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스웨덴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2. 아버지와의 관계

엘아라 2009. 12. 30. 09:58

ㅎㅎㅎ 아무래도 이렇게 한편쓰고 나중에 엄청난 수정작업이 필요할듯해요...

퇴고를 해야하는데 말입니다...퇴고는 너무 싫어요...ㅠ.ㅠ

 

 

크리스티나를 "아들"처럼 여겼던 구스타프2세 아돌프에게 크리스티나는 기대에 부흥한 아이였다. 일례가 크리스티나가2살이 되기전에 칼마르에 갔을때 였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스웨덴의 이 중요한 항구에 딸을 데리고 갔다. 그곳 지사는 국왕과 크리스티나를 맞이하기위해 축포를 쐈다. 아주 어렸던 크리스티나는 이 대포소리에 놀라지 않았고, 도리어 이런 큰 소리를 낸 물체에 매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이것은 크리스티나가 태어났을때, 화성이 수성과 금성옆에 있었던것을 환기시켜주는 일로, 뛰어난 군인이었던 구스타프2세 아돌프를 매우 기쁘게하는 일이었다. 이후 국왕은 군대를 사열할때마다 딸을 데리고 갔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가 크리스티나를 후계자로 공식적으로 지명한것은 크리스티나가 4살이 되던해였다. 이때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크리스티나에게 후계자로써 공식적으로 영지를 하사했다. 다른 후계자가 남아있지 않았던 구스타프2세 아돌프에게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왜냐면 영지를 하사한 다음날 국왕은 그가 역사상 이름을 크게 남길뿐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잃을 전쟁을 치루기 위해 독일로 떠나기로 되어있었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와 스웨덴 의회는 독일에서 일어난 전쟁(30년 전쟁)이 결국 스웨덴에도 영향을 미칠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전쟁중 즉위했으며, 늘 전장에 있었던 구스타프2세 아돌프와 적들에게 둘러쌓인 스웨덴을 지켜야했던 스웨덴 의회는 선제 공격만이 적절한 방어책이라고 판단했으며, 이에 독일로 침공하기로했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떠나기전 자신의 후계자인 크리스티나에 대해서 할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 부인인 마리아 엘레노라가 딸을 잘 돌볼수 없을것이라 생각해서 딸의 양육을 누나인 팔츠-츠바이브뤽켄 공작부인인 카타리나에게 맡겼다. 마리아 엘레노라는 자신의 딸을 스스로 양육할수 없다는것에 화를 냈고, 남편의 조치에 매우 화를 냈지만,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자신의 뜻대로 했다.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 필요한 가정교사와 후견인 역시 자신이 선택했다. 크리스티나 여왕의 회고록에서 그 가정교사들에 대해서 "그들은 아버지처럼 애국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라고 회상했다. 크리스티나의 후견인과 가정교사들은 모두 스웨덴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세사람이었다.

첫번째는 구스타프2세 아돌프의 총신이자 궁정의 총 관리자였던 악셀 바네르였다. 악셀 바네르의 아버지는 칼 9세때 처형당했지만, 구스타프2세는 이 가문을 복권시켰다. 악셀 바네르는 매우 잘생긴 외모였지만, 과음을 했으며 여자를 밝혔고, 외국어를 하나도 못했으며,폭력적이었던 그다지 교양있는 인물은 아니었고 이때문에 크리스티나는 그를 정직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두번째는 악셀 바네르와 정반대되는 인물이었던 구스타프 호른이었다. 그는 매우 교양있는 인물로 수많은 외국어에 능통했으며 이탈리아 프랑스등 외국여행도 많이 했고 외교에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수많은 나라의 예의에 정통했지만 그만큼 지루한 인물이기도 했다.

세번째는 크리스티나의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요한 마티에였다. 그는 웁살라 대학교의 교수으며, 신학박사였고 국왕의 참모였다. 그는 매우 엄격한 인물이었으며 나약한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 인물이었기에 크리스티나는 그를 매우 존경했으며 큰 영향을 받았다.

