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프랑스

루이 16세와 가족들 ... (3) 동생 샤를 10세와 가족들

엘아라 2011. 1. 13. 06:00

...ㅠ.ㅠ 정치 이야기는 싫어요...ㅠ.ㅠ

 

 저 분명히 안토니아 프레이저가 쓴 마리 앙투아네트를 읽었거든요..

그런데 왜 이리 생소한거랩니까..ㅠ.ㅠ

역시 저는 프랑스가 어려워요..ㅠ.ㅠ 프랑스 사 책도 좀 읽었구만 머리에 남는건 하나도 없고..ㅠ.ㅠ

 

 

 

 

루이 16세와 가족들.... 동생 샤를 10세의 가족들

 

 

 

 

 

샤를 10세

아르투아 백작

Charles X

(Charles Philippe; 9 October 1757 – 6 November 1836)

 

샤를 필리프는 루이 15세의 손자로 도팽 루이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밑으로는 두명의 여동생인 마담 클로틸드와 마담 엘리자베트만이 있었죠. 일곱살 무렵 아버지가 사망했고, 아홉살때는 어머니 마저 사망한후 형제들과 함께 성장합니다.

 

1773년 아르투아 백작은 형수의 동생인 사보이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합니다. 사르데냐 국왕의 딸이자 프로방스 백작부인의 동생이고, 마담 클로틸드의 시누이였죠. 사실 아르투아 백작은 원래 콩데공의 딸인 마드무아젤 드 콩데 루이즈 아델르이드 드 부르봉과 결혼하려했었다고 합니다.하지만 프랑스와 사르데냐간의 우호를 위해 정략결혼으로 샤르데냐 국왕의 딸과 결혼하게 됩니다.

 

 

아르투아 백작

 

사보이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결혼후 프랑스에서 마리 테레즈 드 사보이라고 불렸으며, 아르투아 백작이 되었습니다. 마리 테레즈는 언니와 달리 동서인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직접적인 험담을 하지는 않았지만, 언니와 마찬가지로 당시 궁정 사람들이 싫어하는 인물 중 하나가 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리 테레즈에 대해 조용하고 어떤것에도 관심없다 라고 이야기했었다고 합니다. 언니와 마찬가지로 못생겼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성품에 대해서는 점점 좋은 평가를 받게 됩니다.

 

 

사보이의 마리아 테레지아

이거 역시 베르사유 특별전에 온 그림일겁니다.

저기서 흉상은 남편이고 앞에 있는 초상화는 언니인 프로방스 백작부인 마리 조제핀입니다.

 

마리 테레즈와 아르투아 백작은 결혼 2년후에 첫아이를 낳습니다. 1775년 아들이자 앙굴렘 공작인 루이-앙투안이 태어났죠. 국왕과 왕비의 자녀는 아니었지만, 왕실에 드디어 후계자가 될 아들이 태어난것이죠.그리고 다음해에는 딸 소피가 태어났고 1778년에는 둘째아들인 샤를 페르디낭이 태어납니다. 하지만 이 해에 아이가 없었던 국왕 루이 16세 부부에게도 첫아이인 마리 테레즈가 태어납니다.

 

 

세아이와 함께 있는 아르투아 백작부인

 

아르투아 백작은 할아버지 루이 15세를 닮아 매우 잘생겼으며, 연애사건을 몰고 다녔다고 합니다. 베르사유의 아름다운 여성들 대부분과 연애 사건을 일으켰는데, 후에 아름다운 루이즈 드 뤼쌍과는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루이즈 드 뤼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한 친구였던 폴리냑 공작부인의 올케였습니다.

아르투아 백작은 형수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매우 친한 사이였습니다. 둘다 예술에 재능이 있었으며 이에 잘 맞는 사이였습니다.

 

혁명의 징조였던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이 있은후, 아르투아 백작과 가족들 그리고 궁정 조신들은 망명길에 오릅니다. 아르투아 백작과 그의 가족들은 망명후 이곳저곳을 떠돌았습니다.그의 부인인 마리 테레즈는 19805년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는 극단적인 왕당파로 프랑스의 군주제를 옹호했으며 절대왕정을 신봉했습니다. 이때문에 그는 위험한 인물로 여겨졌으며, 프랑스 혁명전쟁이 일어나자 유럽에 더이상 있지 못하고 영국으로 갔고 정부였던 루이즈 드 뤼쌍과 함께 삽니다.

