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스웨덴

스웨덴의 공주들...(7)소피아 :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딸

엘아라 2012. 2. 2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홀슈타인-고토로프로 왔습니다.

그런데 홀슈타인-고토로프쪽도 의외로 공주들이 많이 없네요

하긴 이쪽 집안은 자손들이 많이 없어서 그런듯해요.

 

스웨덴의 공주들...(7)소피아 :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딸

 

 

 

 

 

 

스웨덴의 소피아 공주

바덴의 조피 대공비

소피아 빌헬미나 카타리나 마리아 로비사 샤를로타 안나

Princess Sophie Wilhelmine of Sweden

Sofia Vilhelmina Katarina Maria Lovisa Charlotta Anna av Sverige,

 Sophie Wilhelmine Katherine Marie Luise Charlotte Anne von Schweden),

(21 May 1801 – 6 July 1865),

빈터할터 그림

빈터할터가 처음으로 왕족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것은 바로 이 바덴대공가 사람들이 시작이었습니다.

 

 

스웨덴의 소피아 공주는 1801년 스톡홀름에서 스웨덴의 구스타프 4세 아돌프와 그의 부인인 바덴의 프레데리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 소피아는 몇몇 기록에서 고집세고 거만한 아이라고 묘사되기도 합니다.소피아가 8살이 되던해 아버지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장교들에 의해서 왕위에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소피아의 가족 모두 역시 스웨덴을 떠나게 됩니다. 1810년 부모가 이혼하자 소피아와 다른 형제자매들은 어머니를 따라 바덴으로 가서 그곳에서 지내게 되죠.

 

 

소피아의 부모

스웨덴의 구스타프 4세 아돌프와 바덴의 프레데리케

 

소피아가 14살이었던 1815년 소피아는 바덴의 레오폴트 공과 약혼을 합니다. 이 혼담은 전형적인 정략결혼이었는데 혼담을 진행시킨사람은 소피아의 외삼촌이었던 바덴의 카를 대공이었습니다. 당시 카를대공에게는 남자 후계자가 없었을뿐만 아니라 바덴 대공가의 적통 후계자가 없었습니다. 카를 대공의 숙부였던 루드비히가 있었으나 그 역시 귀천상혼한 상태였기 때문이죠. 이는 심각한 문제였는데 바덴 대공가의 남성 후계자가 끊어질 경우 바덴 대공의 지위와 대공령은 비텔스바흐가문으로 상속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이에른 국왕이 바덴 대공의 지위와 대공령을 상속받게 되는것이었죠.

이렇게 되자 바덴 대공가에서는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비상수단을 쓰게 됩니다. 비록 적통 남성후계자는 없었지만, 카를 대공의 할아버지가 첫번째 부인이 죽은후 귀천상혼해서 태어난 아들들이 있었기에 이 아들들을 바덴 대공가의 후계자로 인정하기로 한것이었죠. 이에 대해 바이에른쪽에서 충분히 반론을 제기할수도 있는 문제였습니다. 결국 카를대공은 후계자로 인정된 레오폴트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해 조카인 소피아를 레오폴트와 결혼시키려 한것이어죠.

 

 

바덴의 레오폴트

바덴의 대공

 

그리고 열여덟살이었던 1819년 소피아는 레오폴트와 정식으로 결혼합니다. 이때는 소피아의 외삼촌이었던 카를 대공은 이미 사망한 뒤였으며 그의 뒤를 이어서는 레오폴트의 형이자 바덴 대공가의 마지막 적통후손이었던 루드비히 1세가 대공가를 이었습니다. 루드비히 역시 조카의 뜻과 동일했으며 레오폴트의 안정적 지위를 위해 소피아와 레오폴트가 결혼하도록 합니다. 이것은 두가지 뜻이 있었는데 먼저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레오폴트가 바덴대공의 조카이자 스웨덴 국왕의 딸이었던 소피아와 결혼하므로써 혈통상의 제기 될수 있는 문제를 어느정도 보완하는것이었으며 두번째는 레오폴트는 바덴의 카를 프리드리히 대공의 두번째 부인의 후손이었고 소피아는 카를 프리드리히 대공의첫번째 부인의 후손이었기에 둘의 결혼은 가문의 결합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소피아와 레오폴트는 결혼후 궁정에서 떨어져 지냈습니다. 그들은 추정왕위계승자와 그 부인이긴 했지만, 레오폴트는 군인으로 왕족이라기 보다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으며 소피아 역시 남편과 함께 조용히 살아랍니다. 그리고 1830년 루드비히 1세가 죽은뒤 레오폴트는 바덴의 대공이 되었고 소피아는 대공비가 되죠.

