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요즘에는 구글 번역기가 좋아져서 그런지 위키 스웨덴어 파트와 영어 파트가 거의 같더라구요
예전에는 달랐는데다가, 영어 파트에는 왕비 내용이 많이 없어서 사이트 여기저기를 뒤져야했는데 말입니다. 덕분에 스웨덴어 찍기가 늘었고 말입니다...아하하..
..ㅠ.ㅠ 제가 잠시 서울에 와 있어서 글을 못읽었습니다..ㅠ.ㅠ
상속녀들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글이거든요. 자료도 많이 읽어야하고, 사진도 없어서 검색도 좀 오래해야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국 또 땜빵용 글이 필요하다죠.
그래서 땜빵용 글로 스웨덴의 왕비들 이야기 적은 글을 올려볼까 합니다.
제가 활동하는 카페에 베르나도테와 홀슈타인-고토로프 가문의 왕비들까지는 적었거든요. 이후 계속 할 예정입니다만, 언제가 될지는...아하하..--;;
하여튼 땜빵용으로 이 스웨덴 왕비 시리즈중 베르나도테 왕가 왕비 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보니까 블로그에 루이즈 왕비, 빅토리아 왕비, 소피아 왕비를 했더라구요.--;;; 남은 왕비들이래봤자, 로비사왕비, 요세피나 왕비, 데시데리아 왕비 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땜빵용으로 베르나도테 왕가 왕비들 이야기를 다 해볼까합니다.
스웨덴의 로비사 왕비
스웨덴의 로비사 왕비가 되는 빌헬미나 프리데리카 알렉산드리네 안나 루이제는 1828년 8월 5일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태어났습니다. 공주의 아버지는 네덜란드의 프레드리크 왕자였고 어머니는 프로이센의 루이제 공주였죠. 그녀의 조부모는 네덜란드의 빌렘 1세와 그의 부인인 프로이센의 빌헬미나 였으며 외조부모는 유명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그의 부인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였습니다
(가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저의 앞쪽 포스트인 그림으로 보는 가계도...과연 이 유전자는 어디서 온것인가 를 참조해주세요)
로비사 공주의 부모
네덜란드의 프레드리크왕자와 프로이센의 루이제 공주
루이제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 네덜란드 공주는 엄격한 교육을 받고 성장했습니다. 루이제 공주는 매력적인 여성은 아니었지만, 그 시대 이상적 여성의 모습인 상냥하고 순종적으로 성장했죠. 하지만 늘 시댁에 비판적이었던 네덜란드의 소피 왕비 (빌렘3세의 첫번째 부인)은 루이제가 소녀취향이며 패션감각이 떨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루이제는 역사와 언어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스웨덴의 왕태자인 칼과 약혼한후 스웨덴어와 문화를 공부해서 스웨덴에 도착했을때 공식환영식에서 감사의 말을 스웨덴어로 할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스웨덴의 칼 15세
사실 루이제의 남편이 되는 스웨덴의 칼 왕태자는 다른 공주와 혼담이 오갔었습니다. 바로 프로이센의 루이제 공주였죠. 루이제 공주는 독일의 빌헬름 1세의 딸로 당시에는 아버지가 황제가 아니었지만, 이미 그녀의 아버지는 추정왕위계승자였고, 그녀는 국왕의 딸이나 다름 없었죠. 이 혼담이 가능했던것은 칼의 어머니인 요세피나 왕비 덕분이었습니다. 요세피나 왕비는 이모인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왕비와 친했는데, 엘리자베트 왕비는 루이제 공주의 백모였으며 이때문에 혼담이 성사된 것입니다. (요세피나 왕비의 외가에 대한 자세한 계보도는 저의 앞쪽 포스트인 "그림과 사진으로 보는 가계도...결혼으로 잘나간 가문 :바이에른 가문"을 참조해주세요)
하지만 칼 왕태자는 대형사고를 치는데 약혼을 위해 프로이센으로 가서 루이제 공주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해버린것입니다. 이것은 큰 스캔들이었고, 친척들은 칼을 매우 비난합니다. 칼의 동생인 구스타프 왕자는 만약 형이 결혼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루이제와 결혼하겠다고 할 정도였죠.
