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진짜 프랑스는 힘들어요..ㅠ.ㅠ
혁명전쟁도 겨우겨우 근근히 읽고 있는데 모르는 것을 읽으려니 더 힘들다는..
이상하게 프랑스는 책도 나름 열심히 읽었는데도 영국이나 스웨덴보다는 열의가 확확떨어진다죠--;;;
그러고 보면 제가 가톨릭 왕가에 대한 관심이 좀 덜 한듯해요..이런..--;;;;;;
하여튼 그래서 읽기 싫어서 다시 보보경심 특집 하나 더 훔쳐옵니다.
옹정제에 대한 여러가지 "악의적 소문"중 가장 큰것은 바로 "황위계승"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실 당시 사람들이 의심할만 했던것이 정치에 별로 관심없는듯했던 옹친왕이 느닷없이 즉위했으니 모두들 좀 어리둥절 했을겁니다. 소문이라는것이 버럭 대면 더 부채질 되는데 옹정제도 그런 이유인듯합니다.
이 보보경심 특집쓸려고 옹정제에 대해 좀 많이 읽어봤거든요. 그런데 읽으면서 느꼈는데 "왜 중국쪽 자료들에서 야사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는가?"를 생각해봤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옹정제때는 아직 "청"나라가 이민족 국가여서 한족들의 반발이 있었다고도 생각했다죠.(그런데 그럼 강희제는? 이라는 생각이 들긴하더군요. 강희제는 진짜 중국식 황제의 표본처럼 보이거든요=-=)
또 다른 생각 하나는 "중국"이 공산국가라는 사실입니다. 황제라는 지위는 인민의 적인 상황인데-0-;;과연 안그래도 비난밖에 없는 황제에 대해서 긍정적 평가를 어느정도 내릴까..라는 생각이 들었다죠.
그래도 최근 연구 결과에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옹정제에 대해서 나름 긍정적 평가도 많이 하는듯합니다.특히 옹정제의 황위계승이 "정당하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듯하구요.
옹정제,그는 누구인가? 두번째 황위계승
옹정제에 대한 가장 극악한 평가는 옹정제가 황위를 찬탈햇다는 이야기일듯합니다. 이는 주로 옹정제에 반대했었던 세력과 옹정제에 불만을 품었던 일단의 학자들이 유포한것이었죠. 재미난것은 옹정제가 스스로 이에 대해서 "버럭"거리는 바람에 학자들이 더 호기심을 가지고 덤빈듯한 면이 있는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알수 없는것이 조지 5세의 중혼 문제 같은것도 그냥 무시했다가 나중에 엄청 커져서 결국 국왕이 명예훼손 소송까지 했었다죠.)
이런 옹정제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도 옹정제가 "전통적이 이상적 황제"상과 잘 맞지 않는 인물이어서 그런듯합니다. 개국을 황제였다면 철권을 휘두르는것도 어느정도 용납했을것이지만 그것도 아니었죠.
쉽게 말하면 황제가 신하들 뒤통수 칠 궁리나 한다..는 시선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전 청대의 연구에서 "강건성세"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강희제와 건륭제에 대한 평가는 후했지만 이 두 황제를 이어준 옹정제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죠.
특히 중국에서 이런 시선을 느낄수 있는것이 바로 드라마들입니다. 2000년대 이전의 드라마에서 대부분 옹정제는 "나쁜편"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서서히 바뀌고 있었긴 한데 가장 큰 줄기는 아마도 1999년 CCTV에서 방영한 "옹정황제(중국명 : 雍正王朝)"일듯합니다. 아마도 그동안 옹정제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기에 가능한 평가가 아닐까합니다.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옹정제가 강희제로부터 황위를 이어받은것이 정당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듯 합니다.
옹정제
..보면서 손톱정리 참 잘하셨다는 생각과 강시 영화에 손톱이 왜 그렇게 나오는가가 살짝 이해가..--;;
강희제는 태자를 폐한후 공식적으로 후계자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가 수십년간 태자를 세웠지만 그 결과 태자와 그 주변을 둘러싼 인물들의 권력을 비대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부정부패에 태자 자신까지도 연루되기 만들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런 강희제의 행동은 도리어 황자들간의 권력다툼을 일으키게 됩니다.
