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프랑스

루이 16세와 가족들....(1) 형과 누이들

엘아라 2011. 1. 1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루이 16세까지 왔습니다.

...--;;;;프랑스 혁명이야기 읽다가 쓰러지는줄 알았는데 루이 16세이야기도 읽어야하는군요..ㅠ.ㅠ

그나마 루이 16세는 좀 나은것이 안토니아 프레이저가 쓴 마리 앙투아네트 전기를 좀 읽었거든요. 그래서 좀 낫다고 생각은 합니다만....--;;;그래도 영...ㅠ.ㅠ

아마 마리 앙투아네트는 유명하기 때문에 그냥 그림만 살짝 보고 넘어갈듯합니다.--;;;;

원래는 부모이야기부터 해야하지만, 부모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했기때문에 형제자매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계획은 형제자매를 다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루이 16세의 두 동생들은 몽땅 국왕이 되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많아서 국왕이 된 두 동생들은 빼고 나머지 형제들 이야기하고 두동생들 이야기를 따로 해야겠습니다.

 

루이 16세와 가족들...형 부르고뉴 공작 루이 와 누나 마리 제피리느와 여동생 마리 클로틸드와 엘리자베트

 

루이 16세는 누나 한명과 형 둘이 있었지만 모두 어린시절 사망했습니다. 대신 동생들은 모두 성인으로 성장하죠. 둘째였던 아퀴텐 공작 자비에는 생후 6개월에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초상화가 없습니다.

초상화 있는 사람만 합니다.

 

 루이 16세의 형은 부르고뉴 공작인 루이 였습니다. 10살이 되기전 사망합니다.

 

루이 조제프 자비에 드 프랑스

부르고뉴 공작 

Louis Joseph Xavier de France

 Duke of Burgundy

(13 September, 1751, Palace of Versailles - 22 March, 1761, Palace of Versailles)

...베르사유 특별전에 이 그림이 왔던가....ㅠ.ㅠ 갔다온지 좀 되니 그림이 다 기억이 안난다는..ㅠ.ㅠ

 

 루이 16세의 형이자 도팽 루이의 장남은 부르고뉴 공작이었습니다. 부르고뉴 공작이 태어나자 후계자가 태어난것에 대해 왕실 가족들 모두가 기뻐했다고 합니다. 부르고뉴 공작의 부모인 도팽과 도피느는 이 큰아들을 무척이나 사랑했고, 부르고뉴 공작은 누나인 마리 제피리느와 잘 지냈다고 합니다.

 

부르고뉴 공작은 9살때 목마를 타고 놀다가 떨어진 후 다리쪽에 종양이 생겼으며 이것은 고칠수가 없었고 결국 사망합니다. 

 

 

루이 16세의 누나는 마리 제피리느로 다섯살때 사망했습니다.

 

 

마리 제피리느 드 프랑스

Marie Zéphyrine de France

(26 August 1750 - 1 September 1755)

 

 마리 제피리느 드 프랑스는 루이 15세의 아들인 도팽 루이와 그의 부인인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의 첫번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마리 제피리느가 태어나기전 마리아 요제파는 두번이나 아이를 유산했기때문에 건강이 매우 좋지 않게 되었고, 아이가 태어날때 모두들 걱정이 많았습니다.

 

마리 제피리느는 성 제리피우스의 축일인 8월 26일에 태어났기 때문에 제피리느라는 이름이 붙여집니다.  마리 제리피느의 어머니인 마리아 요제파는 딸을 자신의 조카이자 작센의 선제후의 후계자와 결혼시키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마리 제리피느의 탄생

성인의 축일에 태어났기때문에 저렇게 우회적으로 탄생을 설명하고 있는듯합니다.

 

마리 제피리느는 다섯살때 경기를 일으켜서 사망했는데, 죽기 며칠전에 정식 이름을 받았습니다. (프랑스 왕실은 아이가 다섯살이 될때까지 이름을 붙이는 정식세례를 하지 않았습니다.) 

 

 

 

루이 16세의 첫째 여동생은 클로틸드로 사르데냐의 왕비가 됩니다.

 

 

마리 클로틸드 드 프랑스

마담 클로틸드

사르데냐의 왕비

Marie Clotilde of France

 (Marie Adélaïde Clotilde Xavière

 23 September 1759 – 7 March 1802)

 

 

마리 클로틸드는 도팽의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궁정에서는 마담 클로틸드라고 불렸죠.  그녀는 자라면서 점점 뚱뚱해졌는데 이때문에 궁정에서는 Gros-Madam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오빠 아르투아 백작과 함께 있는 마담 클로틸드

 

마리 클로틸드는 올케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리 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둘은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린시절부터 함께 자랐던 동생 마담 엘리자베트와는 매우 친했으며 결혼할때 동생과 헤어지는것을 힘들어할 정도였습니다.

 

마담 클로틸드

 

1775년 마담 클로틸드의 오빠인 루이 16세는 동생을 사르데냐 국왕의 후계자인 피에몬트공 카를로 엠마누엘레와 결혼시킵니다. 그녀는 오빠인 프로방스 백작과 함께 투린으로 가서 남편을 만났으며 그곳에서 결혼합니다. 이후 그녀는 피에몬트 공비라고 불렸죠.

