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헤센

헤센 대공가의 비극...5.1937년의 비행기 추락사고

엘아라 2010. 12. 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앨리스 대공비이후의 헤센 대공가 이야기를 읽으면 가슴아픈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옵니다.

이때문에 앨리스 대공비의 자녀들은 이 끔찍한 비극에 희생이 되거나 늘 비극을 겪습니다.

특히 장수했던 큰딸 빅토리아와 셋째딸 이레네는 수많은 가문의 비극을 목격합니다.

그중 빅토리아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들이 남아있기때문에 그녀가 비극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나옵니다.

빅토리아는 무척이나 괜찮은척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고통은 말할수 없었죠.

빅토리아에게 가장 큰 슬픔은 아마도 러시아 동생들의 죽음이었을겁니다. 엘라는 빅토리아와 가장 친한 자매였고, 빅토리아는 막내였던 알릭스를 어머니처럼 돌 봐야했으니까요.

아마 이레네 역시 빅토리아와 비슷했을것같습니다. 1차대전이후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2차대전때도 매우 힘든삶을 살았죠.

하지만 에른스트 루드비히는 자신의 인생중 가장 큰 비극이 되었을수도 있는 사건을 겪지는 않습니다. 그럼 이 슬픈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헤센 대공가의 비극...5.1937년 비행기 추락사고

 

헤센 대공령은 1차대전후 공화국이 되었다. 헤센의 대공이었던 에른스트 루드비히는 전쟁을 싫어했고 제일 친했던 여동생인 알릭스가 러시아 황후였음에도  의무로 독일 군에 참가했다. 1차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나고 독일의 수많은 공국들이 공화국이 되었다. 헤센 대공령의 사람들 역시 헤센이 공화국이 되길 바랬으며, 통치군주였던 에른스트 루드비히를 몰아내기 위해 왕궁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대공을 몰아내자!공화국 만세!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헤센의 대공 에른스트 루드비히

그는 졸름스-호엔졸름스-리흐의 엘레오노래와 재혼했는데 그녀와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메리 왕비에게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해주는 여성과 만나서 행복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대공의 측근 신하들은 대공에게 서둘러 몸을 피하라고 조언했다. 에른스트 루드비히와 그의 아내인 엘레오노레 대공비는 자신들이 러시아 황실가족들처럼 사람들의 손에 죽을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몸을 피하라는 조언을 거부하고 왕궁에 남았다.

대공은 왕좌의 방에서 왕좌에 앉아있었고, 대공비는 그 곁에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때쯤 대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이곳에서 헤센의 군복을 볼수 없다는 것이 유감이오. 그대들이 원하는것이 무엇인지 말해보시오. 궁정에 유흥거리는 없지만, 내 아내가 차정도는 내줄수 있소." 대공의 말에 헤센 사람들은 행동을 멈추었으며, 조용히 돌아갔다. 비록 공화국이 되길 원했지만, 헤센과 다름슈타트 사람들은 늘 대공가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헤센대공령은 공화국이 되었으며, 에른스트 루드비히는 정치와 군에서 손을 뗐다. 그는 이 둘을 싫어했기에 정치에서 손을 뗀후 자신이 좋아한 예술과 과학기술의 후원자로 남았고, 다름슈타트 사람들의 사랑을 다시 얻었다. (다름슈타트 홈페이지에 가보면 예술과 과학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답니다.^^* )

 

엘레오노레 대공비

그녀에 대해서 메리 왕비는 "못생겼다"라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세련되게 옷을 입었으며 좋은 매너를 가지고 있었고 에른스트 루드비히를 잘 이해했다 라고 언급합니다.

 

1937년 10월 에른스트 루드비히는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으로 10월에 열리기로 되어있었던 대공의 둘째아들 루드비히의 결혼식이 11월로 연기되었다. 루드비히는 영국의 게디스 남작의 딸인 마거릿 게디스와 영국에서 결혼식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이때문에 헤센 대공가의 남은 가족들은 영국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대공의 장남이었던 게오르그 도나투스(돈)는 그리스의 케킬리아(세실)과 결혼했다. 세실의 어머니는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였으며 외할머니는 돈의 고모였던 헤센의 빅토리아(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 마운트배튼)이었다. 이때문에 세실은 외가가 있는 영국에 가는것을 좋아했으며, 이번에는 기쁜일로 외가 친척들을 만나는것에 들떠 있었다.

 

 

게오르그 도나투스와 세실

....게오르그 도나투스 사진은 세실과 결혼사진에서 자른사진인거 같은데....

왜 결혼사진은 안 올라와있냐구요...

..참고로 돈은 아부지 많이 닮았죠

 

 

결혼식 전날인1937년 11월 16일 아침 헤센 대공가 사람들은 루드비히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난다. 엘레오노레 대공비와 게오르그 도나투스와 세실 그리고 둘의 자녀인 루드비히와 알렉산더가 갔다. 막내였던 요한나는 너무 어렸기에 집에 남겨졌으며,이때 세실은 임신중이었다. 그리고 대공가 외에도 신랑의 베스트맨이었던 아이센바흐 남작 요아힘 라이데젤과 아이들의 보모였던 리나 헤나도 동행했다. 이들은 자베나사의 비행기를 타고 갔으며, 이 비행기의 조종은 자베나 사의 노련한 조종사중 한명이 맡았다. 조종사 외에도 세명의 승무원이 탑승했다.

