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스웨덴

스웨덴의 공주들...번외편2 : 안나 카타리나 콘스탄티아 : 시기스문드의 딸

엘아라 2012. 4. 24.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복잡다난한 시기스문드까지 왔네요

그런데 보니까 시기스문드 아들들만 줄줄이고 딸이 별로 없군요. 게다가 성인으로 성장한 딸은 한명밖에 없다죠. 왜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아내인 마리아 엘레오노라가 아들을 낳지 못해서 조바심을 내서 우울증까지 걸렸다는 소리가 나왔는지 이해가 되는군요..-0-;;;;;;;;


시기스문드의 딸인 안나 카타리나 콘스탄티아를 번외로 넣는 이유는 시기스문드가 스웨덴 왕위를 잃은후에 얻은 딸이라서 정확히 스웨덴의 공주라기에는 좀 그렇거든요. 폴란드 공주는 맞는데 스웨덴 공주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죠. 그래도 스웨덴의 국왕이었던 시기스문드의 딸이라 번외로 넣기로 했습니다.


스웨덴의 공주들...번외편2 : 안나 카타리나 콘스탄티아 : 시기스문드의 딸




안나 카타리나 콘스탄티아 바사

(안나 카타지냐 콘스탄자 바자)

Anna Catherine Constance Vasa of Poland, 

Polish: Anna Katarzyna Konstancja Waza 

(7 August 1619 in Warsaw – 8 October 1651 in Cologne)


안나 카타리나 콘스탄티아는 폴란드의 국왕인 지그문트 3세와 그의 두번째 부인인 오스트리아의 콘스탄체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안나의 아버지인 지그문트 3세는 원래 스웨덴 국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의 국왕인 요한 3세와 그의 부인인 카타리나 야겔로니카의 아들이었죠. 요한 3세는 형인 에릭 14세와의 왕권 다툼에서 유리한 입지를 얻기 위해 폴란드 공주였던 카타리나 야겔로니카와 결혼했었죠.  폴란드의 야겔론 가문의 남성 직계가 단절되면서 혼란이 일어났고 결국 시기스문드(지그문트 3세의 스웨덴식 이름)가 어머니의 권리를 이어받아서 폴란드의 국왕이 지그문트 3세가 되죠. 

이후 시기스문드는 아버지가 죽은후 스웨덴의 국왕도 됩니다만, 그는 가톨릭으로 성장했고 신교국가였던 스웨덴에서 마찰을 일으키게 됩니다. 결국 스웨덴 귀족들은 시기스문드를 몰아내고 그의 숙부였던 쇠데르만란드 공작인 칼을 국왕으로 내세웁니다. 이후 시기스문드는 스웨덴 국왕 지위를 뺏겼는데 그는 평생 스웨덴 국왕지위를 되찾으려고 애썼다고 합니다.


 

안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스웨덴의 요한 3세와 폴란드의 카타리나 야겔로니카

요한 3세는 정치적 목적으로 카타리나와 결혼했는데 카타리나가 죽은후에는 구닐라 비엘케라는 스웨덴 귀족 여성과 결혼합니다. 왜 외국 공주와 결혼하지 않냐는 물음에 "초상화를 보고 결혼하는 짓을 하지 않겠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카타리나 야겔로니카는 아들에게 폴란드 왕위를 가져다 줬습니다.

 

안나의 아버지

스웨덴의 시기스문드

폴란드의 지그문트 3세

지그문트라는 이름은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딴듯합니다. 그는 평생 스웨덴 왕위를 되찾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안나의 어머니인 콘스탄자는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카를2세와 그의 부인인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의 딸이었습니다. 카를 대공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이었고,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는 카를 대공의 조카이기도 했습니다. (카를 대공의 누나인 안나가 마리아 안나의 어머니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콘스탄자의 오빠인 페르디난트는 사촌인 마티아스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됩니다. 

페르디난트 2세는 독일의 30년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는 가톨릭 세력을 필요로했고 당시 강대국이었던 폴란드는 좋은 동맹관계를 맺을 기회를 얻게 되죠. (독일 북부를 지배했던 프로이센 공작은 폴란드 국왕의 봉신이기도 했습니다.) 이때문에 페르디난트는 여동생인 안나를 시기스문트와 결혼시켰죠. 하지만 안나는 남편보다 먼저 죽었고 이때문에 페르디난트는 또 다른 여동생인 콘스탄자를 시기스문드에게 시집보냅니다. 그리고 콘스탄자의 딸이 바로 안나 카타리나 콘스탄티아였죠.

 

안나의 외할머니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과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둘은 열다섯명의  아이들을 낳았고 둘의 아이들은 후계자가 거의 끊어지게 된 오스트리아측 합스부르크의 후계자 문제를 해결해줬습니다.

 

 

안나의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콘스탄자 

 


아마 안나 카타리나 콘스탄티아라는 이름에서 안나는 이모이자 아버지의 첫번재 부인이었던 안나와 할머니 카탈리나 야겔로니카 그리고 어머니 콘스탄자의 이름에서 따온듯합니다. 안나 카타리나가 태어났을때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 왕위를 잃은 후였기 때문에 안나는 폴란드의 공주 칭호만 받습니다.

 

 

안나의 이모이자 아버지의 첫번째 아내였던 오스트리아의 안나

 

1632년 안나 카타리나는 폴란드 의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영지를 받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지그문트 3세가 죽기전 딸을 위해 했던 일이 아닐까 추측되는데, 왜냐면 1632년 봄 지그문트 3세가 사망했기 때문이죠.

안나 카타리나가 18살이 되자 안나에게 혼담이 들어옵니다. 합스부르크가와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사촌인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페르디난트 카를과의 혼담이었죠. 페르디난트 카를은 외삼촌인 레오폴트 대공의 아들이었습니다. 결혼협상이 수년간 진행되었지만 결혼에 이르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가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이 안나보다 9살이나 어렸고 또 양가의 혼수에 대한 이견도 문제가 됐다고 합니다.

 

안나의 사촌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

안나의 외삼촌인 레오폴트의 아들이었습니다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과의 결혼협상이 결렬된후인 1642년 안나는 팔츠-노이부르크 출신의 필리프 빌헬름과 결혼합니다. 그는 필리프 빌헬름은 당시 중요한 요충지인 하나였던 율리히와 베르크의 공작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후에 그는 팔츠 선제후 가문의 남성 직계가 단절되자 친척의 뒤를 이어 팔츠 선제후가 됩니다.)

 

 

팔츠-노이부르크의 필리프 빌헬름

안나의 남편

후에 팔츠 선제후 지위를 물려받게 됩니다만 그는 가톨릭이었고 팔츠 선제후는 원래 신교도였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자신의 제수인 리젤로트(엘리자베트 샤를로테)에게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전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안나 카타리나는 아들 한명을 낳았지만 출생직후 사망했습니다.

그후 아이를 더 갖지 못했으며 1651년 사망했습니다. 

 

 

안나 카타리나

폴란드의 공주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