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의욕상실이라 글쓰기 진짜 싫습니다. 글 읽기도 싫구요
그냥 멍하니 있었음 좋겠다는...=-=
어쨌든 오늘도 펑크를 낼수는 없기에 이렇게 글을 하나 올립니다.
오스만 술탄 하렘에 대한 서양의 인식
17 세기 동안 오스만인들은 프랑스왕녀에 대한 전설을 윤색했던 반면,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 쓴 영국과 프랑스 저자들은 하렘에 대한 환상을 증가시켰고, 동양 전제주의의 상징으로써의 하렘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서양에서 하렘 특히 오스만 술탄의 후궁이나 왕궁에 있었던 하렘에 대한 이미지는 17세기이후 정치적으로 고정화된 이미지였으며, 서양의 정치가들은 이런 하렘의 이미지를 극단적 전제주의의 상징으로 이용했다.
하렘에 대한 첫 언급은 무라드3세의 세번째 시의였던 도메니코 히에로솔리미타노의 글에서 볼수 있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오스만제국을 떠난후, 이탈리아에서 개종했고, 17세기초 오스만 하렘에 대한 글을 썼다. 이후 저자들은 이 책을 주로 참고자료로 해서 더욱더 선정적으로 하렘에 대해서 윤색한다. 의사였던 도메니코는 왕궁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하렘에 출입할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하렘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는 역시 단지 들은 이야기나 종종 상상의 이야기를 적을뿐이었다. 그리고 선정적으로 윤색된 그의 이야기는 서양 남성 저자들의 상상력에 불을 당겼다.
실제로 수많은 서양의 남성 저자들은 하렘에 접근조차 할수 없었다. 그들 뿐 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남성들 역시 대부분 술탄의 하렘에 접근할수 없었다. 이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들은 이야기였으며, 때로는 자신의 상상이 더해지기도 했다. 17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을 여행했던 영국 대사의 비서는 현재에도 언급되는 잘 알려진 술탄의 잠자리 선택법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했다. 그는 술탄이 여성을 선택할때 손수건을 던져서 결정했으며, 선택된 여성은 술탄의 침대의 발끌에서 기어들어간다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언급한다. 이 이야기는 곧 널리 퍼지게 되고 수많은 많은 저자들이 인용했고, 심지어는 지금도 인용되고 있다.
18세기초 영국 대사의 부인이었던 레이디 워틀리 몬태규는 남편과 함께 오스만제국에 왔다. 그녀는 터키어를 배웠으며, 남성들이 접근하지 못했던 하렘의 여성들과 친분을 쌓았다. 레이디 메리는 하렘의 여성들과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으며, 남성저자들이 이야기하는 하렘의 생활과 실제로 여성들이 말하는 하렘에서의 생활이 무척이나 다른것에 놀라워했다. 하지만 레이디 메리의 편지는 한동안 사료로 인정이 되지 않았는데 왜냐면 남성저자들이 묘사한 생활과 레이디 메리가 언급한 생활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래아다 메리는 시누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한 남성저자의 글에 대해 "그는 무지를 당당하고 뻔뻔스럽게 기술하고 있다."라고 언급할정도였다. 레이디 메리는 시누이에게 술탄의 총비와 만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고인이된 황제 무스타파의 총비였던 술타나 하피스를 만나기 위해 갔다. ...나는 seraglio후궁에 대해서 모든것을 배울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술탄의 후궁은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였다. 술타나는 나에게 술탄의 손수건 던지기 이야기는 터무니없는것이라고 말했다. 술탄이 여성을 정하는방식은 그런 방식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
하지만 이런 이미지들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현재에도 인기있는 로맨스 소설이나 역사 소설에도 이런 장면들이 그대로 들어가며, 심지어는 하렘의 여성들을 언급하는 다큐멘터리에도 그대로 묘사될 정도이다. (히스토리채널에서 한 발리데 술탄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에 보면 그대로 나옵니다.--;;;)
레이디 메리 워틀리 몬태규
영국 귀족으로 태어난 그녀는 아름다움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천연두에 걸린후 아름다움을 잃습니다.
오스만 대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터키에 갔으며, 이때 종두를 하는것을 보고 종두법 보급에 열을 올립니다. 영국에서 처음으로 종두를 한 사람입니다만, 당시에는 그다지였다고 합니다.^^*
이런 하렘에 대한 이미지는 18세기 계몽주의시대로 접어들면서 더욱더 이슬람에 대한 관념적 무기로 작용한다. 하렘은 점점 동양적 전제주의의 상징이 되어갔으며, 이런 상징의 극대화를 위해 세부적인 정보의 정확성은 하찮게 여겨졌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는 유럽세력이 오스만제국과 마찰을 일키면서 더욱더 확대되어갔는데, 특히 아라비안 나이트의 번역은 하렘에 대한 선정적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초기 아라비안 나이트에 대한 번역은 선정성에 맞추어져있으며,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나오는 묘사들은 일반적인것이 아니었음에도 마치 아랍의 풍속과 관습 인물에 대해서 아주 정확히 묘사하고 있는것처럼 받아들여졌다. (아라비안 나이트가 번역되기시작한지 한세기가 지난후에야, 이야기의 상황이 아랍사회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다는 언급이 든 주석이 쓰인 번역본이 등장한다.)
점점 서양에서 하렘을 억압받는 여성 나아가서는 억압받는 이들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된다.서구에서는 이런 이미지를 오스만제국의 다른 외교관계에도 적용했으며 서양이 오스만제국에 더 나아가서는 이슬람에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해야한다는 관념을 심어주게 된다.
19세기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받은 하렘에 대한 그림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자료출처
Royal French Women in the Ottoman Sultan's Harem : The Political Uses of Fabricated Accounts from the Sixteenth to the Twenty-first Century ( Journal of World History, Christine Isom-Verhaaren,2006)
'쓰고있는글들 >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마리테레즈는 아닙니다: 2011.11.20일 서프라이즈 중에서 (0) | 2011.11.21 |
---|---|
오늘의 뉴스 AS: 마리 조제는 어느나라 공주였나? (0) | 2011.09.01 |
사생아를 낳은 공주님들...(4)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율리아네 (0) | 2011.05.04 |
사생아를 낳은 공주님들...(3) 헤센-에슈베게의 율리아나 (0) | 2011.04.27 |
사생아를 낳은 공주님들...(2)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빅토리아 마리 (0) | 2011.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