독일에서 출발해서 북해근처까지 갈때는 비행이 매우 순조로웠다. 하지만 이 비행기는 벨기에 오스텐트 공항 근처에서 추락하고 만다. 비행기는 예정된 항로에서 벗어나 오스텐트 공항에 착륙을 시도한다. 공항에서는 이시도에 대해서 너무 늦게 응답했으며(그냥 통과하라는 신호였다) 결국 비행기는 근처 공장의 굴뚝에 날개가 충돌했고, 이후 엔진이 떨어져나가면서 추락했다. 11명의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

이 사고의 원인에 대해서 수많은 논란과 조사가 오갔다. 왜 노련한 기장이 무리한 착륙을 시도했는가 공항에서는 왜 대처가 늦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중 한가지 주장은 세실이 조산을 했다는 주장이다. 세실의 조산은 기장이 어쩔수 없이 급박하게 착륙을 시도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로 임신중이었던 세실의 아이는 비행기 잔해속에서 발견되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앨리스 대공비의 막내딸이자, 게오르그 도나투스의 고모가 되는 마리 대공녀가 죽은지 59주년 되는 날이었다.

 

게오르그 도나투스와 세실의 두 아들

루드비히와 알렉산더

 

영국에 있던 루드비히는 결혼식 전날 가족을 모두 잃었다. 그에게는 집에 남겨졌기에 살았던 조카인 요한나 밖에 남아있지 않았던것이다. 루드비히와 마거릿은 다음날 서둘러 결혼한후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벨기에로 갔다. 이날 마거릿은 신부의 흰색 웨딩드레스 대신 상복을 입고 결혼했다. 그리고 둘의 신혼 여행은 가족들의 관을 가지고 다름슈타트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다름슈타트는 큰 충격에 빠졌다. 대공의 장례식이 끝난지 한달밖에 안되었는데, 대공가족의 관 다섯개가 다시 거리를 지나게 된것이었다. 역시 대공가의 친척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는데 후에 필립공은 학교에서 누나의 소식을 들었던 때를 절대 잊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세실의 외할머니이자 게오르그 도나투스의 고모였던 빅토리아 역시 충격을 받았는데 그녀는 후에 막내 외손녀 조피의 남편이 비행기 사고 사망했을때도 이때 일을 이야기했다. 세실의 부모였던 안드레아스 왕자와 앨리스 왕자비 역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둘은 이 사고를 다르게 받아들였다. 정신적 문제로 아팠던 앨리스 왕자비는 딸의 죽음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갈 기운을 얻었다. 그녀는 세실이 결혼할때쯤부터 가족을 떠나 계속 떠돌아다니고 있었지만, 딸의 죽음은 그녀가 가족들에게 돌아가야한다는 생각을 심어주게 되었다. 반면 안드레아스 왕자는 세실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실은 왕자가 가장 사랑한 딸이었으며, 세실 역시 어린시절부터 아버지를 매우 따랐다. (전선에 나가있어서 오래도록 못만나다가 아테네에선가 만났을때 어린 세실은 배멀미로 축 쳐져있다가 아버지를 보는순간 뛰어갔다고 합니다. 이런 딸이었으니 얼마나 아꼈겠습니까) 안드레아스 왕자는 후에 장모인 빅토리아에게 쓴 편지에서 "시간이 날수록 고통이 더해진다"라고 이야기했다.

대공가의 장례식에는 많은 이들이 참석했는데, 세실의 자매들과 그 남편들 모두가 왔으며,세실의 부모인 안드레아스 왕자와 앨리스 왕자비, 세실의 남동생이었던 필리포스 왕자(필립공)역시 왔다. 가족이 이렇게 다 모인것이 거의 10여년만이었기때문에 세실의 큰언니였던 마르가레타는 "세실이 죽어서 가족을 다 모이게 해줬다"라면서 슬퍼했다고 한다.

 

 

앨리스 왕자비

바텐베르크의 공녀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비

이건 1920년대 참고로 아줌마처럼 그려진 초상화는 1910년대--;;;;;;

앨리스는 아팠지만, 딸의 죽음을 통해서 가족곁에 있어야한다는 의지로 병을 극복했습니다.

앨리스의 병은 아마도 망명생활에서 오는 우울증으로 비롯된 병인듯한데, 뭐 프로이트가 내린 병명은 엄청길던데 대충 편집증 비슷한 병..이라고 정의하더이다.--;;;

 

이제 가문을 계승하게 된 루드비히는 고아가 되어버린 형의 딸 요한나를 입양해서 친자식처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비극은 아직 끝난것이 아니었죠.

 

자료출처

1.Alice:Princess Andrew of Greece (2001, Hugo Vickers)

2.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1.위키 미디어 커먼스

2.위키 피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