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생일이라 뭘 할려고 했더니 읽은 글이 없어서 결국 삐져서 숨겨놨던 글을 다시 풉니다.
베아트리스 공주 전기를 읽을때 몇몇재미난 이야기들중 하나였는데 지난번 사건(고작 출처한줄 적어주는것이 뭐그리 힘든지...--;;; 솔직히 아직도 짜증이 나요.)으로 닫았던 글 중 하나를 풉니다.
앨리스 왕자비이야기를 해볼까 하다가 앨리스 왕자비 이야기는 다 지워서--;; 결국 그냥 잠궈놨던 글인 베아트리스 공주 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베아트리스 공주는 엄마에게 굉장히 얽매여 살았는데, 제가 읽고있는 책의 저자는 빅토리아 여왕의 베아트리스에 대한 소유욕을 엄청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뭐 전 그에 대해서 반정도만 그럴거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여왕이 베아트리스가 결혼한다고 했을때 결사 반대를 했다는것을 보면 그럴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아하하하...........
베아트리스 공주와 프린스 임페리얼 루이 나폴레옹
1870년대의 베아트리스
빅토리아 여왕의 베아트리스에 대한 집착은 가족들이 모두 인정한 것이었다. 특히나 딸들이 하나 둘씩 결혼하면서 최우선이 어머니가 아닌 남편과 아이들로 변하는것에 못참아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외손녀인 헤센의 빅토리아에게 결혼후에는 "너에게 최고로 우선이 되어야하는 사람은 네 남편과 아이란다"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지만, 빅토리아가 결혼하기전 사위에게 보낸 편지에는 빅토리아의 최우선순위는 결혼이 아니라 (홀로 된) 아버지여야한다고 주장했다.
남편을 잃은후 어린 베아트리스를 안고 있는 빅토리아 여왕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을 잃고 무기력하게 있을때, 자신을 필요로하는 베아트리스를 보면서 다시 기운을 차렸다..-0-;;라고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모두들 여왕님 눈치보기 바빴다는....
왕가의 여성이 견진성사를 받는다는 것은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외도 있는데, 주로 견진성사전에 약혼을 하게 되는 경우였다. 이때는 서둘러 견진성사를 치룬후 약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거나 결혼을 했다.하지만 여왕은 막내딸이 언니들과 달리 "어린 나이"에 견진성사 받는것을 반대했다. 여왕의 의지와는 달리 베아트리스도 언니들과 마찬가지로 16살에 견진성사를 치뤘다. 하지만 여왕은 막내딸이 결혼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라고 모두에게 강조했고, 또 여왕의 가족들과 신하들 역시 여왕이 막내딸을 결혼시키길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견진 성사때 쯤의 베아트리스 공주
여왕의 방해에도 베아트리스에게는 남편감으로 이야기되는 사람들이 몇명있었다. 그중 가장 먼저 만났으며,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3세와 외제니 황후의 아들인 프린스 임페리얼 루이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3세 가족들은 제정이 붕괴되자 영국으로 망명해야했다. 빅토리아 여왕과 웨일즈공은 늘 프랑스에 호의적이었고 이 보나파르트가 사람들을 좋아했다. 여왕은 외제니 황후와 친구가 되었고, 나폴레옹3세가 죽자, 같은 "과부"로써 좀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남편이 죽은후 자기 또래의 여성들과 자주 교류하는것을 거부했던 빅토리아 여왕에게 외제니 황후는 좀 특별한 인물이었다.
이런 여왕과 황후의 관계는 빅토리아 여왕이 외제니 황후의 외동아들인 프린스 임페리얼에 관심을 갖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외모에 민감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프린스 임페리얼의 키가 좀 작다고 계속 이야기하긴 했지만 대신 "너무나 잘 생겼다"라고도 언급했다.
프린스 임페리얼은 아버지 나폴레옹3세를 닮아서 키가 작았다. 하지만 그는 전설적인 아름다움으로 유명했던 외제니 황후의 쳐진눈과 곧고 긴 코 그리고 우아한 입매를 닮았다. 게다가 작고 볼품없는 외모였지만, 말과 행동에서 다른 사람들을 사로 잡았던 나폴레옹3세의 카리스마도 물려받았다. 이런 그의 모습은 빅토리아 여왕의 궁정에서 늘 환영받았고, 어머니 곁에 붙잡혀 살던 외로운 소녀인 베아트리스에게도 무엇인가 남다른 감정을 심어주게 되었을것이다.
프린스 임페리얼
루이 나폴레옹
어머니의 처진눈을 꼭 닮았습니다.
언론은 끊임없이 그와 베아트리스와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여왕의 막내 사위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막내딸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빅토리아 여왕은 그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쓰고 있지 않았을듯하다. 여왕과 베아트리스공주의 생각이 정확이 어떤것었는지 알수는 없지만, 베아트리스와 프린스 임페리얼 사이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프린스 임페리얼은 전쟁에 직접 참전하고 싶어했다. 빅토리아 여왕과 외제니 황후는 이런 그를 위해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특히나 빅토리아 여왕은 프린스 임페리얼이 "너무나 모험심이 강하다"라고 언급했다. 이런 모험심과 예기치 못한 사고는 프린스 임페리얼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남아프리카에서 프린스 임페리얼이 포함된 분대는 줄루족의 습격을 받았다. 이때 프린스 임페리얼은 말에서 떨어졌으며 다시 올라타지 못했다. 후에 발견된 프린스 임페리얼의 시신에는 17군데의 창에 찔린 상처가 있었다.
그의 죽음은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일기에 "베아트리스가 너무나 슬퍼한다...모두들 망연자실해있다."라고 언급할정도였다.
프린스 임페리얼의 어머니 외제니 황후는 베아트리스를 특별한 존재로 여겼다. 아마도 그녀는 베아트리스 공주가 며느리가 되길 바랬을듯하다. 하지만 아들의 죽음은 황후와 공주가 가족이 되지 못하게 했다. 비록 프린스 임페리얼은 죽었지만 베아트리스와 외제니 황후의 우정은 평생 계속되었다. 베아트리스는 외제니 황후를 정기적으로 방문했었고, 외제니 황후는 베아트리스의 딸인 "에나"의 대모가 되어주기도 했다.
1880년대의 외제니 황후
베아트리스와 프린스 임페리얼에 대한 소문은 매우 오래갔다. 베아트리스가 평생 자신의 책상에 프린스 임페리얼의 사진을 놔두었다던가 죽기전 아들인 알렉산더 마운트배튼경에게 사실 프린스 임페리얼을 사랑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또 남편인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와 프린스 임페리얼의 유사성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이들조차 있다.
베아트리스와 프린스 임페리얼이 사랑에 빠졌다는 결정적 증거는 없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단지 소문 내지 심증일 뿐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점은 불안정하고 짜증스러운 과부 어머니에게 얽매여 살던 10대 소녀에게 자신 주변에 있던 유일한 또래의 남자에게 관심이 안갈수는 없었을것이다. 그 남자가 잘생기고 쾌활하며 카리스마까지 갖추었다면 더욱더 그랬을듯하다.
빅토리아 여왕과 베아트리스 공주
1880년대
...이렇게 베아트리스 공주는 엄마곁에서 붙잡혀 삽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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