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캐서린 스윈포드 전기가 와서 미친듯이 읽고 있습니다..아아...우울할땐 현실도피성 책읽기가 짱입니다=-=
잠깐 내용을 훑어보고 있는데 재미나는군요...아하하..
뭐 몇몇 아마존 평이 심하게 공감이 됩니다만, 어쩌겠습니까 자료가 없는걸요...
캐서린 스윈포드와 랭카스터 공작이 눈맞은 이유 중 하나에 대해 앨리슨 위어는 둘이 공작부인인 블랜치에 대한 기억을 공유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랭카스터 공작은 블랜치를 매우 사랑했으며, 둘은 너무나 행복한 부부였습니다. 이때문에 부인의 죽음은 랭카스터 공작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에드워드3세는 아들이 슬픔때문에 죽지 않은것이 신기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캐서린 스윈포드 역시 어린시절부터 블랜치를 알았으며, 자신보다 10살정도 많은 블랜치를 많이 의지하고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 역시 블랜치의 죽음에 큰 슬픔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캐서린은 공작의 슬픔을 이해했고, 공작의 행복했던 기억 역시 이해하는 여성이었다고 하네요.
앨리슨 위어의 평가가 재미있었는데, 랭카스터 공작은 자신의 두번째 부인과는 카스티야에 대한 열정만을 공유했으며, 나머지 모든것은 캐서린 스윈포드와 공유했다라고 합니다.^^*
랭카스터 공작인 존 오브 곤트는 후에 영국과 다른 많은 왕가의 선조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의 아들인 헨리는 후에 영국의 헨리4세가 되며, 장미전쟁에 나오는 랭카스터 가문이 바로 이 랭카스터 공작의 직계후손인것이죠. 또 재미난것은 장미전쟁에 나오는 요크가 역시 랭카스터 공작의 후손이라는 점입니다. 랭카스터 공작과 그의 정부이자 후에 부인이 되는 캐서린 스윈포드의 막내딸인 조앤 보퍼트는 랄프 네빌과 결혼합니다. 둘의 손자중 한명이 kingmaker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워윅백작이고, 딸 중의 한명은 "오만한(proud)" 시슬리 라고 불린 시슬리 네빌입니다. 그녀는 요크 공작과 결혼했고, 시슬리 네빌의 아들이 바로 에드워드4세와 리처드3세입니다.
또한 랭카스터 공작의 큰딸인 필리파는 포르투갈의 국왕과 결혼했으며, 두번째 부인의 딸이었던 캐서린은 카스티야의 국왕과 결혼합니다. 이 두결혼으로 랭카스터 공작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의 조상이 됩니다. 이사벨라 여왕의 딸인 후아나는 바로 유명한 합스부르크가문에 스페인과 신대륙을 상속받을수 있게 해준 조상이죠. ^^*(후아나의아들이 바로 카를5세입니다.)
행복한 부부....랭카스터 공작 존 오브 곤트와 그의 부인인 블랜치
랭카스터 공작인 존 오브 곤트는 에드워드3세와 그의 부인인 에노의 필리파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당대 영국 최고의 상속녀였던 랭카스터의 블랜치(블랑쉬)와 결혼합니다. 둘의 결혼은 무척이나 행복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랭카스터의 블랜치는 랭카스터 공작이었던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딸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국왕인 에드워드3세를 제외하고 왕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사람이었습니다. 블랜치의 아버지 헨리 역시 왕족이었으며 에드워드3세의 육촌이기도 했죠. 그는 국왕이 신임하는 친구였으며 뛰어난 군인이기도 했습니다.
헨리는 불행히도 그의 작위를 상속할 아들이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그의 두 딸은 상속녀로 주목받습니다. 블랜치의 언니인 마틸다(모드)는 존 오브 곤트의 사촌인 바이에른 공작과 결혼했습니다만, 상속자없이 사망했고 블랜치는 랭카스터 공작령의 단독 상속녀가 되어서 랭카스터 공작령을 남편과 아들에게 물려주게 되죠.
블랜치는 어린시절부터 왕비 필리파의 보호아래있었습니다. 이때문에 필리파 왕비의 자녀들과도 잘 알고 지냈으며, 왕비의 시녀들중 하나였던 캐서린 드 로에(캐서린 스윈포드) 역시 알고 지냈으리라 여겨진다고 합니다. 우아하고 뛰어난 기사이자 예술과 학문의 보호자였던 아버지 처럼 블랜치도 우아했으며 매우 총명했고 당시에는 매우 이례적으로 여성으로 쓰고 읽을수 있었으며 여러 시인의 보호자이기도 했습니다.
흰색에 가까울정도의 금발에 너무 크지 않은 적당한 크기의 푸른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자, 온화하고 조용하게 말하는 여성이었으며 "너무 우울하지도, 너무 활달하지도 않은" 성품의 여성이었습니다.