그 후 혼담이 오간 사람이 바로 네덜란드의 루이제였습니다. 그녀는 왕의 조카이긴 했지만 부유하기로 이름난 네덜란드 공주였기에 지참금때문에 혼담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참금이 별로 없다는 것이 곧 알려지게 됐는데, 그래도 스웨덴 왕가에서는 어쩔수 없이 루이제와 약혼을 강행합니다. 왜냐면 이번에도 혼담을 깬다면 이제 "벼락부자"가문인 베르나도테 왕가에 공주를 시집보낼려는 왕가가 없을것이라고 여겼죠.
이것은 칼 왕태자 뿐만 아니라 다른 동생들의 결혼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문에 칼의 동생인 오스카르 왕자는 약혼 전에 신부후보를 만나서 결혼할지 안 할지 결정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스웨덴으로 온 루이제는 이후 스웨덴 식으로 "로비사"라고 불리게 됩니다. 매우 잘 생겼던 칼 왕태자에게 로비사는 호감을 느꼈지만, 칼 왕태자는 매력적이지 않던 로비사에게 실망했고 보잘것 없었던 지참금도 늘 문제였습니다. 이때문에 둘은 결혼은 매우 불행했으며 칼 왕태자는 수많은 정부들이 있었쬬.
스웨덴 궁정 예복을 입을 로비사 왕비
로비사는 남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늘 옷을 잘 입었으며, 남편의 뒤를 묵묵히 따르던 당시 이상적 여성처럼 행동하려 했습니다. 비록 매우 똑똑했으며, 글을 쓰고 신문과 책을 많이 읽었지만, 절대 나서지 않았으며 정치에도 절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공적 의무를 싫어하고 수줍음 많았던 로비사는 대중앞에 나오긴 꺼려했고 이때문에 스웨덴 사람들은 그녀가 차갑고 거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때문에 로비사는 스웨덴에서 매우 인기가 없었죠.
1859년 시아버지인 오스카르1세가 사망하고 남편 칼이 칼 15세로 즉위하자 로비사도 스웨덴의 왕비가 됩니다. 로비사는 왕비로써 공적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려고 노력했고 나라의 여기저기를 방문했습니다. 왕비는 여행할때마다 귀족들의 집에 머물렀던데 귀족들은 이런 왕비의 방문을 귀찮아했고 덕분에 로비사 왕비의 평판은 더욱더 나쁘게 됩니다.
로비사 왕비와 칼 15세 사이에는 두명의 아이가 태어납니다. 첫째는 세사라는 애칭으 로비사 공주였고, 둘째는 아들인 구스타프 왕자였죠. 하지만 구스타프 왕자는 유아시절에 사망했으며, 둘의 아이는 로비사 공주밖에 없었습니다. 왕실에서는 로비사가 아이를 못 낳을거라는것을 이미 알았다고 합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칼 15세는 아내와 똑같이 생긴 딸 로비사는 끔찍히 아꼈습니다. 딸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는 했죠. 칼 15세는 딸 세사에 대해서 "그애는 무척이나 못된 악동이지만 너무나 유쾌하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로비사 왕비는 남편이 딸의 버릇을 망친다고 걱정했죠.
칼 15세가 딸을 얼마나 사랑했느냐 하면, 딸이 원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부인과 가족생활을 자주 영위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딸을 위해서 부인과 행복한척 한것이었죠.
스웨덴의 로비사 공주
덴마크의 루이세 왕비
덴마크쪽에서 로비사와 혼담을 진행한것은 두가지 이유가 컸는데 첫번째는 당시 범스칸디나비아 주의가 활발했기에 스웨덴 공주가 왕비가 되는것에 덴마크 국민들이 매우 호의적이었고, 두번째는 로비사가 외동딸이었기때문에 물려받을 상속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로비사 공주에 대한 내용은 저의 앞쪽 포스트인 "조카를 위한 역사이야기...2.스웨덴의 로비사 공주(덴마크의 루이세 왕비)"를 참조해주세요)
1869년 로비사의 딸인 로비사 공주가 덴마크의 왕위계승자였던 프레데릭 왕태자와 결혼해서 덴마크로 갑니다. 딸이 결혼한후 로비사 왕비는 매우 우울한 나날을 보냈고, 1871년 심한 독감이 폐렴으로 발전헤서 42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로비사 왕비는 예쁘지 않고 소탈하고 능력있으며 일을 많이 하던 여성이었습니다. 수많은 자선단체를 만들고 꾸려나갔죠. 그중 한곳인 "로비사 어린이 병원"은 아직도 스웨덴에 남아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진정한 모습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자료출처
1.스웨덴 역사 사이트 http://www.historiesajten.se/
2. 위키 피디어 (영어, 스웨덴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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