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사실 빅토리아 여왕만 딸네미를 붙잡고 산것이 아닙니다.
며느리인 알렉산드라 왕비 역시 딸네미를 잡고 안놔줬죠.
알렉산드라 왕비는 둘째딸인 빅토리아 알렉산드라 공주를 안놔줬는데 그녀는 한때 결혼할려고 생각했던 남자까지 있었지만 부모의 거부로 결국 엄마 옆에서 살다가 엄마가 죽은후에야 간신히 자신의 삶을 꾸려갈수 있었죠.
라푼젤 이야기와 왕족들...(2) 영국의 알렉산드라 왕비와 둘째딸인 빅토리아 (알렉산드라) 공주
영국의 알렉산드라 왕비는 덴마크의 공주로 크리스티안 9세의 장녀입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답기로 이름이 높았는데 앨버트공이 바람기가 다분한 장남 버티를 위해 고른 여성으로 여왕과 앨버트공이 흡족해한 미모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알렉산드라 왕비는 무척이나 아름다운데다가 다정다감한 성격이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알렉산드라 왕비는 에드워드 7세가 좋아하는 타입의 여성이 아니었습니다.에드워드 7세가 좋아한 여성들은 대부분 재치있고 영리하며 약간은 사교계에 이슈가 되는 여성이었습니다만, 알렉산드라는 아름답긴했지만, 그냥 평범한 왕족으로 그다지 많이 영리하다거나 지적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아이를 낳고 나서 몸이 점점 아팠으며 귀가 잘 안들리기 시작했다고도 합니다.
결혼식때의 알렉산드라와 에드워드 7세
에드워드 7세는 늘 정부가 있었고 알렉산드라는 남편의 정부를 눈감아주면서 살았습니다. 가끔 자신이 용납할수 없는 여성이 정부가 됐을때는 열받아서 친정으로 가버린후에 한동안 영국에 돌아오지 않기도 합니다. (여동생을 만나러 러시아에 가버린때도 있습니다.)
이때문에 에드워드 7세는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해서 아내에게 양보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특히 자녀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아내에게 양보합니다. 알렉산드라 왕비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으며 남편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여성으로 살고 싶어했는데 남편인 에드워드 7세는 그녀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죠. 이때문에 알렉산드라는 아이들에게 집착을 보입니다.
다큰 아들들에게도 마치 세살짜리 어린애하듯이 했고, 아들에게 쓴 편지는 꼭 연애편지나 다름없었죠. 아들들도 이런 어머니에게 무척이나 다정하게 대합니다. 또 딸들을 곁에 두고 결혼하는것에 매우 부정적 반응을 보이죠. 아마도 자신의 불행한 결혼생활 경험때문에 딸들도 똑같이 이런 경험을 할것이라 염려했을수도 있습니다만, 아이들이 떠나가는것이 싫었기때문이기도 합니다.
시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한후 상중일때의 알렉산드라 왕비
왕비의 이런 집착은 아들들이 왕위계승자로 수업을 받으면서 해외로 나가고, 군복무를 위해 어머니 곁을 떠나면서 심해졌고 절정은 큰아들인 에디가 갑자기 사망했을때였죠. 왕비는 큰아들의 죽음에서 절대 헤어나올수 없었다고 합니다.
에드워드 7세의 다섯 아이들
알렉산드라 왕비의 큰딸인 프린세스 로열 루이즈는 결혼에 대한 어머니의 부정적 반응을 알고 있었고, 그녀는 결국 자신의 남편감을 찾아나섭니다. 바로 아버지의 친구였던 파이프 백작 알렉산더 더프였죠. 빅토리아 여왕은 그에 대해서 "버티의 친구중 가장 믿음직하다"라고 평가했었죠. 부모가 결혼을 반대할것을 알았기에 루이즈는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에게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합니다. 알렉산드라는 딸의 결혼을 싫어했고, 당시 웨일즈공이었던 에드워드 7세는 영국의 공주가 신하인 귀족과 결혼하는것을 반대하던 입장이었죠.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루이즈의 결혼을 허락했고 알렉산더 더프에게 파이프 공작 칭호를 부여해주죠. 루이즈는 결혼후 어머니와 떨어져서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조용한 삶을 살아갑니다.
파이프 공작 부부
프린세스 로열 루이즈와 파이프 공작 알렉산더 더프
알렉산드라 왕비의 남은 두 딸인 빅토리아와 모드는 오래도록 결혼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딸들이 빨리 결혼한것에 비하면 상당히 늦게까지 결혼하지 않았죠. 둘에게 여러혼담이 진행됐지만 어머니 알렉산드라 왕비에게는 그 혼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죠.
그러다가 모드는 자신의 짝을 찾게 됩니다. 자신보다 세살 어린 사촌인 덴마크의 칼 왕자였죠. 덴마크의 칼 왕자는 덴마크의 프레데릭 8세와 스웨덴의 로비사 공주의 둘째아들이었기에 둘은 사촌간이 됩니다.
알렉산드라 왕비는 이 결혼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는데 왜냐면 딸이 자신의 친정인 덴마크 왕가로 시집갔기 때문입니다. 덴마크 왕가는 무척이나 가족적인 분위기였고 알렉산드라 역시 이런 분위기를 좋아했기에 조카와 딸이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후에 칼 왕자는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선출되었고, 이름을 노르웨이식으로 호콘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노르웨이 국왕이 될수 있었던것은 외할아버지가 스웨덴 국왕이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아내가 영국의 공주라는 이유도 한몫했다고 합니다. 에드워드 7세가 딸을 왕비로 만들기 위해 엄청 노력했다는 이야기도 있죠.
모드와 남편 그리고 아들 올라프
노르웨이의 호콘7세와 그의 부인인 모드 왕비 그리고 아들인 올라프
(스웨덴어나 노르웨이어 덴마크어에서 AA는 오 발음이 난답니다. 그래서 이번에 파산했다는 SAAB는 "사브"라고 읽으면 안되고 "소브"라고 읽어야하는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죠.)
이렇게 되자 남은 딸은 둘째딸인 빅토리아 알렉산드라 공주밖에 없게 되죠. 알렉산드라 왕비는 남은 둘째딸은 잃지 않으려고 했는데 빅토리아 공주는 점점 늙어가는 어머니 곁에서 시중을 들게 됩니다.
어머니,이모와 함께 있는 빅토리아 공주
왼쪽이 빅토리아 공주, 가운데가 알렉산드라 왕비, 가장 오른쪽이 러시아의 마리야 표됴로브나 황태후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 왕비의 딸들중 제일 예뻤으며 명랑했던 딸이었던 빅토리아 공주는 오빠인 조지 5세가 가장 사랑한 동생이기도 했습니다.
빅토리아 공주가 사랑을 해보지 않을것은 아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과의 로맨스가 전해지는 데 특히 Lord Rosebery 와는 결혼할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해서 미국의 신문에 소문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빅토리아 공주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7세는 신하와 공주와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을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와 결혼하려했었다면, 아마 에드워드 7세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을듯합니다.
어머니 알렉산드라 왕비와 함께 있는 빅토리아 공주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
2.http://query.nytimes.com/gst/abstract.html?res=F2081EFE3D5C17738DDDAA0994D9415B8285F0D3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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