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제가 원래 숙빈 최씨를 어릴때부터 좋아했는데 (조선시대 좋아하는 두명의 후궁중 한명입니다. 다른 한명은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 안씨라죠. ) 사실 동이 시작할때 은근히 기대를 했었습니다만..뭐 판타지로 변한후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죠. (전 판타지 사극은 안좋아해요..가채는 그냥 그러려니 할수 있었는데, 어린시절도 그냥 넘어갈수 있었는데, 뒤쪽으로가니 그냥 판타지더라구요..아하하..영조가 서동요의 서동도 아니고 말입니다.)
사실 제가 원래 드라마를 잘 안보긴하죠..--;;;;
어쨌든 드라마는 관심 끊었는데 오늘 우연히 인터넷 기사에 숙빈이야기가 나왔는데 거기 나온 대목중 "어랏 난 저거랑 다르게 해석했는데"라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숙종이 이현궁을 회수하라는 교지 대목이었다죠. 저는 숙종이 미안해한것은 숙빈에게가 아니라 백성들에게 미안하다는 소리라고 이해했거든요. 왕가의 후궁이 쓰는 궁이 다른궁보다 저렇게 크고 넓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이제 아들이 결혼해서 그집에 살아도 되니 그걸 환수하겠다..라는 내용이라고 이해했거든요. 그래서 대신들이 찬양한번해주시고..--;;이런 내용으로 이해했었는데 말입니다.
숙종 50권, 37년(1711 신묘 / 청 강희(康熙) 50년) 6월 22일(경진) 2번째기사
“옛날의 이현궁은 곧 지금의 숙빈방(淑嬪房)이다. 주위(周圍)의 넓고 큼이 다른 궁(宮)에 비교할 바가 아니어서 연(輦)을 타고 지날 때마다 마음이 항상 미안(未安)하다. 이제는 연잉군(延礽君)의 제택(第宅)으로 이미 정하였으니, 이 집에 동거하여도 불가할 것이 없다. 이러한 뜻으로 분부(分付)하라.”
사관(史官)은 말한다. 이 두 가지의 일은 진실로 궁부는 일체(一體)이며 왕이 된 자는 사사로움이 없다는 뜻을 얻은 처사이며, 또 사람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성상의 마음으로 판단하였으니 더욱 그 성대한 절도(節度)를 볼 수 있다. 다만 내사(內司)는 아직도 아울러 혁파(革罷)함을 아껴 그 선(善)함을 다하지 못하니, 애석하다.
이것이 숙종실록에 나오는 기사의 전체입니다. 앞쪽이 숙종의 전교 내용이고 뒷쪽이 이에 대한 사관의 평가죠. 아시다시피 숙종실록은 숙종 당대에 쓰여진것이 아니라 후에 영조때 쓰여진것입니다. 이때문에 사관의 평가가 첨가로 들어갑니다.
전교의 핵심은 숙빈방이 다른 궁에 비교할바가 아니게 크고 넓다는것이죠. 그래서 옮기라고 명한것이죠. (국역본만 본거긴합니다. 솔직히 한문본은 전 해석이 불가하거든요. 실록이 단순히 한자만 안다고 되는 문제가 아닌지라....)
이에 대한 증거는 다음달 나오는 대신들의 상소문에서 입증되는데 "왕자와 제빈의 제택(第宅)이 거의 모두가 지나치게 성대(盛大)하니, 이제부터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것을 깊이 경계하여 혹 증가(增加)하지 말도록 하여 항상 절약하는 마음이 있게 하시면, 오늘 특별히 내리신 교지(敎旨)의 성대(盛大)한 아름다움을 미루어 넓혀서 능히 끝맺음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거로 봐서는 분명 숙빈한테 미안한것은 결코 아니라는거죠.
자료출처
조선왕조 실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숙종 50권, 37년(1711 신묘 / 청 강희(康熙) 50년) 6월 22일(경진) 2번째기사 (국역)
숙종 50권, 37년(1711 신묘 / 청 강희(康熙) 50년) 7월 2일(기축) 1번째기사 (국역)
(조선시대 이야기는 진짜 좋은것이 바로 궁금하면 이렇게 실록을 인터넷으로 검색할수 있다는것이죠. 전 실록이 영문으로도 번역되어야한다고 생각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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