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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를 낳은 공주님들...(4)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율리아네

엘아라 2011. 5. 4. 06:3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이번에 소개 할사람은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율리아네입니다. 이 사람은 의외로 대가문과 연결되는 사람인데 여동생이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죠. 감이 오시나요.

바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이모이자 앨버트 공의 고모입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것은 그녀는 러시아 대공비였습니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2세의 둘째 손자와 결혼했었다죠. 하지만 이 결혼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사생아를 낳은 공주님들...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율리아네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율리아네는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작인 프란츠 프리드리히 안톤과 그의 두번째 부인인 로이스-에베로스도르프의 그라핀인 아우구스타의 셋째딸로 태어났습니다. 로이스 가문은 독일에서 매우 오래된 가문이긴 했지만 아주 오랫동안 장자상속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문의 영지는 아주 잘게 쪼개졌고 이때문에 영향력도 그리 크지 않은 가문이었습니다.

 

 

율리아네의 부모

프란츠 프리드리히 공작과 아우구스타 공작부인

빅토리아 여왕의 외조부모이자 앨버트 공의 조부모

 

 

열다섯살도 안된 율리아네는 언니들인 조피와 안토니에테와 함께 러시아로 초대받습니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2세는 둘째 손자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의 신부를 선택하기 위해 이 독일 공주들을 부른것이었죠. 콘스탄틴 대공은 자매들중 나이가 제일 어렸던 율리아네를 신부감으로 원했고, 율리아네는 그대로 러시아에 남게 됩니다.

이 결혼은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가문에 큰 영향을 주는 결혼이었는데, 러시아와 같은 큰 가문으로 시집가게 되었기에, 다른 형제 자매들의 결혼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동생인 레오폴트가 영국 섭정이었던 웨일즈공(후에 조지4세)의 딸이자 유일한 계승자였던 샬럿과 결혼하게 된 이유중 하나가 바로 율리아네가 러시아 대공비였기 때문이죠.  레오폴트가 영국 왕위계승자와 결혼하면서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가문은 유럽에가 중요한 가문으로 부상하게 되는것입니다.

 

 

엘리자베트 비제-르블룅이 그린 안나 표도로브나 대공비

결혼 직후때쯤 이라고 합니다.

 

 

율리아네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고, 안나 표도로브나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1796년 2월에 열일곱살이었던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과 결혼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안나 표도로브나 대공비로 불리죠. (빅토리아 여왕의 이부 언니인 페오도라의 이름은 이 이모에게서 따온것입니다.)

 

1790년대의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

..초상화 볼때마다 느끼지만 파벨1세랑 어찌나 닮았는지..

 

러시아에서 율리아네의 삶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습니다. 어린 부부는 서로가 잘 맞지 않았으며, 콘스탄틴 대공은 매우 거칠고 심지어는 폭력적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보다 두살 어린 아내에게는 매우 공포스러운 일이었죠. 결국 3년간 러시아에서 지낸후인 1799년 율리아네는 친정인 코부르크로 돌아가버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러시아의 제2황위계승자의 부인으로 해서는 안될 일이었죠. 게다가 정치적인 문제도 있었구요. 그리고 다시 율리아네는 러시아로 갑니다. 아마도 주변에서 타일렀을듯합니다.

하지만 러시아로 돌아간 율리아네는 다시 러시아에서 힘들어했으며, 여러 복잡한 사건들을 거친후 결국 1801년 아예 친정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안나 표도로브나 대공비

러시아 궁정에서의 모습일듯합니다. 하고 있는 훈장이 성 예카테리나 훈장이거든요. 

 

1808년 율리아네는 에두아르트 에드가르 슈미트-뢰베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별거한 남편의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프랑스 망명객으로 하급 귀족이었다고 합니다. 아이는 율리아네의 남동생이었던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되는 에른스트1세(앨버트공의 아버지)가 맡아서 키웠으며 1818년 아이에게 뢰벤펠스라는 성을 부여했다고 합니다.

율리아네는 아이를 낳은후 잠시 고향을 떠나 스위스의 베른에서 머물렀습니다. 이때인 1812년 율리아네는 다시 딸을 낳았습다. 루이즈 힐다 아그네스 도베르트라는 이름의 아이였죠. 아이의 아버지는 스위스 출신의 외과의사이자 율리아네의 시종무관이었습니다. 스캔들을 우려해서 아이는 프랑스 망명귀족에게 입양되었습니다.아이의 아버지는 1812년부터 1837년까지 율리아네의 시종무관으로 있었기에 아마도 그와 율리아네는 동거한 사이였던듯합니다.

 

1814년 율리아네의 남편인 콘스탄틴 대공은 아내와 다시 합칠 생각을 합니다. 콘스탄틴 대공은 형인 알렉산드르1세의 후계자였기에, 누나가 황후가 될수도 있는 문제에 외교적으로 민감했던 동생 레오폴트가 매형을 지지했죠. 하지만 율리아네는 남편과 함께 사는것을 완강히 거부했다고 합니다. (콘스탄틴 대공이 부인과 합치려한 이유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던데 일단 제위때문에 그랬다는 이야기는 아닌듯해요. 콘스탄틴 대공은 형이 제위를 물려주겠다고 했는데 거절했거든요. 그리고 그는 귀천상혼으로 제위를 물려받을 자격이 없었는데 만약 제위를 물려받을려면 굳이 아내와 이혼하고 귀천상혼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콘스탄틴 대공

 

결국 1820년 둘의 이혼이 성립됩니다. 콘스탄틴 대공은 폴란드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하길 원했기때문에 안나와 이혼했죠. 남편과 헤어진후 율리아네는 이전부터 그랬던것처럼 예술과 음악을 후원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나이든 후의 율리아네

....보고 켄트공작부인 빅토리아랑 어찌나 닮았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