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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선전의 피해자들

엘아라 2010. 10. 1. 01:52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요즘  마리 앙투아네트이름이 자주 오르네리네요...ㅠ.ㅠ

흑..마리에 대한 저 흑색선전은 너무나 유명해서 그런듯합니다.

 

어쨌든 "마리가 그 말한것이 아니야..ㅠ.ㅠ 프랑스 사람들도 안했다고 인정했어"라고 외쳤습니다만 갑자기 흑색선전의 피해자에 대해서 궁금해지더라구요...ㅎㅎㅎ (그런데 저만 마리가 억울해..라고 생각했던것이 아니더군요..ㅎㅎㅎ)

 

그래서 문득 이 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흑색선전의 피해자들

 

마리 앙투아네트에 얽힌 많은 이야기중 자주 인용되는 말이 있습니다.

먹을것이 없어서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되지."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마리는 그런말을 한적이 없다죠. 이건 오래된 이야기로 저말이 나올때마다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어찌나 고정관념은 무서운지 무슨 일이 있을때 마다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내용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식량난 해결을 위해 프랑스에 감자를 도입하는데 힘썼다는 사실을 잘 모르실겁니다. 루이16세 이전에 프랑스에서는 감자를 식량으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감자 키우는것을 배척했는데, 심지어는 감자를 키울경우 그 감자밭 주인은 자신의 감자로 사람들에게 맞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뉘신가가 독일의 감옥에서 감자로 연명한후, 깨달음을 얻어서 식량으로 감자 보급을 주장합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주장을 지지했죠. 그래서 루이16세는 감자밭에 보초를 세워주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감자꽃을 꽂고 무도회에 나와서 감자에 대한 귀족들의 관심을 높였다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빵대신케이크"라고 말한적 없다죠.

마리에게  "무개념왕비"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핵심적인 말이 저 빵대신 케이크라는 말이죠.

이말은 마리가 한것이 아니라 다른 프랑스 공주가 이야기했다는 글을 얼핏봤는데 지나가다 봐서 누군지 모르겠군요.. 

 

 

프랑스의 베르나도트 장군은 후에 스웨덴으로 이민가서 왕태자가 됩니다. 그리고 새롭게 자신의 조국이자 후에 아들이 물려받을 왕국인 스웨덴을 위해 모국 프랑스를 배신하는 행동을 하죠. 이때문에 프랑스는 그에 대해서 애증의 관계로 변하는데, 후대로 갈수록 증오의 감정이 깊어집니다. 물론 프랑스쪽 감정이 당연한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스웨덴 입장에서는 뭐 왕위계승자 잘 뽑은거죠. "용서할수없다"라는 프랑스의 감정도 이해된다죠. 저의 생각으로는 프랑스 지지입장이라면 배신자..를 외쳐도 되고, 스웨덴 입장이라면 이민와서 자신의 새 조국에 헌신한것이 뭐 나뻐...를 외쳐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 스웨덴을 좀더 좋아하기 때문에  후자쪽에 가깝습니다만  만약 제가 프랑스를 더 좋아했다면 저도 이런 배신자..라고 했을수도 있습니다. )

칼14세 요한이 죽은후 국왕의 몸에 "왕들을 죽여라"라는 문신이 있다는 이야기가 파다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확인된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또 언급하는 내용이 그가 열렬한 자코뱅파였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마치 그가 프랑스 혁명당시 범죄들이라고 불릴만한 사건들 (이를테면 어린아이였던 루이16세의 아이들을 죽게한거나, 정치적 권력이나 상징이 아니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게 만든것등)에 직접적으로 관여된것과 같은 이미지를 부각시키는것이죠.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수도에서 왕과 왕비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할때 겨우 독일전선에서 싸우던 하급장교였습니다. 그는 지휘권을 갖는 장교가 되는것이 목표였고 라인전선에서 열심히 전투중이었습니다. 그가 혁명을 지지한것은 혁명이전에는 장교가 될수 없었던 신분이었지만, 혁명이후 그는 장교가 되었고 장군이 됩니다. 이때문에 그는 혁명을 지지한것이지 수도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무엇인가를 얻으려 한것이 아니었죠.

 

 

스웨덴의 칼14세 요한

프랑스의 베르나토드 장군

문신 이야기 말고도 프랑스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던 일명 "기왓장의 날"에서 발포하라고 명령한 사람이 베르나토트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땐 베르나도트는 그런 명령을 할만한 지위에 있지 않았다죠. 겨우 하사관이었는걸요.

 

 

 

빅토리아 여왕의 장손은 에디라는 애칭의 앨버트 빅터 왕자였습니다. 그는 영국의 왕위계승자였으며, 빅토리아 여왕이 사랑한 손자였죠. 하지만 그는 인플루엔자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잊혀지죠.

1970년대 한 아마추어 범죄학자는 에디가 잭더리퍼라고 주장합니다. 아주 단순한 가설을 가지고 주장했지만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역사학자들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에디는 "미친인간"의 대명사로 바뀌었죠.

