부와 자녀들은 평생 감금당한채 살았다고 합니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조카들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왕비(프리드리히 대왕의 부인. 둘은 전혀 교류가 없이 지냈다고 합니다.)과 러시아의 이반 6세의 아버지인 안톤 울리히
둘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막내 동생인 안토니에테의 자녀들입니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자녀들중 아들은 영아기를 넘기지 못했고 막내딸은 여섯살때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둘째딸인 마리아 안나는 형부의 동생인 로렌의 카를 알렉산더와 사랑에 빠져서 결혼합니다만 첫아이를 낳다가 사망했습니다. ( 정치적 문제로 아버지가 반대해서 아버지가 죽은후에 결혼했습니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큰딸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장수했으며 열여섯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두딸
마리아 테레지아와 마리아 안나
둘다 로렌가문의 남정네들과 눈맞아서 결혼했습니다
남편이 죽은지 10년후인 1750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빈에서 사망했습니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자료출처
위키피디어(독일어+구글 영어 번역 포함)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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