강희제는 "후계자를 지목하는 행위"는 자신의 고유권한이라고 여겼습니다. 이 때문에 황자들이 황위계승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이에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은 바로 팔황자였죠. 팔황자는 어머니 신분이 미천했기에 이것을 만회하기 위해 여러 대신들과 교류했으며 여론의 지지를 얻습니다. 첫번째 태자를 폐위했을때 신하들이 지지한 인물이 팔황자이기도 했죠. 하지만 이런 여론은 강희제의 노여움을 사게 됐는데 고작 패륵이었던 팔황자가 엄청난 세력을 가진것을 보고는 도리어 의심을 품게 됩니다.
어쩌면 황제로써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을수도 있었을듯합니다. 덕분에 이후 팔황자는 늘 강희제의 질책을 받게 되는데 어떤 행동을 해도 늘 강희제는 그에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강희제는 아들들이 황위쟁탈이 아니라 우애있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다고 합니다. 태자 자리를 놓고 아들들이 다툼을 벌렸을때 오직 두명의 황자만이 아버지의 뜻을 따릅니다. 바로 삼황자인 성친왕과 사황자인 옹친왕이었죠. 둘다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고 형제들을 챙겼으며 대신들과의 정치적 교류를 멀리했기에 강희제가 함께 있으면 부자간의 정을 느끼던 두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옹정제가 황위에 진짜 관심이 없었을턱이 없지만 적어도 그는 아버지의 기분을 맞출줄 알았습니다. 옹정제는 속세를 떠나 유유자적하는 삶을 보여줬습니다. 강희제는 후에 신하들에게 황자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사아거"(옹정제)만을 직접양육했다고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비록 옹정제가 신하들과의 정치적 교류를 자재했지만 그의 사람들이 없었던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요직에 있던 중요 인물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포섭하거나 자신의 사람을 심어놓게 됩니다.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부자
옹정제와 건륭제
극심한 형제간의 권력투쟁을 겪었던 옹정제는 일찌감치 맘속에 보친왕 홍력을 황위계승자로 찍었던듯합니다.-0-;;;;
강희 57년 강희제는 자신의 유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합니다. 여기에서 황제는 후계자 이름만 빼놓고 발표했는데 같은 내용의 유조에는 후계자의 이름을 써놨었습니다. 아마도 이때 이미 후계자를 지목했을것으로 여겨지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아들인 옹정제일 가능성이 높았죠.
이후 강희제는 두명의 황자를 두드러지게 총애합니다. 바로 친형제간인 사황자 옹친왕과 십사황자였죠. 십사황자인 윤정은 덕비 소생으로 옹정제보다 10살 어린 친 동생이었습니다. 그는 겨우 패륵지위였지만 군사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강희제는 늘 골치아팠던 준가르 평정을 위해 십사황자에게 "대장군왕"칭호를 부여합니다. 이때문에 많은 이들이 십사황자가 황위계승을 할것이라고 추측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장군왕"이라는 칭호는 임시직이었으며 옹친왕보다 높은 지위가 아니었죠. 물론 이것은 옹친왕에 대한 경계도 포함될수 있었습니다. 죽어가고 있던 때 후계자한명만으로는 부족했을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갑자기 옹친왕에 대한 큰 흠을 발견한다면, 다음 후계자가 필요할텐데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때 또 이전의 내부 갈등에 접어드는것을 좌시할수 만은 없었을것이죠. 저 개인적으로는 강희제가 어쩌면 "십사황자"라는 보험을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옹친왕이 황위에 오르더라도 적어도 자기 친동생을 죽이진 않을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테니까요.
