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진짜 프랑스이야기는 적응이 안됩니다.
다음에 쓸려고 하는 오페라가 그 마고 이야기거든요-0-;;; 하여튼 프랑스는 너무 까탈스럽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디선가 보보경심 특집으로 썼던 글을 살짝 고쳐서 올려볼까합니다. (왜 고치냐구요...그게 보보경심이랑 너무 연관되어서 이야기해서 말입니다..ㅎㅎㅎ)
주제는 옹정제 집중탐구입니다. 왜 옹정제 이야기냐구요..개인적으로 옹정제를 살짝 좋아합니다.
보통 황제들은 뭐랄까 좀 멀리 동떨어진 느낌인데 옹정제 이야기를 읽으면 진짜 리얼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전형적인 독재군주인데다가 성실하고--;; 리얼하게 꽁한 부분이 있으며 이랬다 저랬다 해서 어느장단에 춤춰야할지 모르게 만들구요. ㅎㅎㅎ 밑에서 관리들은 죽어났겠습니다만 보는 저는 즐겁습니다.-0-;;;;
그래도 옹정제 시대때 "청렴"하다는것은 칭찬이 아니었다고 하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니(다시 말하면 관리들 대부분이 청렴했다는 이야기) 뭐 황제치고는 나름 괜찮은 군주 아니었겠습니까...ㅎㅎㅎ
옹정제, 그는 누구인가? 첫번째 옹정제의 부모와 형제
강희제
옹정제는 강희제의 네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생모는 덕비 오아씨로 그녀는 만주족 출신이긴 하지만 그리 높은 가문의 출신은 아니었던듯합니다. 하지만 강희제와의 사이에 여섯아이를 낳았으며 또 두 아들인 사황자와 십사황자 모두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던것을 보면 상당히 총애받던 후궁이었던것으로 추측됩니다. (강희제의 다른 후궁인 의비 곽락라씨가 가문도 더 높고 강희제의 총애를 더 받았다고 하는데, 강희제가 서거할 당시 의비가 덕비를 밀치고 황제곁으로 가려했는데 이에 대해 옹정제가 기분나빠했다고 합니다.)
청나라에는 고위직 후궁의 수가 정해져있었습니다 본부인격인 황후는 한명, 황후 바로밑의 황귀비가 한명, 귀비가 두명, 비가 네명, 빈은 여섯명을 둘수 있었죠. 그리고 나머지 직위의 후궁들은 무한정 둘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지위는 단순히 총애만으로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여성의 출신 가문 역시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결국 황자들은 어머니의 출신에 따라 황위가 더 가깝거나 더 멀거나 하게 되었죠.
강희제가 지명한 정식 황후는 모두 세명이었으며 옹정제의 생모인 덕비 오아씨는 아들이 즉위한후 황태후가 되었고 죽은후 황후로 추증받았습니다. 하지만 옹정제는 생모인 덕비말고도 또한명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강희제의 세번째황후였던 효의인황후 동가씨가 바로 옹정제의 어머니 역할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효의인황후 동가씨
동귀비
동귀비는 강희제와 고종사촌간이었는데 강희제는 동귀비를 총애했다고 합니다.
동귀비는 자신의 아들이 된 옹정제에게 황제의 잔심부름을 하게 했고 이때문에 옹정제는 강희제의 눈에 들게 됩니다. 후에 옹정제의 즉위를 도왔다고 알려지는 융과다는 동귀비의 사촌이었습니다. 동귀비의 아버지인 동국유는 팔황자를 지지하던 인물이었죠.
강희제는 수많은 비빈이 있었는데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첫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 혁사리씨였습니다 그녀는 강희제의 보정대신(선황에게 어린 황제를 보좌하도록 부탁받은 대신)중 한명이었던 색니의 손녀였으며 색액도의 조카이기도 했습니다. 효성인황후는 강희제의 두번째 아들이자 황태자가 되는 윤잉을 낳고 죽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강희제는 무척이나 슬퍼했으며 최고의 세력을 외가로 가지고 있던 윤잉은 두살이 되기전 황태자가 됩니다. 그리고 강희제가 친히 그를 가르치게 되죠. 하지만 나중에 이런 편애는 큰 문제가 되죠.
두번째 황후인 효소인황후 뉴호록씨였습니다. 그녀 역시 강희제의 보정대신 알필륭의 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없었습니다.
