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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그는 누구인가? 세번째 독재자로써 옹정제 (1)

엘아라 2012. 5. 2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머리아파 죽을것 같습니다.

이런때 진통제가 없다니 좌절입니다..ㅠ.ㅠ

 

하여튼 또 옹정제 이야기를 하는군요..-0-;;;;;

 

 

 

옹정제 그는 누구인가? 세번째 독재자로써 옹정제 (부제 : 뒤끝의 황제) (1)


옹정제

옹친왕시절

옹정제는 45살에 즉위를 했으며 그동안 권력투쟁을 관망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때문에 그는 도리어 어떤 이들이 투쟁에 참여했고 어떤 일들을 벌렸는지 더 꿰뚫어보게 되었고 이때문에 이를 없애기 위해 아주 강력한 독재정치를 벌립니다. 너무 심해서 뒤끝있어보이실정도입니다.-0-;;;



옹정제는 강희제 말년에 일어났던 황위쟁탈전을 정리해야했습니다. 황자들의 황위쟁탈전은 곧 황제의권위를 약화시키는 일이기도 했죠. 옹정제는 황제의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해 여러가지를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초기에는 여러 세력들을 무조건 몰아내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옹정제 즉위초 가장 큰 세력은 아마도 강희제의 팔황자였던 염친왕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일듯합니다. 이 세력들은 매우 컸기에 옹정제의 몇명없는 측근들로 이들 세력을 억누르기 힘들었을듯합니다. 이때문에 처음에 옹정제는 이들 세력을 포용하기로 합니다.네명의 최고대신을 두고 그들과의 논의를 통해 정치를 이끌어나갑니다. 이 네명의 최고 대신에 염친왕이 들어가게 되죠. 나머지 세명은 옹정제의 최고 측근이었던 십삼황자 이친왕, 선황의 중신이었던 마제 그리고 융과다였습니다. 옹정제는 즉위하면서 두 동생인 팔황자와 십삼황자를 각가 염친왕과 이친왕에 봉했습니다. 

염친왕은 옹정제를 상당히 껄끄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그는 부황의 눈밖에 나긴했지만, 황위쟁탈전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만주족은 적장자 상속을 우선으로 하던 중원의 한족과는 다른 상속체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능력이 있는 자식이나 가장 세력이 큰 자식이 아버지의 뒤를 이었습니다. 이를테면 태조 홍타이지의 아들인 순치제가 즉위할수 있었던것은 홍타이지의 동생이자 강력한 세력중 한명이었던 예친왕 도르곤이 다컸던 홍타이지의 장자보다 어린 순치제를 황위계승자로 밀었기 때문에 가능했죠. 이랬기 때문에 염친왕은 옹정제가 즉위한것에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문제는 이런 사실을 옹정제가 모를리가 없었다는 것이죠.

염친왕 윤사

강희제 시절 염군왕이었으나 옹정제 즉위후 염친왕이 됩니다.
하지만 친왕이 되고 난뒤 사람들이 축하하자 "내 목숨이 위태로운데.."라는 식으로 이야기해서 옹정제의 본격적인 미움을 받기 시작했다고 합니다.-0-;;;;;(그러게 진작 잘하지....--;;) 이후 친왕직위를 박탈당하고 족보에서도 삭제당했지만 건륭제때 족보에 다시 들어가게 됩니다.


옹정제는 늘 염친왕을 감시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염친왕이 하는 일에 꼬투리를 잡기 시작하죠.옹정제가 염친왕에게 맡긴 첫번째 임무는 선황의 능은 조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염친왕은 옹정제가 "짠돌이"라는 사실을 알고 부황의 능을 조성할때 예산을 절약했습니다. 이를테면 능을 조성하는 적토는 원래대로라면 베이징에서 가져가야하는것이지만 운임이 너무 많이 들었기에 현지에서 충당했죠.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옹정제는 염친왕에게 "선제의 산릉공사를 허술히 하는것은 짐에게 불효의 악명을 덮어씌우려는 것이다"라고 질책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황실 목장을 관리하는 일에서도 효율적 관리를 위해서 말의 수를 줄이려했지만 옹정제는 "선제의 방식이 너무 사치스러웠다는것이냐"라고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자 염친왕은 자신의 운신의 폭이 좁아져간다고 느끼게 되었는데 다음 임무는 내무부의 인원을 줄이는 일을 맡게 됩니다. 현재도 "명퇴"를 조정하는 것은 매우 껄끄러운 일이었는데 하물려 청대 관리들이었으니 더했을듯합니다. 염친왕은 이에 대해 "될대로 대라"라는 식으로 인원을 과감하게 축소해버립니다. 그러자 관리들의 항의가 거의 폭동수준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옹정제는 염친왕이 이 관리들의 폭동을 사주한것이 아닌가 의심을 합니다. 이미 될대로 되라는 식이었던 염친왕은 옹정제의 의심을 인정해버리죠. 하지만 사건을 조사하자 염친왕과 관리들의 폭동이 무관한것이라는것이 밝혀집니다.
이렇게 되자 옹정제는 이번에는 늘 염친왕이 다른 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애로운행동을 해왔었던것을 기억하고 그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기 위해 다른 이를 감싼다고 의심합니다. --;;;;;;;(....쓰예 제가 쓰예를 좀 좋아하긴 합니다만 솔직히 이건 너무 하셨다는...물론 염친왕이 황제가 되기전에 여러가지로 쓰예를 열받게 한것은 이해가 되지만 말입니다.-0-;;;)