강희 60년부터 강희제가 해왔던 많은 제천행사를 옹친왕이 중심이 되어서 떠맡게 됩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은 황제로써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행사였으며 이 행사를 주관하게 하는 것 역시 옹친왕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수 있는것이죠. 강희제는 옹정제에 대해 "성량이 다른사람보다 뛰어나고 대의를 깊이 알고 있다"라고 칭찬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또 재미난 일화는 건륭제에 대한 일화에도 나옵니다. 어린시절 이름이 홍력이었던 건륭제는 옹정제의 넷째아들이었는데 어린시절부터 매우 총명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는 강희제 만년에 강희제가 궁으로 불러 교육시킨 몇안되는 손자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건륭제의 어머니는 신분이 상당히 낮았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궁녀로 입궁했다가 황궁에도 있지 못하고 옹친왕의 왕부로 보내졌다가 옹친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제비(셋째아들인 홍시의 어머니)의 시녀였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건륭제의 어머니는 옹친왕의 후궁으로 뽑혀서 왕부로 왔을것이라는 이야기가 더 믿을만하다고도 합니다. (여기서 건륭제의 어머니는 옹친왕부에 있을때 "격격"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부인들은 복진으로 불렀던것을 생각하면 좀 다른 칭호이긴한데 정확히 어떤 계급인지 잘 모르겠다죠. --;;;;; 격격이 만주족의 귀족이나 왕실 여성에게 붙이던 칭호라는 것 정도는 이해하는데 친왕의 측실로써는 어떤 정도의 지위인지 개념이 안서네요-0-;;;)
어쨌든 황손시절의 홍력은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던 손자중 하나였는데, 노황제는 어린 손자가 곰을 잡았다는 자랑거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자신이 곰을 다 죽인후 손자에게 활을 쏘도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쓰러졌던 곰이 홍력이 다가가자 갑자기 일어나서 으르렁댔다고 합니다. 놀란 황제가 곰을 잡았는데, 이때 홍력은 대담하게 곰이 다가왔던 그자리에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대담함을 보고 황제는 홍력이 황제감이라고 여겼으며 훗날 후계자를 고민할때 홍력이 황위를 얻게 하기 위해 홍력의 아버지인 옹정제에게 황위를 물려주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개인적으로 이 이야기는 그다지 믿지 않는데 건륭제 시절에 만들어낸 이야기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어쨌든 건륭제가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은것은 사실이었으며 마음에 드는 아들에 손자까지 마음에 들었으니 강희제의 마음이 옹정제에게 기울만했을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탈리아 화가던가가 그린 건륭제의 초상화
며칠전 서점가서 건륭제 전기를 봤는데 그때 표지가 이 초상화더라는..--;;
건륭제는 황손시절부터 이미 할아버지의 총애를 받았고 이에 강희제는 직접 건륭제의 어머니를 만나 고귀한 아들을 낳았다고 칭찬했다고 합니다만......이런 이야기들은 반만 믿어야한다고 생각하는지라..ㅎㅎㅎㅎ
강희 61년 11월에 강희제는 옹친왕에게 자신을 대신해 동지 제천대례를 행하도록 명을 합니다. 옹친왕이 제천대례를 지내러 간 사이 병세는 악화되었고 다시 옹친왕에게 돌아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11월 14일 수도에 남아있던 황자들은 황제의 침소에 모였는데, 삼황자 성친왕 윤지, 칠황자 순군왕 윤우, 팔황자 패륵 윤사, 구황자 패륵 윤당, 십황자 돈군왕 윤아, 십이황자 패륵 윤도, 십삼황자 윤상과 보군통령이자 상서였던 융과다가 모였습니다. 이때 황제는 황자들 앞에서 "넷째 황자 윤진은 인품이 귀중하고 자신에게 충실하다. 반드시 대통을 잘 이을수 있으니 짐에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하라"라는 유지를 남겼습니다만 이때 옹친왕은 아직 황궁에 다다르지 못했었습니다.
아침이 되어서야 옹친왕은 아버지에게 왔으며 그날 저녁 강희제는 사망했습니다.
부황이 죽은 당일 옹정제는 칠황자인 순군왕 윤우에게 황궁의 출입을 통제하게 하고 십이황자인 고산패자 윤도에게 건청궁에 제사를 지낼 준비를 맡깁니다. 그리고 십육황자인 윤록과 그의 아들인 홍승에게 궁궐호위를 맡기죠. 심삽황자인 윤상과 상서였던 융과다는 황제의 시신을 옮깁니다.
장례준비를 마친후 옹정제는 팔황자인 패륵 윤사, 십상황자인 윤상, 대제학 마제, 상서 융과다를 불러 실무를 관장케합니다. 자신의 사저의 일을 제외한 모든 일을 이들이 관장케했으며 십사황자를 수도로 불러들입니다.