세번째 황후는 효의인황후 동가씨였습니다. 그녀는 원래 동귀비로 입궁했습니다. 그녀는 강희제와 사촌간이었는데 동귀비의 고모가 바로 강희제의 생모였습니다. 게다가 동가씨는 만주 최고의 귀족가문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재미난것은 동귀비의 가문은 원래 한족이었는데 청나라가 건국될때 큰 공을 세워서 만주 귀족가문이 되었다고합니다.) 강희제는 동귀비를 총애했는데 동귀비가 아이를 잃은후 울쩍해하는것을 보고 덕비의 아들이자 자신의 넷째 아들인 윤진을 데려와 키우게 했습니다. 황후들이 죽은 상태였기에 동귀비는 사실상 황궁에서 황후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이때문에 옹정제는 많은 이익을 얻게 됩니다. 동귀비는 황제의 잔심부름을 자신이 돌보던 윤진을 시켰고 이때문에 어려서부터 부황곁에 있었던 옹정제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게 됩니다. 훗날 강희제는 아들들에 대해서 논할때 태자를 제외하고 윤진(옹정제)만이 자신이 손수 길렀다라고 표현할 정도였죠. (다른 형제들은 황궁이 아닌 다른 대신의 집이나 황태후의 궁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동귀비는 옹정제가 여덟살쯤에 죽었으며 죽기 직전 동귀비는 강희제로부터 황후칭호를 받았습니다.
옹정제는 덕비의 소생이긴 했지만 덕비의 손에 키워지지 않았기에 야사에서는 덕비와 옹정제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것으로 나옵니다. 특히 덕비는 막내아들인 십사황자인 윤제(중국식으로는 옹정제의 이름과 발음이 같다고 합니다.) 를 편애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보경심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따르고 있죠. 하지만 옹정제는 다른 후비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무시하는 것을 경계했으며 즉위후 자신의 어머니를 황태후로 높였고 덕비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아들 둘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것에는 매우 상심했을듯합니다.
효공인황후 오아씨
덕비
옹정제의 생모
강희제의 아들들은 서른명이 넘었는데 그중 작위를 받은 아들만 스물네명이었습니다. 옹정제의 친동생인 십사황자뒤의 황자들은 대부분 어렸기 때문에 옹정제편에 선듯합니다만 그 위의 황자들은 황위계승을 위해 치열한 다툼을 벌렸고 이때문에 강희제는 늘 골치아파했다고 합니다.
첫째아들인 윤시는 어머니가 높은 신분이아니어서 강희제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장자이면서도 늘 아버지의 관심 밖대상이었죠. 그는 후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이지만 더 똑똑한 팔황자를 지지했다가 망합니다.--;;;
둘째아들인 윤잉은 황후의 아들로 어린시절부터 황태자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받았지만 이때문에 오만해져서 결국 두번이나 황태자지위에서 폐해집니다.
셋째아들인 윤지는 주로 학문에 관심이 많은 아들이었는데 덕분에 황위쟁탈에 그다지 깊이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황태자가 폐위된 이후 강희제가 가장 편안하게 대했던 아들이 이 셋째아들 윤지와 넷째아들인 옹정제였다고 합니다.
넷째아들이 바로 쓰예이자 옹정황제가 되는 윤진이죠.
다섯째아들은 윤기로 그는 온화한 인물이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재미난것은 옹정제가 치를 떨었던 구황자 윤당이랑 친형제 간으로 어머니가 의비 곽락라씨라고 합니다. (보보경심에서 왜 8황자와 10황자 부인들이 이 곽락라씨 집안의 자매들이죠.)
여덟째아들은 윤사로 맨날 옹정제 열받게 하던 사람이었죠. 옹정제는 그를 염친왕에 봉하긴 하지만 결국 그를 몰아내게 되죠. 윤사의 어머니인 양비 위씨는 천한 신분이라고 합니다. 덕분에 윤사는 매우 똑똑했지만 다른 형제들보다 처지는 지위를 받습니다. 그는 가장 어린 나이에 패륵지위에 오릅니다만 다른 형제들이 군왕이 되고 친왕이 되는동안에도 패륵지위에 머물게 되죠. 이때문에 윤사는 외가의 배경을 얻을수 없었기에 신하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얻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도리어 강희제의 미움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강희제는 팔황자를 태자로 세우자는 신하들의 건의가 있은후부터 이 여덟째 황자에 대해 뭘하든 질책하게 되는데, 이런 관점은 옹정제도 고스란히 물려받았습니다.
