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

하노버 가문의 스캔들...2. 조지 4세와 캐롤라인 왕비

엘아라 2012. 5. 16.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방데 내전 읽고 있는데 정리해둔 것을 다른곳에 놔뒀군요..아하하-0-;;

결국 다른 이야기 해야하는데 뭐 할 이야기가 없네요

그래서 결국 유명한 조지 4세와 캐롤라인 왕비 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이 평생 마음이 안 맞았던 부부는 죽을때까지 쌈질했다죠.

 

하노버 가문의 스캔들...2. 조지 4세와 캐롤라인 왕비

 

조지 3세와 샬럿 왕비는 매우 사랑하는 사이였으며 둘 사이에서는 수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다. 훗날 포르피린증으로 알려지게 되는 조지 3세는 이 병때문에 광증을 앓게 되는데 조지 3세가 미치는데는 골치아픈 아들들도 한 몫했을듯하다.

 

 

조지 3세와 샬럿 왕비의 장남

웨일즈공 조지

후에 조지 4세 

후에 아버지를 대신해서 섭정을 했기 때문에 섭정왕자라고도 불립니다.

 

조지 3세의 아들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여자들과 연애질을 즐기며 살았다. 특히 후계자인 웨일즈공은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 역시 동생들처럼 많은 정부가 있었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오래도록 사랑한 여성이 가톨릭 교도였다. "피츠허버트 부인"이라고 알려진 그녀는 웨일즈 공과 꽤 오래도록 연인관계였으며 비밀 결혼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문제는 조지 1세가 즉위하게 된 이유가 "신교"부모밑에서 태어나서 "신교도"와 결혼한 신교도였기 때문이었다. 이전의 가톨릭 교도 친척들은 다 왕위계승에서 배제됐는데 그 수가 거의 50명에 가까웠다.

이때문에 가톨릭 교도와 결혼하는 것은 그야말로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하는 일이었다.

 

 

피츠허버트 부인

평생 조지 4세때문에 힘들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의회는 국왕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되자 후계자 문제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정부들과 살고 있던 왕자들을 꼬셔서 결혼 시켜 정당한 후계자를 얻어야 했고, 결국 의회는 장남이자 후계자인 웨일즈 공을 설득하기에 이른다. 웨일즈공은 여러가지 값비싼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때문에 빚이 엄청났다. 의회는 웨일즈공의 빚을 갚아주는 조건으로 사촌들중 한명과 결혼하라고 종용한다. 신부감으로 거론된 여성은 두명이었는데 한명은 어머니의 조카였던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루이제였으며 다른 한명은 아버지의 조카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카롤리네였다. 모두들 루이제가 영국 왕비감으로 적당하다고 여겼지만, 당시 웨일즈 공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여성인 저지부인은 카롤리네가 더 적임자로 여겼다. 카롤리네가 웨일즈 공의 아내가 된다면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 들지 않을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웨일즈공은 카롤리네를 선택했다. (참고로 루이제는 후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결혼했으며, 나폴레옹 전쟁때 유명한 "프로이센의 루이제 왕비"가 된다.)

 

 

브라운슈바이크의 카롤리네

평생 남편이랑 왠수가 될줄은 몰랐을듯...

 

웨일즈공과 카롤리네(영국에서는 캐롤라인으로 불림)은 첫 만남부터 실망스러웠다. 캐롤라인은 웨일즈공이 보기에는 촌스러웠으며, 캐롤라인은 정부가 있는 웨일즈공이 역시 실망스러웠다. 어쨌든 둘은 결혼했는데 결혼 직후에 별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혼식 딱 구개월후에 후계자이자 웨일즈공의 외동딸이자 조지 3세의 첫 손주인 "샬럿"이 태어났다. 아이의 탄생에 대해서 웨일즈공은 "기적"이라고 말할정도였다.

 

후계자가 태어나자 둘은 대놓고 별거하기에 이르렀다. 둘다 아이의 양육권을 원했는데 승리한쪽은 웨일즈공이었다. 웨일즈공은 아내와 아이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도리어 캐롤라인에 대한 국민들의 동정심을 사게 했다. 왜냐면 웨일즈공은 아내와 아이를 만나지 못하게 했지만, 자신 역시 아이의 양육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아내를 괴롭히기 위해 아이를 뺏아서 방치하는 모습으로 비춰졌고 국민들은 이런 모습에 캐롤라인과 샬럿을 동정하기에 이르른다. (이후 샬럿은 늘 국민의 사랑받는 공주가 됩니다. 어린시절부터 국민들은 불쌍한 샬럿 공주를 아꼈기에 하노버 가문에서 국민의 사랑을 받은 드문 왕족이 됐다고 하더군요.)