 

 

 

마담 클로틸드와 사르데냐의 카를로 엠마누엘레의 결혼

 

 

마담 클로틸드와 카를로 엠마누엘레의 결혼은 정략결혼이었는데, 둘의 결혼전에 카를로 엠마누엘레의 누이들이 마담 클로틸드의 오빠들과 결혼했습니다.

 

마담 클로틸드는 결혼후 이탈리아어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녀는 뚱뚱했기 때문에 프랑스 궁정에서는 신랑이 이인분의 신부를 얻었다는 농담이 나돌정도였으며, 그녀의 시아버지였던 사르데냐 국왕은 아이를 못가질까봐 걱정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담 클로틸드의 남편인 카를로 엠마누엘레는 자신의 부인을 "더욱더 숭배하게 되었다"고합니다.

 

 

마담 클로틸드의 남편

사르데냐의 카를로 엠마누엘레 4세

 

마담 클로틸드와 카를로 엠마누엘레는 서로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습니다만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죠. 마담 클로틸드는 자신의 동서들과도 매우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마담 클로틸드는 결혼후 프랑스를 한번도 방문하지 못합니다. 프랑스 혁명후 오빠와 올케와 동생인 마담 엘리자베트가 길로틴형을 받았으며, 오빠들은 망명해야했죠. 막내오빠였던 아르투아 백작은 투린으로 도망쳐서 마담 클로틸드의 시아버지의 보호아래 있었습니다.

 

 

마담 클로틸드

 

1796년 시아버지가 죽고 남편이 사르데냐의 국왕이 되자 마담 클로틸드도 왕비가 됩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정부는 사르데냐에 선전포고를 했고 카를로 엠마누엘레는 퇴위를 강요당합니다. 그는 퇴위하지는 않았지만, 나라를 떠나 로마와 나폴리에서 거주합니다. 마담 클로틸드는 1802년 사망했으며 그녀가 죽자 남편인 카를로 엠마누엘레는 동생을 위해 양위했습니다.

 

 

 

마담 클로틸드

 

마담 클로틸드의 흉상

 

 

루이 16세의 막내 동생은 마담 엘리자베트로 미혼으로 살았는데 혁명중 길로틴형을 당했습니다.

 

엘리자베트 드 프랑스

마담 엘리자베트

Élisabeth of France

(Élisabeth Philippine Marie Hélène de France ;

 3 May 1764 – 10 May 1794),

 

마담 엘리자베트는 도팽 루이의 막내딸이었습니다. 태어난지 일년후인 1765년 아버지가 죽었으며 3년후인 1767년에는 어머니가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성장했으며 언니인 마담 클로틸드와 매우 친한사이였습니다. 마담 엘리자베트는 잘 교육받았는데, 그녀는 뛰어난 기수였으며, 미술에도 재능이 있어서 마담 엘리자베트의 그림이 현재에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어린시절의 마담 엘리자베트

 

매우 신앙심이 깊었으며, 오빠인 루이 16세를 무척이나 따랐는데 그녀는 외국 왕족과 결혼하기를 거부했기에 미혼으로 프랑스에 남았습니다. 1777년 루이 16세는 자신의 처남인 요제프2세와 마담 엘리자베트를 결혼시키려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마담 엘리자베트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마담 엘리자베트

엘리자베트 비제-르블룅의 작품

...이번에 베르사유 특별전에 온 그림입니다.

 

혁명이 일어날 무렵 루이 16세는 동생들을 국외로 내보내려했습니다. 아르투아 백작은 외국으로 갔지만, 마담 엘리자베트는 이를 거절하고 프랑스에 남습니다. 마담 엘리자베트는 오빠인 루이 16세와 올케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프랑스에 남은것이었죠. 이후에도 여러번의 탈출 기회가 있었지만, 그녀는 오빠 가족과 함께 머뭅니다. 이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시누이를 가장 신뢰하게 되었고, 죽기 직전 아이들을 부탁하는 편지를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보낼정도였습니다.

 

 

1787년의 마담 엘리자베트

 

루이 16세가 처형된 후, 루이 16세의 가족들중 아들인 루이 17세는 다른곳으로 보내졌고, 부인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딸 마리 테레즈 와 동생인 마담 엘리자베트는 탕플에서 함께 지냅니다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곧 콩시에르쥐리로 이송되고 탕플에는 마담 엘리자베트와 마리 테레즈만 남죠. 공포정치가 극에 달했던 시기 마리 앙투아네트 마저 처형당했는데, 마담 엘리자베트와 마리 테레즈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담 엘리자베트

 

이후 마담 엘리자베트는 국가를 배신했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섰으며 길로틴형을 받습니다. 조카인 마리 테레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조카였기에 인질로써 가치가 있었지만, 마담 엘리자베트는 국왕의 동생이었기에 인질로써 가치가 없었죠. 그녀는 길로틴형을 당했으며 시신은 공동묘지에 버려졌습니다. 오빠인 루이 18세가 복위한후 동생의 시신을 찾으려 했지만, 시신을 찾을수 없었다고 합니다. 후에 그녀의 시신은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파리의 카타콤으로 이장됩니다.

 

 

마담 엘리자베트

1788년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피디어 &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