테피스트리에 그려진 귀부인
아마 랭카스터 공작부인인 블랜치 라고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상속녀였던 블랜치에 대해 존 오브 곤트는 깊은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 구혼하지만 단번에 거절당해서 크게 상심합니다. 존 오브 곤트는 블랜치의아버지인 헨리를 자신의 영웅으로 여기고 있었고 자신의 롤모델 중 한명으로 택했기에 그의 딸인 블랜치에 대한 애정이 더 컸을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당했지만, 이 키크고 멋진 기사는 결국 자신의 "귀부인"을 놓치지 않죠.
1359년 존 오브 곤트와 블랜치는 결혼합니다. 둘의 결혼이 결혼한후, 존 오브 곤트는 랭카스터, 링컨셔 등의 백작 지위를 얻었으며, 블랜치의 언니가 죽고 블랜치가 단독 상속자가 되자, 장인의 지위였던 랭카스터 공작 지위를 받습니다. 이때문에 존 오브 곤트는 국왕인 아버지와 웨일즈 공이었던 형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됩니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공작부인 The Duchess"라고 불렸던 사람은 오직 블랜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랭카스터 공작은 아내를 통해서 엄청난 부와 지위를 얻었기때문에 종종 그가 블랜치와 정략결혼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만, 랭카스터 공작이 아름다운 블랜치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것이 틀림없을것으로 여겨집니다. (뭐 사랑에 빠졌는데 상속녀였으니 일석이조인것이죠.=-0;;)
랭카스터 공작 존 오브 곤트
랭카스터 공작 부부는 매우 행복했는데, 당시는 100년전쟁시기였으며 공작은 자주 전장이 있는 프랑스로 떠나야했습니다. 하지만 블랜치는 남편을 따라 프랑스로 가지는 않았는데 공작은 주로 전장에 있었기에 여성이 머물만한곳이 없었으며, 게다가 블랜치는 결혼후 자주 임신을 해서 해외에 따라가기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블랜치는 주로 자신이 태어났던 링컨셔의 성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1368년 가을행복했던 랭카스터 공작 부부는 불행을 겪게 됩니다. 바로 공작부인인 블랜치가 사망한것이죠. 블랜치는 그해 여름 일곱번째 아이를 낳습니다. 이사벨라 라는 이름으로 세례받은 이 아이는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서 사망합니다. 이때 블랜치는 스물 여섯살이었으며 구년간 일곱아이를 낳았었죠. 아이가 태어난지 한달 후쯤에 블랜치가 사망합니다. 아마 블랜치의 죽음은 산욕열이나 출산후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해서 사망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흑사병 이야기는 소설일뿐이군요..흑)
존은 사랑하는 아내의 임종을 지켰다고 합니다.
존은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슬픔에 빠졌습니다. 결혼생활동안 둘의 불행했다거나 사이가 나빠졌다는 징후는 전혀 없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에 상심했으며 이후 아내의 기일을 늘 기념했으며 죽은후에는 자신의 아내이자 첫사랑이었으며 상속자의 어머니였던 블랜치 곁에 묻히고 싶어 했습니다.
에드워드3세는 아들이 상심에 대해서 "그의 고통때문에 죽지 않았던것"이 놀라울정도라고 했다고 합니다.
존은 사랑하는 아내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 가야했죠. 대신 보낼수 있는 자신의 최고 장교들을 보내서 대리하도록 했습니다.
블랜치에 대한 기억은 블랜치와 랭카스터 공작이 후원했던 시인인 초서가 쓴 시인 "The book of the Duchess"에 기록되어있다고 합니다. (재미난 것은 초서는 캐서린 스윈포드의 여동생인 필리파 드 로에의 남편입니다.^^* ) 이 시는 랭카스터 공작의 의뢰로 쓰여진것으로 이 시에서 시인은 검은옷을 입고 슬픔에 빠진 한 기사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바로 부인을 잃은 슬픔에 빠져있던 랭카스터 공작인것이죠.
랭카스터 공작과 블랜치 사이에서 성인이 될때까지 살아남은 아이들은 모두 세명이었으며 큰 딸인 필리파는 포르투갈의 주앙1세와 결혼해서 포르투갈의 왕비가 됩니다. 그리고 막내아들이자 후계자였던 헨리는 후에 잉글랜드의 헨리4세가 되어 랭카스터 가문에서 처음으로 국왕이 됩니다.
포르투갈의 주앙1세와 랭카스터의 필리파의 결혼
블랜치의 아들
볼링브룩의 헨리
랭카스터 공작 헨리
잉글랜드의 헨리4세
자료출처
Mistress of the Monnarchy ; the life of Katherine Swynford, Duchess of Lancaster (2010,Alison Wier)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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