에디가 잭더리퍼와 관계된 이야기는 그다지 신빙성없어보입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에디가 잭더리퍼라던가 그와 관련되었다고 이야기하는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잭더리퍼 이야기에는 에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야기에서는 잭더리퍼가 에디는 아니지만 적어도 에디와 관계된 사람이라는 언급을 합니다. 그가 비밀리에 카톨릭교도와 결혼했으며 이를 감추기 위해 왕실에서 죽였다는 이야기죠. 이 이야기는 영화 From Hell의 소재가 되기도 합니다. (조니뎁나와요.) 이 모든 이야기들을 현재는 사실이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에디는 잭더리퍼와 관련없다는것이죠.

에디의 전기를 썼던 한 사람은 이에 대한 책임을 조지5세에게 돌리기도 합니다. 조지5세가 즉위할때만 해도 "오 에디가 있었다면."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에디에게는 몇몇 스캔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스캔들은 동성연애스캔들로, 현재 이 스캔들 역시 관련되었던 서머셋경의 변호사가 의뢰인을 위해 에디가 관련되어있다고 허풍떤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대부분입니다. 아버지의 스캔들에 이미 치를 떨었던 조지5세는 흔들리는 왕가를 지키기 위해 더이상의 왕실에 대한 스캔들을 용서할수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형에 대한 기억들이 잊혀지게 만들었던것이라는거죠.

 

 

프린스 에디

클라렌스와 에본데일 공작 앨버트 빅터

조산으로 태어났기때문에 어릴때는 저렇게 멀쩡해질줄 몰랐다고 합니다.

1930년대까지 에디가 죽은것이 아니라 조지5세를 왕위에 세울려는 음모로 와이트 섬에 갇혀있다..라는 이야기가 있을정도였습니다. 전 에디 다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그가 죽음으로써 자신이 잊혀졌을뿐만 아니라 좋은 평판도 잊혀졌다."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구절이었다죠. (..ㅎㅎㅎ 정확한 문구가 기억이.....)

 

 

앞에서 말한 에디의 동생 조지5세 역시 헛소문에 시달려야했습니다.

조지5세가 재위하던 시기는 1차대전 전후였던지라, 유럽의 수많은 왕가들이 몰락하고 많은 나라들이 공화국으로 바뀌던때였습니다. 영국 역시 공화정에 대한 이야기가 파다했죠. 이때문에 왕실을 악의적으로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왕실을 지키는데 안간힘을 쓰던 조지5세와 메리 왕비는 왕실에 대한 어떤 스캔들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조지5세가 중혼했다는 소문은 즉위초부터 돌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두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가볍게 여겼습니다.(조지5세 성격을 안다면 절대 그럴리가 없죠.) 하지만 이 소문은 오래오래 퍼졌고, 몇몇 글이 출판되면서 나중에는 걷잡을수 없을만큼 확대생산됩니다.

조지5세는 처음에는 이런 소문이 있다는 이야기조차 몰랐습니다. 왜냐면 주변에서 너무 말도 안되는 소문이라 그냥 무시하고 국왕에게 알리지 않았던것이죠.

걷잡을수 없을만큼 번지자, 조지5세가 알게 되었고, 그는 열받습니다. 뭐 총각시절에는 어땠는지 알수 없지만(조지5세는 해군이었습니다. 멘토였던 바텐베르크의 루이스공이 총각시절 바람둥이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적어도 그는 20대초반부터 맘에 둔 여자가 있었고, 그녀만을 바라보다 차인후-0-;;; 메리 왕비와 바로 결혼했습니다. (10살정도 어렸던 사촌 에든버러의 마리를 사랑해서 진짜 어릴때부터 작업중이었습니다.-0-;;하지만 양가 어머니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습니다.)

이때문에 그가 20대초에 몰타에서 해군제독의 딸과 결혼했으며, 이때문에 메리왕비와의 결혼은 무효이고, 왕실의 자녀들 역시 사생아라고 주장하는것에 열받은것입니다. 그는 적어도 아버지와 같은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은데 큰 자부심을 느꼈었기 때문입니다.

열받은 국왕은 명예훼손으로 출판업자를 고발하려했는데, 일단 정부의 반대에 부딪힙니다. 이유는 국왕이 직접 명예훼손으로 소송하는것은 권력남용으로 보일수 있다는것이었죠. 결국 정부의 면밀한 조사끝에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합니다만, 국왕은 재판정에 나오는것을 금지당했습니다. 역시나 권력남용이 우려됐기 때문입니다. 재판결과 조지5세가 중혼한 사실이 없다는것이 밝혀졌습니다. 

 

영국의 조지5세

요크공작 시절

전형적인 빅토리아시대 사람이었던 조지5세는 아버지의 스캔들에 치를 떨었으며, 더이상의 왕실 스캔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들들인 에드워드나 조지(켄트공작)은 영....(참고로 조지6세는 요크공작때는 앨버트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