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마리아 테레지아 이야기까지 왔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워낙 할 이야기가 많아서 나눠볼까합니다.-0-;;;;;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들...(37)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 프란츠 슈테판의 황후 (첫번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대공
신성로마제국의 황후
헝가리,보헤미아의 여왕
Maria Theresa Walburga Amalia Christina
(Maria Theresia)
(13 May 1717 – 29 November 1780)
합스부르크가의 영지를 상속받게 될 여성이된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6세와 그의 부인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나기 직전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빠가 사망했었기에 후계자가 될 아들을 기대했던 카를 6세와 빈 사람들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탄생에 무척이나 실망스러워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태어난 날 세례를 받았는데 할머니였던 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르 마그달레네와 백모였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빌헬미네 아말리아가 대모가 되었죠.
아기때의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 여동생들의 탄생은 카를 6세와 합스부르크가문의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사실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나기 이전인 1713년 "국사조칙"을 비밀리에 승인했습니다. 이것은 카를 6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1세가 요제프 1세의 딸들인 마리아 요제파와 마리아 아말리아의 상속권을 우선순위로 인정했던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자녀들의 상속권을 우선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카를 6세가 남성후계자를 뒀다면 이 국사조칙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것입니다. 하지만 카를 6세의 유일한 남성 후계자는 일찍 사망했고 그뒤로는 딸들만 태어나면서 이문제가 커지게 됩니다.
카를 6세는 딸이 태어나자 이 국사조칙을 정칙으로 공표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자 요제프 1세의 황후였던 빌헬미네 아말리아와 그녀의 딸들이 당연히 반발하게 됩니다. 카를 6세는 조카들에게 상속권을 포기하라고 강요했으며 다른 나라들로부터 자신의 딸에게 제국이 상속되는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엄청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게 되죠. 이것을 위해 여러나라들에 많은 외교적 양보를 하게 됩니다만, 이 모든것이 나중에는 무의미한것이 됩니다.
세딸들과 함께 있는 카를 6세 부부
막내딸은 여섯살때 사망했습니다.
어린 마리아 테레지아는 푹스 백작부인의 보살핌을 받게 됩니다. 푹스 백작부인이었던 마리아 카롤리니는 원래 카를 6세의 누이인 마리아 테레지아 여대공의 시녀로 일했었는데 황후가 딸의 교육을 푹스 백작부인에게 맡긴것이었죠. 백작부인은 마리아 테레지아를 돌보면서 예법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는데 마리아 테레지아는 푹스 백작부인을 무척이나 신뢰하고 따르게 됩니다. 이런 친밀한 관계는 백작부인이 죽을때까지 유지되는데 백작부인이 죽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간의 관례를 깨고 합스부르크가문의 영묘에 백작부인을 안장할 정도였습니다. 황실 영묘에 묻힌 사람중 유일하게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푹스 백작부인
어린시절 마리아 테레지아는 진지하고, 노래부르는것과 활쏘기를 즐겨했으며, 매우 규칙적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린시절 말타는것을 배우지 못했는데 아버지인 카를 6세는 딸이 말타는것을 금지 시켰기 때문이죠. 하지만 헝가리 즉위식을 위해 말타는법을 배운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말타는것을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황실 가족들은 자주 가족 오페라 무대에 섰으며 노래 부르는것을 즐겼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특히 이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이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라틴어를 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회에서는 그 이상의 교육을 시키지는 않았는데 이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라틴어 철자나 발음이 전통적이지 않았으며, 정치적 연설이나 공식석상에서 해야하는 다양한 연설등을 익히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수, 그림,음악 춤등 전통적으로 "왕비"를 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마지 못해 딸을 후계자로 인정해야했던 카를 6세의 영향때문이었죠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14살이 되던해 내각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이후에도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토론하거나 언급하는것은 금지했습니다. 카를 6세는 딸이 후계자로 교육을 받을 시점에서 조차도 남성후계자를 바랬던듯했고 그 결과 마리아 테레지아는 제국의 후계자로써 정치적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게 되죠. 그리고 이 상황은 훗날 즉위초 그녀를 매우 힘들게 합니다.
