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크리스티나 여왕에 대한 책을 몇권찾았는데......아하하..읽을 시간이 없군요.-0-;;;
내년에는 백수를 면해야하지 않겠습니까..ㅠ.ㅠ
어쨌든 번역비슷하게 하려면 시간이 오래걸리니...-0-;;
열받을때마다 대충 읽어보고 정리하듯이 글을 쓰려합니다.
하다가 관둘수도 있습니다...아하하....
크리스티나 여왕
스웨덴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왕을 뽑으라면 많은 이들이 바사가의 국왕이었던 구스타프2세 아돌프를 뽑을것이다. 그는 사방으로 밀려오던 스웨덴의 적들을 맞이하여 스웨덴을 지켜냈으며, 스웨덴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30년 전쟁에 개입해서 매우 뛰어난 성과를 얻었다. 비록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전장에서 전사하기는 했지만, 이후 스웨덴은 한동안 유럽의 강국지위를 누렸다.이 구스타프2세 아돌프의 후계자는 아버지에 의해 Prince로 선포되었으며 후에는 King으로 즉위하는 크리스티나였다. 크리스티나의 일생은 탄생부터 마치 한권의 소설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게한다.
크리스티나의 아버지 구스타프2세 아돌프가 즉위했던때, 스웨덴은 적에게 둘러쌓여있었다. 크리스티나의 할아버지이자 구스타프2세 아돌프의 아버지인 칼9세는 조카인 시기스문드의 왕위를 빼앗았다. 외가쪽 혈통으로 폴란드 국왕으로도 선출된 시기스문드(폴란드에서는 지그문트3세)는 스웨덴에 카톨릭을 확대하려는 정책을 폈다. 게다가 그는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된 이후 스웨덴이 아니라 폴란드에 머물렀고 스웨덴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귀족들의 불만을 야기시켰으며, 결국 귀족들은 신교를 지지하는 시기스문드의 숙부인 쇠더만란드 공작 칼을 스웨덴 국왕으로 옹립했다. 하지만 이것은 스웨덴내부에서 불안정을 초래했는데, 정당한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시기스문드를 지지하는 세력역시 컸기 때문이었다. (칼9세가 즉위한후 스웨덴의 의회는 왕위계승권을 신교를 믿는 이로 한정했다. 하지만 여성왕위계승자에 대해서는 한정하지 않았다.)
또 전통적으로 스웨덴은 러시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덴마크와 노르웨이 역시 스웨덴의 영토를 노리고 있었다.(당시 덴마크 국왕은 노르웨이 국왕도 겸임) 사방에 적으로 언제 전쟁을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외교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될수 밖에 없었다.
크리스티나의 아버지
스웨덴의 구스타프2세 아돌프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정치적 목적으로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엘레노라와 결혼했다. 원래 그는 스웨덴의 유력 귀족가문의 딸이었던 에바 브라헤와 오랫동안 사랑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구스타프2세 아돌프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어머니 크리스티나 왕비는 아들이 좀 더 정치적으로 중요한 여성과 결혼하길 원했다. 결국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에바 브라헤와의 결혼을 포기했고, 적당한 신부감을 물색했으며 그 후보가 바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시기스문트의 딸인 마리아 엘레노라였다.
마리아 엘레노라와 구스타프2세의 결혼은 처음에는 그다지 성사되지 않을듯 보였다. 호엔촐레른가문은 프로이센의 공작이라는 신분으로 폴란드 국왕과 봉신관계였다. 당시 폴란드 국왕은 구스타프2세 아돌프의 사촌인 지그문트3세로 그는 여전히 자신이 스웨덴의 정당한 국왕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으며, 스웨덴 왕위를 되찾고 싶어했다. 이런 폴란드 국왕과 봉신관계였던 프로이센의 궁정에서는 구스타프2세 아돌프를 좋게 볼리가 없었다. 하지만 마리아 엘레노라의 아버지는 구스타프2세 아돌프에게 호감을 가졌고, 결혼 당사자였던 마리아 엘레노라 역시 다른 많은 구혼자들보다 젊은 스웨덴 국왕에게 좀 더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마리아 엘레노라의 어머니인 안나와 프로이센에서 성장한 마리아 엘레노라의 오빠이자 선제후의 후계자였던 게오르그 빌헬름은 마리아 엘레노라와 구스타프2세 아돌프간의 결혼을 반대했다. 특히나 구혼 중 마리아 엘레노라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오빠인 게오르그 빌헬름이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가 되자 결혼은 거의 성사되지 않을것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이 젊은 스웨덴 국왕이 구혼을 위해 베른린에 왔을때, 그를 보고 반한 사람이 신부감이었던 마리아 엘레노라 뿐만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구스타프2세 아돌프를 사윗감으로 탐탁치 않아했던 마리아 엘레노라의 어머니 안나 역시 결혼에 찬성했으며, 아들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딸을 브라운슈바이크로 데리고 가서 결혼협상을 진행했다. 이렇게 구스타프2세 아돌프와 마리아 엘레노라는 동화속 왕자님과 공주님처럼 주위의 난관을 극복하고 결혼했다. 하지만 동화속 공주님과 왕자님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지는 못했다.