아홉째아들인 윤당은 팔황자와 함께 옹정제를 가장 열받게 만든 인물입니다. 그와 팔황자 윤사는 강제로 이름을 개명당한후 족보에서 삭제당했습니다.
열번째아들인 윤아 역시 팔황자와 함께 당을 이뤄서 옹정제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서역쪽으로 간뒤 유배당해서 더이상 음모에 관여할수 없었기에 건륭제가 즉위한후 그의 신분을 되돌려주고 황족으로 대우해주죠.
열세번째 아들인 윤상은 옹정제와 가장 친한 동생이었습니다. 윤상은 어머니가 죽은후 옹정제의 친어머니인 덕비의 손에 키워졌으며 이때문에 옹정제와 친한 사이가 됩니다. 그는 형의 심중을 매우 정확하게 꿰뚫어봤으며 형을 위해 무한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죠. 누구도 믿을수 없었던 옹정제가 유일하게 믿을수 있었던 동생이었습니다. 옹정제가 그를 얼마나 아꼈냐하면 즉위후 윤상을 이친왕에 봉했고 다른 친왕들과 달리 이친왕의 자손들은 대대로 친왕지위를 이어가도록 했습니다. 또 황제가 즉위한후에 황제와 같은 이름을 쓰는것은 금해졌기에 형제들 모두 이름의 글자를 바꿔야했지만 윤상만은 예외로 둘 정도였죠.
열네번째 아들은 옹정제의 친동생인 윤제입니다. 그 역시 강희제의 총애를 받던 황자였는데 강희제는 그를 "대장군왕"에 봉해서 군대를 이끌게 했고 이때문에 많은 야사나 옹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실 강희제가 옹정제가 아닌 십사황자에게 황위를 물려주려했다고 주장합니다. 옹정제와 윤제의 중국식 이름 발음은 둘다 똑같았으며 옹정제는 넷째 윤제는 열넷째였기때문에 유조를 위조했다는 이야기가 파다했죠. 하지만 유조는 한자와 만주어 둘다로 표기되었기에 십사(十四)를 사(四)로 고쳤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십삼황자
이친왕 윤상
그의 어머니는 황귀비로 어머니 신분으로 따지면 옹정제보다 더 높았다고 합니다만 어려서 어머니가 죽었기 때문에 강희제가 그다지 높게 보지 않았던듯합니다.
옹정제는 매우 엄격한 성격에 원칙주의자였으며 얼굴에는 언제나 무표정했기때문에 일명 "냉면왕(冷面王)"이라는 이름으로 불릴정도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옹정제가 강희연간에 세금문제를 해결하려했을때 매우 신분에 관계없이 엄하게만 다뤄서 아무도 그의 곁에 있으려하지 않았을정도였다고 합니다. 반면 팔황자 윤사는 언제나 사람들의 관계를 매우 잘 이뤄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하죠. 황태자가 폐위됐을때 많은 신하들이 팔황자를 황태자로 천거할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도리어 강희제가 팔황자에게 노여움을 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강희제는 후계자의 문제는 자신만의 고유 권한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때문에 황자들이 황태자가 되기 위해 정치에 관여하고 음모를 펼치는것에 경악하게 되죠. 결국 강희제는 가장 큰 파벌을 형성하고 있던 팔황자의 파벌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반면 옹정제는 워낙 인심을 잃어서 파벌을 형성할 사람이 없었죠. (다행히 옹정제의 최측근이었던 십삼황자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이어서 그나마 무마 가능했다고 합니다.) 또 옹정제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의 시중을 들었기에 아버지의 심중을 잘 파악했고 절대 황제앞에서 황위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다만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는 등의 일을 했다고 합니다.
옹정제
...옷이 보보경심에 나오는 그 옷이랑 비슷하죠 ㅎㅎㅎ
자료출처
1.강희제평전(장자오청,왕리건)
2.옹정제(미야자키 이치사다)
3.품인록(이중텐)
4.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쓰고있는글들 >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옹정제 그는 누구인가? 세번째 독재자로써 옹정제 (1) (0) | 2012.05.21 |
---|---|
옹정제,그는 누구인가? 두번째 황위계승 (0) | 2012.05.14 |
시씨황후의 형제 자매들 (0) | 2012.04.30 |
귀족과학자들...(2) 티코 브라헤 (0) | 2012.03.09 |
귀족 과학자들...(1) 헨리 캐번디시 (0) | 2012.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