16일 강희제의 유조가 정식으로 발표되고, 19일에는 옹정제가 황제로써 천지와 태묘,사직 봉선전에 제사를 지냈으며 20일에는 태화전에서 황제로 극등합니다. 28일에는 강희제의 시호와 묘호를 올렸는데 옹정제는 이를 마음에 들어했으며 특히 묘호인 "성조"라는 칭호는 자신의 손가락에 피를 내서 직접 쓰기도 했다습니다.
12월 3일 선황의 시신을 재궁에 안치했고 12월 9일 황제가 탈상을 합니다. 그리고 다음해 옹정 원년에 강희제의 묘호와 시호를 확정했으며 4월 2일 옹정제가 친히 선황의 시신을 안장하는것으로 장례를 끝마쳤습니다.
강희제
강건했던 군주는 자식들의 쌈질에 저렇게 초췌하게 늙어갔습니다.
옹정제 즉위시 가장 문제가 된것은 두가지였는데 첫째는 강희제의 증세가 호전되는듯하다가 갑자기 사망한점입니다. 특히 옹정제가 올린 탕약을 마시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의식을 잃고 사망했기에 옹정제가 선황을 시해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것으로 누가봐도 죽어가고 있던 강희제를 굳이 시해할필요가 없었을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옹정제는 이미 아버지인 강희제가 자신에게 황위를 물려줄것이라고 여겼을것인데 굳이 아버지를 죽일 필요가 있었겠냐는 것이죠.
사실 시해 이야기는 두번째 문제이자 더 중요한 문제와 연결됩니다. 옹정제가 강희제의 유조를 변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강희제는 말써로 유조를 남겼을뿐만 아니라 글로써도 남겨놨었습니다. 문제는 옹정제의 동생이자 유력한 황자였던 십사황자 윤정이 중국식으로는 옹정제의 이름과 발음이 똑같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때문에 당시 떠돌던 소문으로는 사실 강희제가 황위를 옹정제가 아닌 십사황자에게 물려줬다는 이야기가 돕니다. 그리고 유조에 대해서는 십사황자라고 썼던 부분을 교묘하게 사황자라고 고쳤다고 주장하죠. 앞의 十를 어조사로 고쳤다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에는 여러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먼저 가장 큰 문제는 청나라 공문서는 한어뿐만 아니라 만주어로도 표기되어있다고 합니다. 한문은 고칠수 있지만 만주어는 어떻게 고쳤냐는 문제가 있죠. 또 당시 문법상으로는 어조사를 쓰는것이 어색해서 쓰지 않았으며, 또 가장 중요한것이 공문서에는 '십사황자"라고 표기하지 않고 "황 십사자"라고 표기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열넷째 아들인 윤정은"황십사자(皇十四子)"로 표기 되는데 어떻게 유조를 고칠수 있었냐는 것이죠.
옹정제는 즉위초 요직에 있던 자신의 심복들을 통해 병권과 권력을 장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황제로 즉위하기전 유조를 들었던 옹정제의 다른 형제들이 강희제가 다른 사람을 지목했다면 과연 가만히 이를 받아들였었겠냐는 것입니다.
옹정제의 즉위에 대한 여러가지 이유기는 치열했던 후계자 쟁탈전의 후유증이 옹정제 초기에 나타나면서 밀려난 파벌들이 옹정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면서 퍼진것이 아닐까합니다. 그리고 체면을 중시하던 관리(주로 유학자들)을 경시하고 실적위주의 관리를 중용한 옹정제에 대한 유학자들 불만이 가중되었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옹정제가 "대의각미록"과 같은 책을 편찬하게 되면서 그에 대한 안티들이 극에 달하게 되는 계기가 된것이 아닐까합니다.
옹정제
3대가 코가 똑같은듯...-0-;;;
개인적으로 옹정제도 니콜라이 1세만큼 독재자로 여겼는데 니콜라이 1세보다는 좀 멀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답니다. 니콜라이 1세는 언론 검열을 어떻게 하는지 알았거든요. 어떻게 하냐구요. "어떤 사항에 대해서 언급하는것 자체를 금지 시켰다"라고 합니다. 훗날 이런 방식은 옹정제의 아들인 건륭제가 써먹기도 합니다.
(....--;;; 옹정제는 나름 괜찮은 군주였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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