크리스티나의 어머니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엘레노라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는 후에 프로이센 왕가가 됩니다.
마리아 엘레노라는 추운 스웨덴 기후에 적응하기 힘들어했으며, 스웨덴 궁정에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어느정도 이해가 되는것이 마리아 엘레노라가 결혼했을때 스웨덴 궁정의 중심은 시어머니인 크리스티나 왕비였다. 그녀는 매우 엄격한 사람으로 아들의 믿을수 있는 정치적 조언자였으며, 한때 섭정이기도 했었다. 이런 강인한 시어머니 밑에서 살게 되는것은 어떤 여성이라도 부담이 아닐수 없었을것이다.
또 마리아 엘레노라는 당시 왕비의 의무였던 후계자를 낳는 일에 실패했다. 계속 딸만 낳았으며, 그 딸들도 얼마 살지 못했다. 이런은 마리아 엘레노라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었는데, 구스타프2세 아돌프의 사촌이자 스웨덴 왕위의 정당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던 폴란드 국왕과 대비되었기때문이었다. 폴란드 국왕에게는 확고한 후계자들이 있었는데, 그에 반해 구스타프2세 아돌프에게는 후계자가 될만한 인물은 동생한명밖에 없었으며 그 동생도 구스타프2세 아돌프와 마리아 엘레노라가 결혼한 2년후인 1622년에 사망했기때문에 마리아 엘레노라는 더욱더 후계자에 대한 생각으로 초조해져갔고 자신이 후계자를 낳지 못할것이라는 두려움에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져갔다.
마리아 엘레노라가 다시한번 임신했을때, 점성술사는 별점을 보고 왕비가 낳을 아이가 사내아이일것이라고 예언을 했다.후계자를 기다리던 국왕과 왕비에게는 너무나 기쁜 예언이었고, 이후 모두들 왕비가 아들을 낳을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폴란드의 국왕 지그문트3세
스웨덴의 전 국왕 시기스문드
구스타프2세 아돌프의 사촌
1626년 12월 스웨덴의 마리아 엘레노라 왕비는 아이를 낳았다. 그때 태양과 수성 금성과 화성의 위치는 태어날 아이의 아버지인 구스타프2세 아돌프가 태어날때 위치와 똑같았다. 당시 최고의 천문학자이자 점성술사였던 티코 브라헤는 이 별의 위치를 보고 태어날 아이가 국왕이 될것이라 예언했으며, 17년후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국왕이 되었다. 왕비가 낳은 아이는 코가 매우 컸으며, 털로 뒤덥혀있었고 태어나자마자 천에 감싸졌다. 이런 외모를 얼핏본 시녀는 드디어 "왕자"가 태어났다면서 국왕에게 알렸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이야기였다. 긴코의 털에 뒤덥힌 아이는 남자아이가 아니라 여자아이였고, 왕자가 아니라 공주였다. 아이가 태어난후 왕비는 자신이 아들을 낳았다고 굳게 믿었다. 왕비의 불안한 정신상태를 알던 이들은 왕비에게 아들이 아니라 딸을 낳았다고 바로 이야기해줄수 없었다. 결국 왕비는 국왕이 안후에야 자신이 딸을 낳았다는것을 알았다. 마리아 엘레노라는 자신이 후계자를 낳지 못했다는데 절망에 휩쌓였으며, 그 분노의 화살을 새로태어난 딸에게로 돌렸다. 그녀는 딸을 싫어했고, 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고 위해를 가하려고도했다고한다. 후에 크리스티나는 이때 자신의 어머니 상태에 대해서 "스스로 자신의 아이를 위험에 몰아넣으려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왕자탄생"에 대한 기념연회를 베풀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나이자 팔츠-츠바이브뤽켄 공작부인이던 카타리나가 아이를 안고 왔을때 아이가 아들이 아니라 딸인것을 알고 무척이나 실망했다. 국왕은 딸을 안아들고 실망감을 감춘채 이렇게 말했다. "신께 감사드립니다. 이 딸이 내게 아들과 같길 바랍니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태어난 아이가 왕자가 아니라 공주라고 정정하지 않았고, 이때문에 스웨덴에서는 "왕자"가 태어난것을 축하했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가 크리스티나에 대해 정정하지 않은것은 그가 이미 부인인 마리아 엘레노라에게서 후계자를 기대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 엘레노라의 상태는 불안정했으며, 딸이 태어난후에는 국왕 자신이 "아프다"라고 표현할정도였다. 그는 언제나 전장에서 있었으며, 전장에서는 늘 선봉에 섰다. 이때문에 죽을뻔한 고비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티나가 태어났을때, 다른 후계자도 없었고, 또 폴란드 국왕은 여전히 스웨덴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 이런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크리스티나를 왕자로 선포했으며, 왕자로 교육시켰을것이다.
자료출처
1.Sybli of the North : Queen Christina of Sweden (1931)
2.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미디어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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