 

 

아이들과 함께 있는 소피아

 

독일에서 조피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그녀는 매우 영리했으며 의무에 충실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매우 엄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밤늦게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났으며, 늘 친척들과 서신 왕래를 주고 받았습니다. 또 예술과 정치에도 매우 깊은 관심을 보였고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깊이 관여하길 원했습니다. 조피는 아들은 비엔나의 궁정으로 보내서 교육시켰는데 프란츠2세의 황후인 아우구스테 황후와 후계자의 어머니가 될 조피 대공비 모두 소피아의 사촌이기도 했습니다.이런 조피의 성격때문에 카스파 하우저 문제가 발생하고, 그가 죽었을때 암살을 사주한 사람으로 조피가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조피는 의무에 충실했기에 아들인 프리드리히가 귀천상혼하려는것에 반대하고 왕가의 후손과 결혼하라고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후에 프로이센의 루이제와 결혼합니다.)

 

 

조피 대공비

역시나 빈터할터 그림

 

스웨덴 왕가에서는 이전 왕가와의 화해를 원했고 많은 시도를 합니다. 하지만 오스카르 1세와 요세피나 왕비의 시도가 조피 대공비와 만나려한 시도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후에 오스카르 2세와 그의 부인인 나사우의 소피아 왕비가 아들과 함께 조피 대공비를 방문합니다. 조피 대공비는 이들을 친절하게 맞아주었고, 그들이 떠날때 둘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구스타프에게 "G"라는 문자와 "스웨덴의 왕태자"라는 글자가 새겨진 메달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이는 아마도 그녀의 오빠인 구스타프 왕태자를 기념하기 위한것이었을겁니다. 선물받은 스웨덴의 왕태자 역시 구스타프였기에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선물이었죠. (훗날 이 구스타프는 조피 대공비의 손녀인 바덴의 빅토리아와 결혼합니다.)

 

조피는 레오폴트와의 사이에 여덟명의 아이를 낳습니다.

큰딸인 알렉산드리네는 빅토리아 여왕의 사촌이자 시아주버니였던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에른스트 2세와 결혼했습니다. 큰아들인 루드비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공이 되었지만, 병때문에 통치할수 없었고 동생인 프리드리히에게 대공위를 물려줍니다. 둘째아들인 프리드리히는 형의 뒤를 이어 바덴의 대공이 되었습니다. 그의 딸인 빅토리아는 스웨덴의 왕비가 되죠. 셋째아들인 빌헬름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의 외손녀인 로이히텐베르크의 마리야와 결혼했고, 둘의 아들인 바덴의 막스는 후에 독일의 총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둘째딸인 마리는 빅토리아 여왕의 조카인 라이닝겐의 에른스트와 결혼합니다. (마리는 빅토리아 여왕이 좋아한 조카며느리라고 알려져있습니다.) 막내인 체칠리에는 니콜라이 1세의 아들인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결혼했습니다. 체칠리에의 외손녀들인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알렉산드리네는 덴마크의 왕비가 되었으며 알렉산드리네의 동생인 체칠리에는 독일의 마지막 황태자비가 되었습니다.

 

 

조피의 손녀인 빅토리아와 손자인 막스 그리고 손녀사위인 스웨덴의 구스타프 5세

빅토리아와 구스타프 5세의결혼으로 이후 스웨덴 국왕들은 이전 국왕들과의 혈연적 연결고리가 확고해집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