염친왕과 한편이었던 구황자 역시 옹정제의 분노를 피할수는 없었습니다.황제는 구황자를 연갱요휘하로 보내버립니다. 이에 고생스러웠던 구황자는 황제에게 "차라리 출가하겠다"는 편지를 보내죠. 그러자 황제는 "출가하면 군신관계를 끊겠다는 이야기냐"라고 도리어 화를 냅니다. 또 황제가 구황자가 "기회를 잃어서 이렇게 되었다"라는 편지를 보낸것을 알게 되자 그것이 반역의 기회가 아니었나 의심하게 됩니다. 이렇게 감시가 심해지자 구황자는 비밀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그는 비밀리에 가톨릭으로 개종했을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때문에 그는 라틴어를 알고 있었을것이며 가족과 비밀리에 라틴어로 서신을 주고 받습니다. 하지만 이는 곧 황제에게 발각되었고 "반역의 의도가 없다면 왜 비밀편지를 주고 받는가"라는 의심을 삽니다.


 

혁군왕 윤당
언제 군왕이 됐는지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옹정제때 군왕지위를 박탈당하고 족보에서 삭제당하죠
역시나 건륭제때 다시 황실 족보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팔황자와 구황자는 옹정제의 미움을 사서 감옥에 갇히고 황실 족보에서 삭제됩니다. 둘다 감옥에서 사망했는데 옹정제에게 늘 불만이었던 많은 이들은 옹정제가 그들을 살해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후에 옹정제의 아들인 건륭제는 이들 숙부를 다시 황실족보에 넣습니다.)

형제에 대한 옹정제의 과한 행동은 사실 단적으로 보면 이해가 안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강희제 말년의 극심했던 후계자 투쟁의 부산물이었음을 염두에 둬야합니다.
부황인 강희제는 늘 염친왕에게 질책의 말을 내렸는데 겨우 패륵주제에 황태자가 되고 싶어서 나선다고 호통을 치고는 했다고 합니다. 어린시절부터 아버지를 잘 알았던 옹정제 역시 이런 동생이 못마땅했을겁니다. 게다가 황위계승을 위한 투쟁에 자신도 휩쓸리지 않기 위해 늘 숨죽이며 살았었던 옹정제에게 이런일의 주범중 하나였던 염친왕이 상당히 거슬리는 인물이었을것이며 자신의 일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상당수가 염친왕의 세력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두면 옹정제가 염친왕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겠죠.

군주인 황제에게 감히 신하인 염친왕이 항명한다고 여겼을수도 있을테니까요.

물론 옹정제가 뒤끝만 있는것은 아닙니다. 가장 친했던 동생이자 절대 충성을 보여줬던 동생 이친왕의 경우 매우 극진하게 대접합니다. 이친왕은 매우 능력있는 인물이었음에도 황제에게 절대 복종했으며 황제가 골치아파하던 일을 아무말없이 해결하죠. 이런 동생을 옹정제는 무척 아꼈으며 국사의 상당부분을 맡깁니다. 이때문에 이친왕은 과로사하게 되죠-0-;;(뭐 물론 옹정제 스스로도 과로사 한거라 뭐라 할말이 없긴합니다..쿨럭..)

 


이친왕 윤상
옹정제는 이 동생을 매우 아꼈는데 이친왕은 형의 신임을 받는 만큼 돌려줬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옹정제는 이친왕이 죽자 "현"이라는 글자를 더붙여 "이현친왕"이라고 봉했습니다.
그리고 옹정제가 즉위하면서 옹정제와 같은 글자(윤)를 썼던 형제들은 모두 개명해야했는데 옹정제는 윤상의 이름만 원래 글자로 쓰도록 허용합니다.(이것은 다른 이들은 다 군신관계였지만 이친왕만은 형제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친왕의 후손들은 대대로 친왕의 지위를 유지하는 "철모자왕"의 지위를 얻게 됩니다.


자료출처
1.옹정제(미야자키 이치사다)
2. 위키피디어(중국어+구글번역기)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