 

 

루이즈 드 뤼쌍

 

혁명으로 프랑스에 남아있던 가족들 대부분이 죽었으며 조카이자 루이 16세의 딸이었던 마리 테레즈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외가인 오스트리아로 보내집니다. 이후 아르투아 백작의 형인 프로방스 백작이 루이 18세로 주장하면서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죠. 그는 조카이자 후계자가 될 아르투아 백작의 아들 앙굴렘 공작 루이-앙투안을 역시 조카인 마리 테레즈와 결혼시키길 원했고 결국 둘은 결혼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프랑스의 왕정이 복고된 직후, 루이 18세는 거동이 불편했기에 아르투아 백작이 먼저 프랑스로 갔습니다. 형이 올때까지 잠시 섭정의 지위에 있었던 아르투아 백작은 이 동안 절대 왕정을 추구하기 위한 비밀경찰을 창설했으며, 이 조직에서  형인 루이 18세가 아닌 자신이 최고 지위에 있으면서 보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루이 18세의 귀환

 

나폴레옹의 100일 천하후, 다시 루이 18세가 돌아온뒤 나폴레옹파 사람들을 색출해서 직위를 박탈하거나 살해했던 "백색테러"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주도한 사람들의 중심에는 극렬 왕당파였던 아르투아 백작이 있었죠.

그는 형 루이 18세의 자유주의 내각을 지지하지 않았고, 내각을 해산시키게 만듭니다. 루이 18세는 이에 동생을 용서하지 않았는데, 그는 동생과 그 지지자들의 절대 왕정추구가 또 한번 왕실을 망명하게 만들까봐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형이 죽은후 프랑스의 국왕 샤를 10세로 즉위한 그는 자유주의를 억압하며 프랑스를 혁명 이전상태의 왕정으로 돌릴려는 노력을 합니다.이에 프랑스 국민들은 발발했으며 결국 1830년 7월에 7월 혁명이 발생합니다. 7월 혁명후 샤를 10세는 손자인 보르도 공작에게 양위했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오를레앙 공작인 루이 필리프를 국왕으로 선출합니다. 결국 샤를 10세와 그 가족들은 영국으로 다시 망명해야했습니다.

 

 

 

대관식 복장의 샤를 10세

 

 

샤를 10세는 오스트리아의 프란츠1세의 후원으로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간후 다시 그라치아로 옮겼다가 그곳에서 사망합니다.

 

샤를 10세와 사보이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는 모두 세명이었는데 그중 두명이 성인으로 성장합니다.

 

 

아르투아 백작의 세 자녀들

 

샤를 10세의 첫째 자녀는 큰 아들인 앙굴렘 공작 루이-앙투안입니다.

 

 

 

 

루이 앙투안 드 프랑스

앙굴렘 공작

도팽 루이

루이 19세

Louis Antoine of France,

Duke of Angoulême

(6 August 1775 – 3 June 1844)

 

루이 앙투안이 태어났을때, 루이 16세와 그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태어난 후계자였습니다. 이때문에 루이 16세는 조카에게 앙굴렘 공작 칭호를 줬습니다. 그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직후 부모와 함께 외가인 사르데냐 왕국으로 피신합니다. 이후 그는 콩데공 휘하의 망명군대에 입대했으며, 방데 내전에 참전합니다. 그 후 그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휘하의 오스트리아 군에 참전했고,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자, 러시아의 파벨1세의 보호아래 지내게 됩니다. 그후 그는 잠시 바이에른 군대에 입대합니다.

 

 

어린시절의 앙굴렘 공작

 

1799년 앙굴렘 공작은 자신의 사촌이자 루이 16세의 딸인 마담 르와얄 마리 테레즈와 결혼합니다. 부르봉 왕가의 결속을 위해 앙굴렘 공작의 백부인 루이 18세는 조카들의 결혼을 원했는데 오스트리아측은 이 혼담을 탐탁치 않아했지만, 마리 테레즈가 이를 수락했다고 합니다.

