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스웨덴

스웨덴의 공주들...(18)세실리아 구스타프스도테르 바사 : 구스타프 1세의 딸

엘아라 2012. 6. 12.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실수로 둘째 공주를 빼먹었습니다..ㅠ.ㅠ

왠지 큰딸 이야기할때 나왔던 스캔들 메이커 동생은 누군가 싶더라니...ㅠ.ㅠ

그 스캔들 메이커를 빼먹었군요..-0-;;;




스웨덴의 공주들...(18)세실리아 구스타프스도테르 바사 : 구스타프 1세의 딸





스웨덴의 세실리아

세실리아 구스타프스도테르 바사

바덴-로데마헤른의 마르크그라핀

Cecilia of Sweden 

(Cecilia Gustavsdotter Vasa

(16 November 1540 –  27 January 1627)


스웨덴의 세실리아는 구스타프 1세와 그의 부인인 마르가레타의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사실 에릭 14세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 마르가레타의 자녀라는...) 세실리아는 어린시절 매우 허약해서 자주 병치레를 했습니다. 하지만 자라서는 도리어 매우 건강해졌으며 아름다웠으며 매우 활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실리아의 가족들은 세실리아를 "검은 양"이라고 불렀는데 세실리아는 툭하면 다른 일에 반대되는 의견을 폈으며 자주 스캔들을 일으키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가족들의 "문제아"정도 됐을듯합니다. 세실리아 역시 정략결혼으로 스웨덴의 동맹을 만들수 있었기에 여러곳의 혼담이 추진됩니다만 세실리아의 스캔들은 이런 혼담을 방해합니다.



구스타프 1세와 그의 부인인 마르가레타 왕비


세실리아의 언니인 카타리나의 결혼식때 세실리아의 오빠들은 세실리아의 방 창문을 향해 한 남자가 올라가고 있는것을 목격합니다. 이를 수상히 여긴 왕자들은 다음날 밤 세실리아의 방에 들이 닥쳐서 남자를 잡아냅니다. 그는 세실리아의 형부의 동생인 오스트프리란트의 요한 2세로 세실리아의 방에서 바지를 입고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 사건은 요한이 세실리아와의 결혼을 거부하면서 큰 스캔들로 발전합니다. 온 나라가 알게 사고를 쳤는데도 결혼하지 않는다는것을 큰 모욕이었죠. 구스타프 1세는 매우 화가나서 요한을 감옥에 가뒀는데 몇몇 문헌에서는 요한이 거세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또 구스타프 1세는 딸 세실리아에게도 매우 화를 내면서 딸을 때리고 머리를 빡빡 밀었다고 합니다. (...--;; 우리나라나 스웨덴이나 사고치는 딸네미 머리 깎였던것은 비슷하군요..쿨럭..) 세실리아의 오빠들은 세실리아의 결백을 위해 "수산나의 목욕"이 인쇄된 동전을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수산나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여인으로 매우 아름답고 도덕적인 여인이었는데 간계에 빠져서 간통혐의를 받게 되지만 결국 자신의 결백을 밝혔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



수산나와 노인들

17세기 작품


하지만 세실리아는 몇번의 스캔들을 더 일으켰으며 사람들은 세실리아에 대해 엄청나게 쑥덕거리게 됩니다. 이런 세실리아를 집안에서 골치아파했습니다.


1564년 세실리아는 바덴-로데마헤른의 마르크그라프인 크리스토페르 2세와 결혼합니다. 그는 바덴-바덴의 마르크그라프였던 베른하르트 3세의 아들이었죠. 결혼후 세실리아는 오빠인 에릭 14세와 잉글랜드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와의 혼담을 추진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갑니다. 그곳에서 오래도록 머무르게 되는데 첫아들을 잉글랜드에서 낳았고 엘리자베스 1세는 세실리아의 아들의 대모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세실리아는 잉글랜드 궁정에서 머무는 동안 엄청난 빚을 졌고 결국 빚때문에 야반도주를 해야할 정도였죠. 하지만 세실리아와 그녀의 가족은 도버에서 붙잡혔고, 보석등 장신구를 맡겨서 간신히 빠져나올수 있었습니다. 야반도주를 하려 했을때 세실리아는 임신중이었는데 둘째 아들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자 평생 빚쟁이들에 대해 욕을 했다고 합니다.



바덴-로데마헤른의 크리스토페르 2세

그는 둘째아들로 태어나서 형을 위해서 바덴-바덴의 영지 상속권을 포기하고 로데마헤른을 받았는데 그의 후손들이 바덴-바덴을 상속받게 되었고  결국 그는 바덴 대공가의 선조가 됩니다.


1571년 세실리아는 네덜란드와 에스파냐 간의 전쟁때문에 스웨덴으로 돌아갑니다. 이 전쟁은 종교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으며 세실리아와 그녀의 가족들은 개신교(루터파)였기 때문에 에스파냐의 군대가 위협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죠. 스웨덴으로 돌아간 세실리아는 오빠 요한 3세에 의해서 아르보가(Arboga)를 봉토로 받게 되었으며 "아르보가의 여백작"지위를 얻게 됩니다. 세실리아는 자신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몽땅 자신의 것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오빠에게 감췄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요한 3세가 동생을 의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1575년 남편이 죽은후 세실리아는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는데 가톨릭 군대에 의해 장악된 아들의 영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죠.

1578년 에스파냐의 대사가 세실리아에게 접근을 합니다. 그녀에게 룩셈부르크나 다른 합스부르크가문 영지의 총독자리를 언급하면서 세실리아가 오빠인 요한 3세에 대해 음모를 꾸미는 것을 부추기죠. 에스파냐 대사와 세실리아는 자주 만났는데 결국 세실리아는 스톡홀름에서 그를 만나려다가 체포당합니다. 요한3세는 세실리아과 그녀의 아들들을 스웨덴에서 추방했습니다. 추방당했던 1579년 세실리아는 에스파냐 대사의 딸을 낳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아이를 수도원에 맡기게 되죠.



세실리아


스웨덴에서 추방당한후 세실리아는 아들들은 가톨릭으로 교육시켰으며 가톨릭 섭정으로 아들의 영지를 통치했습니다. 이때문에 세실리아는 개신교도들의 비방의 표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세실리아는 채권자(빚쟁이)들에 대해서 매우 혹독하게 대했는데 이것은 둘째아들이 장애를 갖게 된것이 그들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 또한 세실리아에 대한 평가를 더욱더 나쁘게 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