어린시절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매우 아름다운 외모로 알려져있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동생 마리아 안나는 둘다 어머니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를 닮은 외모였는데 황후는 젊을시절 당대 최고의 미녀라고 알려져있을 정도였죠. 프로이센 대사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큰 푸른 눈에 약간 붉은기 도는 금발머리를 가졌으며, 큰 입과 쭉뻗은 몸매가 매우 인상적이라는 기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1727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어린시절부터 제국의 후계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녀의 결혼은 국제적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카를 6세는 딸의 안정적 계승을 위해 강력한 가문출신의 왕족을 딸과 결혼시키길 원했습니다만 국제 정세는 이를 허락하지 않죠. 만약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녀가 다른 강한 가문의 후계자와 결혼한다면 유럽의 질서가 크게 뒤흔들릴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죠.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후보는 작은 가문들에서 선택되기로 결정됩니다. 그 후보로 로렌가문의 아들들이 물망에 오릅니다. 로렌 가문은 합스부르크가문과도 인연이 깊었는데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와 로렌 공작은 사촌간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처음 신랑감으로 선택 된사람은 프란츠 슈테판이 아니라 그의 형인 레오폴 클레망이었습니다만 그는 천연두로 사망했고 이때문에 자연스럽게 프란츠 슈테판이 신랑감으로 물망에 오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9살이나 연상이었는데 10대때 카를 6세의 궁정에 와서 머물게 되죠. 그는 쾌활한 인물로 사냥을 즐겼는데 이때문에 카를 6세는 그와 자주 사냥을 다녔다고 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은 결혼이 확정되기 전부터 이미 사랑에 빠졌는데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 쪽이 더 열렬히 그를 사모했다고 합니다. 온 궁정이 여대공이 사랑에 빠진것을 알았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둘의 결혼은 프란츠 슈테판이 로렌 공작령을 포기하기 전까지 성사되지 못합니다. 복잡한 정치 관계 때문에 그가 합스부르크가의 상속녀와 결혼하길 원한다면 로렌 공작령을 포기할수 밖에 없었죠. 그는 가문의 영지를 포기하는것이 쉽지 않았는데 특히 그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이 이에 대해서 매우 반대했다고 합니다.(엘리자베트 샤를로트는 루이 14세의 조카로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와 그의 두번째 부인인 리젤로트의 딸로 리젤로트는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손녀였죠.)
하지만 결국 그는 로렌 공작령을 포기하고 대신 투스카니 공작령을 받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은 결혼할수 있었죠.
15살 무렵의 프란츠 슈테판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 보다 아홉살이 많았습니다.
사냥을 무척이나 즐겼던 그는 빈에 있는 동안 황제의 사냥에 동행하곤 했다고 합니다.
1736년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은 빈에서 결혼했으며 1737년 후손이 없던 투스카니 공작이 사망하자 프란츠 슈테판은 투스카니의 공작이 됩니다. 카를 6세는 사위가 투스카니 공작이 된것을 확인 시키기 위해 딸과 사위를 투스카니로 보내지만 곧 다시 둘을 부릅니다. 후계자인 딸이 멀리 떨어져있는 동안 자신이 사망할것을 두려워해서였죠. 1738년 러시아와 오스만제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때, 프란츠 슈테판은 빈 사람들에게 인기를 잃게 됩니다. 이때 오스만 제국은 오스트리아로부터 세르비아,보스니아,왈라키아등을 얻게 되죠. 오스만 제국은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우호 관계였으며 프랑스를 위해 오스트리아를 공격한적도 있기 때문에 외가가 프랑스 왕가였던 프란츠 슈테판은 프랑스의 첩자라는 소리를 들어야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죠.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카를 6세는 1740년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에게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상속받게 됩니다. 하지만 주변의 나라들은 카를 6세 생전의 여러가지 조약들을 인정하지 않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상속권을 인정받기 위해 전쟁을 치뤄야했습니다.
황제 카를 6세의 죽음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독일어+구글 영어 번역 포함)
2.영원한 국모 마리아 테레지아(오영옥,나남,2009)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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