 

 

딸 샬럿과 함께 있는 캐롤라인

 

캐롤라인과 웨일즈공은 서로 별거 하면서 각기 연애질을 했다. 하지만 캐롤라인의 연애질은 문제가 되는데 캐롤라인이 "남자아이"와 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더 그랬다. 의회는 그 아이가 캐롤라인의 아이인지, 웨일즈공의 아이인지  확인하려 했고 캐롤라인과 웨일즈공 모두 이에 대해 강력하게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문제들이 생기자 왕실에서는 캐롤라인을 영국 밖에서 살도록 했다.

 

캐롤라인이 유럽에서 지내는 동안 웨일즈공은 캐롤라인과 이혼하려는 건수를 잡으려고 사람을 보내 캐롤라인을 감시하게 한다. 캐롤라인은 한 남자와 연애질 중이라는 소문이 온 유럽에 파다했는데 웨일즈공이 보낸 첩자는 그 증거를 잡지는 못했다. 

 

 

캐롤라인과 그녀의 연인에 대한 풍자화

 

1817년 캐롤라인은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일년전 결혼했던 딸 샬럿이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웨일즈공은 아내에게 딸의 죽음을 알리길 거부했고, 사위인 레오폴트가 겨우 장모에게 편지를 전해서 이 사실을 알렸다.

 

1820년 웨일즈공의 아버지인 조지 3세가 사망하고 웨일즈 공이 즉위하자 캐롤라인에 대한 문제는 다시 일어난다. 캐롤라인은 남편이 국왕이 되자 그녀 역시 법적으로 영국의 왕비가되었다. 하지만 많은 곳에서 그녀의 특수한 상황때문에 그녀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으려했다. 이때문에 캐롤라인은 자신이 영국의 왕비임을 증명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간다.

 

조지 4세는 아내와 이혼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그의 시도는 처음에는 성공적이었다. 영국의 국교회 측은 전례에서 캐롤라인의 이름을 빼는것을 동의했다. 하지만 국왕의 이혼에 대해서는 반대했는데 이는 매우 미묘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조지 3세의 아들들은 국민에게 엄청나게 인기가 없었다. 특히 조지 4세는 인기가 더 없었는데, 특히 딸이나 아내에 대한 푸대접 역시 조지 4세의 인기를 떨어뜨리는데 부채질하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에 국교회가 끼어드는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을것이다.

 

 

1820년의 풍자화

 

 

결국 조지 4세는 캐롤라인과 이혼을 위해 의회에 아내를 고발하기에 이르렀고, 캐롤라인은 의회에 나아가서 자신이 정당한 왕비임을 인정시켜야만했다. 조지 4세의 많은 첩자들이 캐롤라인의 부정을 증언했다. 하지만 조지 4세 역시 수많은 정부들이 있기는 마찬가지였기에 도리어 이 재판은 국민들에게 조지 4세의 인기를 떨어뜨리고 캐롤라인의 인기를 증가시키는 일이 되었다. 상원에서는 캐롤라인의 왕비 지위를 박탈하는데 동의했지만 하원에서 이 법안이 통과되지 못했기에 결국 캐롤라인은 정식으로 "왕비"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의회에 출석한 캐롤라인 왕비

 

조지 4세는 자신의 대관식에서 캐롤라인을 마주치길 원치 않았고 사람을 보내 대관식에 오지 못하도록 했다. 이에 화가난 캐롤라인은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갔는데 조지 4세는 사람을 시켜 캐롤라인이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못 들어오도록 했다. 캐롤라인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엄청 노력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많은 이들이 왕비가 이렇게 박대당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무척이나 마음아파했다.

 

 

대관식 입장을 거절 당하는 캐롤라인 왕비

 

대관식 다음날부터 캐롤라인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대관식 다음달에 53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마도 캐롤라인은 암을 앓고 있었다고 여겨지지만, 당시 많은 이들은 왕비가 독살당했다고 여겨졌다.

캐롤라인의 시신은 고향인 브라운슈바이크로 돌려보내졌는데 이때 수상은 시신의 운구 행렬을 도시를 지나는 행렬로 하지 않으려했다. 하지만 인기 있었던 왕비였던 캐롤라인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많은 시민들이 캐롤라인의 운구 행렬을 따랐고 이때문에 막으려던 군인들과 운구행렬을 따르던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1820년

캐롤라인 왕비

 

조지 4세는 아내가 죽은뒤 9년을 더 살았다. 그는 점점 살이 쪘고 술을 많이 마셨으며 다양한 증상에 시달렸다.아마도 이것은 가문의 유전병인 "포르피린증"때문일것이라고 추측되었다. 몇몇 기록에서는 죽기 직전 조지 4세 역시 아버지 조지 3세처럼 "광증"을 보이고 있었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조지 4세는 윈저에 묻혔고 사이나빴던 이 부부는 죽어서도 서로 다른곳에 묻혔다.

 

 

1822년

조지 4세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