 

 

 마리 테레즈 드 프랑스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장녀

마담 르와얄

앙굴렘 공작부인

1795년

 

파벨1세가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맺자, 프랑스 왕가는 프로이센령의 바르샤바로 이동해야했고,루이 앙투안은 백부의 참모이자 고문으로 바르샤바로 갔습니다. 이후 알렉산드르1세가 즉위한후 다시 러시아로 갑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1세가 나폴레옹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자 결국 부르봉가문은 영국으로 가야했죠.

 

 

앙굴렘 공작

 

왕정 복고후 그는 왕당파 군대의 수장이었지만, 나폴레옹의 100일 천하를 막지 못했고 다시 영국으로 도망쳐야했습니다. 이후 그는 워털루 전쟁에 참전했으며, 왕정 복고후 루이 18세의 대외 정책에 따라 스페인 내전에서 스페인 왕가를 돕기 위해 스페인을 침공해서 승리를 거둡니다.

 

백부인 루이 18세가 사망하고 아버지가 국왕이 되자 그는 도팽이 됩니다. 그 역시 아버지의 보수반동정책을 지지했습니다. 7월 혁명으로 아버지가 퇴위한 직후 약 20분간 프랑스 국왕의 지위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 역시 자신의 왕위계승권을 조카에게 양위했지만, 가족 모두는 영국으로 망명해야했죠.

 

앙굴렘 공작이자 도팽이었으며, 왕당파에 의해 루이 19세로 알려지게 되는 루이 앙투안은 오스트리아에서 사망했습니다.

 

 

 

샤를 10세의 둘째아이이자 딸인 소피는 7살에 사망했으며 셋째이자 둘째아들은 베리공작인 샤를 페르디낭입니다.

 

 

 

샤를 페르디낭 다르투아

베리 공작

Charles Ferdinand d'Artois, Duke of Berry

(Charles Ferdinand d'Artois, fils de France, duc de Berry)

(24 January 1778 – 14 February 1820)

 

샤를 페르디낭이 태어났을때 그는 왕위계승서열 네번째였습니다. 그의 백부였던 루이 16세와 프로방스 백작에게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해 12월 루이 16세의 첫째 아이이자 딸인 마리 테레즈가 태어나죠. 이후 루이 16세의 아들들이 태어나면서 그는 왕위계승권과 멀어집니다.

 

그의 가족은 바스티유 감옥 습격 직후 프랑스를 떠났으며, 혁명이 일어난후 그는 형과 함께 망명자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그후에는 러시아 군으로 복무한후 영국으로 건너갑니다. 13년을 영국에서 지낸 베리 공작은  한 영국 여성과 가깝게 지냈는데 죽기 직전에야 그녀와 아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애미 브라운

그녀는 베리 공작과 비밀결혼했었지만, 신교도였던데다가 신분마저 낮았기에 부인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베리 공작은 왕정복고후 그녀와 이혼한후 정략결혼합니다.

 

왕정 복고후 그는 프랑스 군 사령관이 되었지만, 나폴레옹의 100일 천하후에 은퇴합니다. 1816년 그는 나폴리와 시칠리의 공주인 카롤리나와 결혼합니다.  결혼후 매년 아이가 태어났지만, 두 아이는 영아때 사망했으며, 1819년 딸이자 후에 파르마 공작부인이 되는  루이즈 다르투아가 태어납니다.

 

 

나폴리와 시칠리의 카롤리나

베리 공작부인

 

1820년  베리 공작은 부인과 함께 오페라 하우스에서 나오다가 괴한이 휘두른 칼에 찔려서 중상을 입고 사망합니다. 이는 모두에게 충격이었는데, 베리 공작부인은 남편이 죽은지 칠개월후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후계자가 되는 보르도 공작 앙리를 낳죠. 후계자가 단절이 된줄 알았다가 태어난 이 유복자에 대해 "기적의 아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두 아이와 함께 있는 베리 공작부인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