또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나라를 떠나있는동안 내정을 관리할 인물로 다섯명의 섭정을 선출했다. 하지만 왕비인 마리아 엘레노라는 거기에서 배제했는데,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부인을 사랑하긴 했지만, 그녀의 정치적 능력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고 그냥 남편이 하는일에 따르는 조용히 따르길 원했다. 다섯명의 섭정은 구스타프2세 아돌프가 가장 신뢰한 신하인 악셀 옥셴셰르나와 그의 동생인 가브리엘 옥셴세르나, 악셀 옥셴셰르나의 사촌인 또다른  옥셴세르나, 길덴하임 남작과 야곱 드 라 가르디였다.

특히 길덴하임 남작은 칼9세의 사생아로 구스타프2세 아돌프의 이복형이었다. 그는 크리스티나를 무척이나 사랑했는데, 크리스티나는 그에 대해서 그가 자신은 "친딸처럼"사랑했다고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스웨덴을 떠나 독일로 가있는동안 크리스티나는 여느 딸들 처럼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그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가장 기쁘고 사랑하는 아버지께

 

전 폐하와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기에, 폐하께 제 초상화를 보내드려요. 폐하께선 이걸 보시고 제 생각에 기쁘시겠죠, 그리고 제게 빨리 답장보내주세요. 그리고 그때 제게 어떤 예쁜것도 보내주실거라 생각해요.전 항상 착한 아이가 되려하고 점잖게 기도하는법도 배웠어요.

전 정말 잘 있습니다. 신께 감사드립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언제나 폐하의 좋은 소식만 가져다 주실것이에요. 전 언제나 하나님께 아버지에 대해 기도하고 있어요.

 

폐하의 성실한 딸인

크리스티나 올림.

 

 

 

구스타프2세 아돌프 역시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딸과 아내를 무척이나 생각했다. 그는 스웨덴에서 내정을 관리하던 옥셴쉐르나에게 남편없이 홀로 있는 왕비와 어린 딸을 걱정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독일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는 "북방의 사자, 신교의 수호자"로 널리 이름을 떨쳤고, 독일내 영토를 장악해서 스웨덴에도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성공도 곧 끝이 난다.

1632년 루첸전투에서 이 위대한 국왕은 전사했다. 크리스티나는 후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승리에 안겨서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했다. 크리스티나가 겨우 여섯살때 일이었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의 죽음은 스웨덴과 더 나아가 신교전체에 큰 타격이었다. 뛰어난 군인이기도 했던 국왕을 잃은 스웨덴은 선제공격전술을 더이상 쓸수가 없었다. 게다가 스웨덴 왕위계승문제 역시 복잡한 상황이었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의 사망으로 독일의 신교 연합 역시 큰 타격을 입었고, 스페인과 합스부르크가의 황제들은 그의 죽음을 매우 기뻐했다.

 

 

 루첸전투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이야기는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이미 일어난일을 돌이킬수 없기에 "만약 어땠다면.."이라는 이야기가 필요없는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티나 이야기를 읽다가 보면 늘 아버지의 죽음에서 "만약"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크리스티나의 삶에서 아버지는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는 뛰어난 군인이자 정치가였으며 다른 이들을 사로잡는 카리스마 있는 군주였다. 이런 국왕이 후계자로 지명한 크리스티나 역시 어쩔수 없는 상황이긴했지만, 어느정도 능력이 있었을것이다. 실제로 크리스티나는 매우 지적인 인물로 후에 데카르트를 닥달해서 공부할정도였다고 알려져있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가 딸의 교육에 신경을 썼다는 점은 독일로 떠나기전 딸을 돌볼 인물들로 선택한 사람들만 봐도 알수 있다. 자신이 믿을수 있었던 누나 카타리나에게  딸의 양육을 부탁했다. 그리고 크리스티나의 후견인과 가정교사를 여러 방면의 인물로 선택했다.

이런 구스타프2세 아돌프가 저렇게 일찍 죽지 않고 크리스티나가 15살때까지만 살았어도 크리스티나는 훌륭한 국왕이 되었을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교육을 받으면서 정치에 많은 경험을 쌓았다면 크리스티나가 이후 좌절감을 느낀 스웨덴 정치에 대해 좀더 유연하게 대처하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자료출처

1.Christina Queen of Sweden (1880,F.W. Bain)

2.Memoris of Christina, Queen of Sweden (1863, Henry Woodhead)

3.The Sibly of North, The Tale of Christina, Queen of Sweden (1931,Mackenzie)

4.위키피디어

5.북유럽사(2006,변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