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이제 루이 16세의 자녀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자녀는 모두 네명이었습니다.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는 결혼후 7년간이나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고, 많은 이들이 루이 16세가 불임일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하여튼 결혼 팔년만에 첫아이인 마리 테레즈가 태어나죠.
자녀들 이야기를 한꺼번에 다 하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나누었습니다.--;;;
루이 16세와 가족들... (4) 딸 마리 테레즈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첫번째 아이는 딸인 마리 테레즈입니다.
마리 테레즈 드 프랑스
마담 르와얄
앙굴렘 공작부인
마담 라 도피느
Marie Thérèse de France
(Marie Thérèse Charlotte)
(19 December 1778 – 19 October 1851)
1827년
마리 테레즈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결혼 8년만에 얻은 첫번째 아이였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후계자를 낳아야하는 위치였지만, 결혼 7년동안 아이를 낳지 못해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시동생 부부에게 아들이 먼저 태어난것 역시 큰 스트레스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 7년만에 임신했으며 딸인 마리 테레즈를 낳습니다. 마리 테레즈를 낳을때 무척이나 난산이었는데다가 궁정 사람들이 산실에서 출산을 지켜보던 전통을 그대로 유지했기는데 이것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큰 충격이어서 아이 낳는것을 더 힘들어했습니다. 딸이 태어난후 루이 16세는 이후 왕비가 출산하는데 사람들이 참관하는것을 금지시키고 몇몇 가까운 친척들과 친구들만이 참석하도록 했습니다.
보모와 함께 있는 마리 테레즈
마리 테레즈는 태어난 다음날 세례를 받았는데 마리 테레즈라는 이름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그녀는 국왕의 장녀로 "마담 르와얄"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습니다.
루이 16세는 기다리던 후계자가 아니어서 실망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첫아이이자 딸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합니다. 하지만 마리 테레즈가 자라면서 루이 16세는 딸을 응석받이로 키웠으며 도리어 마리 앙투아네트가 엄한 어머니였다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엄한 어머니였으며, 딸이 시고모들처럼 거만한 성격으로 자라지 않길 바랬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이들을 초대해서 딸과 함께 식사를 대접했으며, 가난한 아이들에게 딸의 장난감을 선물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사치스러운 왕비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는 검소한 생활을 더 좋아했고 딸이 가난한 이를 돌아보길 바랬다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딸 마담 르와얄과 아들 도팽
이 그림 역시 베르사유 특별전에 온 그림입니다.
아이들 역시 간소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후에 저런 화려한 옷으로 덧그린것이라고합니다.
마리 테레즈는 혁명기간동안 불안정한 삶을 살았습니다. 혁명초기에 이미 왕실 가족들의 안전이 우려되었지만, 어린 마리 테레즈에게 혁명의 불안정함 보다는 동생들인 소피와 도팽 루이 조제프의 죽음이 더 큰 충격과 슬픔이었습니다.
동생인 루이 샤를 (후에 루이 17세)와 함께 있는 마리 테레즈
혁명이 본격화 되면서 마리 테레즈는 탕플에 가족과 함께 감금당했지만, 점점 가족들을 잃어갑니다. 마리 테레즈는 가족의 소식을 듣지 못했지만,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 고모는 길로틴형을 당했으며, 동생인 도팽은 혁명 세력의 방치하에 죽었습니다. 홀로 남겨진 마리 테레즈는 아버지의 죽음을 후에 들었으며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집니다.
1795년의 마리 테레즈
1795년 11월 마리 테레즈는 로베스피에르를 만났고, 12월에 오스트리아 측에 인질로써 다른 사람과 교환이 되었습니다. 1796년 1월 마리 테레즈는 외가인 오스트리아에 도착했습니다.
마리 테레즈는 처음에는 비엔나에 살았으나 곧 숙부인 프로방스 백작이 있는 쿠를란트로 갑니다. 프로방스 백작은 러시아의 파벨1세의 보호아래 그곳에 있었습니다. 이때 마리 테레즈의 숙부인 프로방스 백작은 스스로를 루이 18세로 칭하고 있었죠. 그는 자신의 후계자가 될 조카 앙굴렘 공작과 마리 테레즈가 결혼하길 원했고 마리 테레즈는 이를 승락합니다. 1799년 마리 테레즈는 앙굴렘 공작인 루이 앙투안과 결혼해서 앙굴렘 공작부인이 됩니다.
마리 테레즈의 남편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
러시아가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체결한후, 마리 테레즈는 다른 왕실 가족들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합니다. 그리고 왕정 복고때까지 그곳에서 살아가죠.
왕정 복고후 루이 18세는 자유주의자와 보수세력 사이에 끼인 존재가 됩니다. 게다가 루이 18세는 수많은 루이 17세의 사칭자들을 해결해야했습니다. 수많은 사칭자들이 마리 테레즈의 남동생이라고 주장하죠. 루이 18세는 이런 그들의 행동이 마리 테레즈를 더욱더 우울하게 만든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마리 테레즈는 감정이 메말라 버렸으며 혁명으로 자신의 부모를 죽였으며 나폴레옹을 지지했던 프랑스 국민들을 신뢰하기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동생이 죽었다는 장소를 방문했으며, 부모의 시신이 묻혔던 곳을 찾기도 했습니다.
마리 테레즈
마리 테레즈는 왕실에서 제일 높은 신분의 여성이었습니다.
왕위계승자인 앙굴렘 공작의 부인이었을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마담 르와얄"이었기 때문이죠.
나폴레옹의 100일 천하때 마리 테레즈는 보르도에 머물고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왕족들이 영국으로 황급히 몸을 피한동안 마리 테레즈는 보르도에서 왕당파 군대를 규합하려 했다고 합니다. 왕당파 군대는 마리 테레즈를 보호하는데 동의했지만, 나폴레옹의 군대와 싸워서 내전이 발생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나폴레옹이 마리 테레즈를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자 보르도는 혼란해집니다. 결국 마리 테레즈는 모두를 위해 보르도를 떠나는것에 동의합니다. 이 사건이후 나폴레옹은 마리 테레즈에 대해 "그녀는 자기 가문사람중 유일한 남자다"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포이약에서 승선하는 앙굴렘 공작부인
..이게 보르도에서 버티다가 떠나는 마리 테레즈를 묘사한 그림인듯합니다.
시아버지인 샤를 10세가 즉위한후, 마리 테레즈의 남편인 앙굴렘 공작이 도팽이 되었으며, 그녀는 마담 라 도피느가 됩니다. 하지만 7월 혁명이후 시아버지와 남편이 양위한후 다시 영국으로 망명해야했죠.
그녀는 이후 프랑스 왕실가족들과 함께 생활했으며, 남편이 죽은 뒤에는 빈 외각에 있는 성에 거주합니다. 곧 시동생의 아이들이었던 루이즈 다르투아와 보르도 공작 역시 마리 테레즈가 있는 곳으로 옵니다.
마리 테레즈
..대관식 복장인듯합니다.
1851년 마리 테레즈는 사망했고 남편곁에 묻혔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법적으로 약 20분간 국왕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왕비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스스로는 묘지석에 프랑스의 대비( Queen dowager)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남편의 뒤를 이어 조카인 보르도 공작이 프랑스의 국왕이라고 여겼기 때문일겁니다.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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