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있는글들/역사이야기

사생아를 낳은 공주님들...(3) 헤센-에슈베게의 율리아나

엘아라 2011. 4. 27. 06:3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이게 시리즈가 여섯편까지 밖에 안 써놔서 말입니다...--;;;

아아 읽은 글은 없고 써놓은 글은 점점 바닥나고...하루에 하나씩 글을 올리는것은 힘들어요.(..요즘은 두개씩 올리는군요..ㅠ.ㅠ 영국 왕실 결혼이야기 찾느라고 다른거 읽을 시간이 없다는..ㅠ.ㅠ)

 

어쨌든 써 놓은 글이 있는 것은 계속 올려보렵니다..아하하..

그런데 이분은 초상화가 없습니다..ㅠ.ㅠ

 

 

사생아를 낳은 공주님들 ...(3) 헤센-에슈베게의 율리아나

 

헤센-에슈베게의 율리아나는 대놓고 사생아를 낳은 케이스였습니다.게다가 용서도 많은 운 좋은 경우였습니다.

헤센-에슈베게라는 이상한 지명이 나오니 힘든데 이 가문은 헤센 가문의 분가중 하나로 헤센-카셀가문의 분가입니다. 율리아나의 아버지인 헤센-에슈베게의 란트그라프인 프리드리히는 원래 헤센-카셀의 란트그라프인 모리츠와 그의 부인인 나사우-딜렌부르크의 율리아나의 아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헤센-카셀가문 사람이었는데 장자상속제를 안해서 형인 빌헬름이 헤센-카셀의 란트그라프 지위를 물려받았고, 동생인 프리드리히는 에슈베게 근처의 영지를 물려받아서 헤센-에슈베게의 란트그라프로 불리게 된것입니다. (독일은 오래도록 장자상속제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경우 형제들이 영지를 분할상속하게 되고, 이 분할된 영지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저렇게 바뀌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분가인거죠.)

율리아나의 어머니는 팔츠-츠바이브뤽켄-클리부르크의 엘레노오라 였습니다. 이름이 길죠. 저 가문은 비텔스바흐 가문입니다.(비텔스바흐 가문은 팔츠와 바이에른을 영지로 가지고 있었고 팔츠와 바이에른은 아주 일찍 분리되었습니다. 특히 팔츠 가문은 장자상속제를 안해서 이 가문도 방계가문이 엄청 많습니다.--;;; 카타리나의 가문 역시 팔츠 가문의 수많은 분가중 하나였습니다) 엘레노오라의 어머니는 스웨덴의 공주이자  스웨덴의 구스타프2세 아돌프가 제일 신뢰한 누나였던 카타리나였습니다.

 

 

율리아나의 외할머니가 스웨덴 공주였고 이때문에 후에 외삼촌인 칼 구스타프는 사촌인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뒤를 이어 스웨덴의 칼 10세 구스타프가 됩니다. 그래서 율리아나는 스웨덴의 칼 11세와 사촌관계였습니다.

 

칼 10세 구스타프는 일찍 사망했고, 이때문에 칼 11세는 어린나이에 즉위했고, 그의 어머니였던 홀슈타인-고토로프의 헤드비그 엘레오노라가 섭정의 지위에 있었습니다. 헤드비그 엘레오노라 왕비는 아들의 사촌인 이 헤센-에슈베게의 율리아나를 며느리감으로 선택했습니다. 이때문에 율리아나는 어린시절부터 스웨덴 궁정에서 성장합니다. 율리아나는 칼 11세보다 세살이나 더 많았지만, 매우 아름다운 여성이었으며 칼 11세가 성인이 된후 바로 결혼하기로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1666년의 칼 11세

 

하지만 율리아나가 20살이 될 무렵 큰 스캔들이 터집니다. 율리아나가 외숙모인 헤드비그 엘레오노라 왕비와 함께 마차를 타고 산책하던 도중, 산통으로 마차에서 주저 앉아버린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죠. 율리아나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는 약혼자였던 칼 11세가 아니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유부남이었던 궁정 조신인 구스타프 릴리백작이었습니다. 이사건으로 백작은 추방당했고, 율리아나는 스캔들이 잠잠해지길 기다리기 위해 시골로 보내집니다.

 

율리아나의 외숙모였던 헤드비그 엘레오노라 왕비는 율리아나의 스캔들이 잠잠해지면 다시 궁정으로 데려와서 며느리로 삼으려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녀가 율리아나를 며느리로 고집한 이유는 이미 덴마크와의 결혼협상이 진행되려했다는것을 알았기 때문일듯합니다. 칼 11세와 의회는 덴마크와의 평화조약을 위해 덴마크 공주와의 혼담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헤드비그 엘레오노라 왕비는 홀슈타인-고토로프 출신이었는데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가문은 덴마크 왕가의 방계가문이긴 했지만, 당시에는 덴마크에서 독립하고 싶어했기에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칼 10세 구스타프가 헤드비그 엘레오노라 왕비와 결혼한 이유도 덴마크를 견제하기 위해서였죠. 헤드비그 엘레오노라 왕비 입장에서 숙적인 덴마크 공주를 며느리로 맞는것은 매우 못마땅한 일이었을것입니다.

 

 

칼 11세의 모후

홀슈타인-고토로프의 헤드비그 엘레오노라

 

하지만 헤드비그 엘레오노라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년후쯤에 율리아나는 또다른 사생아를 낳았기 때문이죠. 아이 아버지는율리아나의 집에서 일하는 여성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미혼으로 네덜란드 대사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으며 율리아나보다 네살이나 어렸습니다.

 

율리아나가 둘째아이를 낳은후 칼 11세는 덴마크 공주인 울리케 엘레오노라와 약혼을 합니다. 이때문에 아마도 이때쯤 둘의 약혼이깨진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하지만 덴마크와 스웨덴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칼 11세와  울리케 엘레오노라와의 약혼은 거의 깨진것처럼 여겨지게 되면서 다시 문제가 살짝 복잡해집니다. 하지만 울리케 엘레오노라는 다른 혼담을 모두 거절하고 (여기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있었습니다.) 전쟁 포로가 된 스웨덴 군인들을 위해 개인재산을 팔아서 그들을 돕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울리케 엘레오노라의 약혼 반지도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전쟁이 끝난후 평화조약을 통해 칼 11세와 울리케 엘레오노라는 결혼하게 되죠.

 

 

덴마크의 울리케 엘레오노라

스웨덴의 울리카 엘레오노라 왕비

마마보이 남편과 자신을 싫어하는 시어머니 사이에서 조용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마마보이 남편은 시어머니 앞에서 그녀를 좋아하는 티를 안냈는데, 그녀가 죽고 난뒤에 아내가 죽은후 불행해졌다고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0-;;

 

 

칼 11세는 덴마크 공주와 결혼하기전인 1679년,사촌인 율리아나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는것을 허락해줍니다. 칼 11세는 율리아나가 사랑한 남자에게 릴리엔부르크(스웨덴어로는 릴리엔보리정도) 남작 칭호를 부여해주고 율리아나와의 결혼을 승인해주죠. 율리아나는 정식으로 결혼한후 네덜란드에서 살았습니다.

 

자료출처

1.위키피디어

2.스웨덴 왕실 홈페이지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