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스웨덴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3.왕위계승

엘아라 2010. 1. 3. 08:27

...뭐 더 쓸려니..-0-;;;; 읽기가 귀찮군요...

(외교랑 과정이 다 나와있긴합니다만...쿨럭..)

 

구스타프2세 아돌프의 죽음은 단순히 크리스티나가 아버지를 잃었다는 의미이상의 것이었다. 전쟁중이던 유럽의 세력상황은 물론, 스웨덴 왕위계승문제도 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크리스티나가 왕위를 이어받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사람들은 바로 아버지의 사촌인 폴란드의 지그문트3세의 아들들이었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가 죽었던 그해, 또다른 스웨덴의 국왕이었던 이가 사망했다. 바로 칼9세에게 왕위를 빼았겼던 시기스문드가 1632년 봄에 폴란드에서 사망한것이었다. 이것은 구스타프2세 아돌프에게 왕위를 위협하던 사람 하나가 사라진것이긴했지만, 그렇다고 경쟁자들이 완전히 사라진것이 아니었다.

시기스문드의 아들인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4세는 폴란드 왕위를 계승한지 1년도 되지 않아서 구스타프2세 아돌프가 사망하자, 스웨덴 왕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그문트3세는 생전에 미 스웨덴의 여러인사들에게 자신의 아들들은 신교에 더 관대할것이며, 아우구스부르크 화의를 준수할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지지를 호소했었다.

브와디스와프4세는 구스타프2세 아돌프가 사망한 이 때가 적기라고 여겼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의 후계자는 겨우 여섯살짜리 딸이었다. 반면 자신은 성인이었고, 폴란드국왕으로 미래의 적이 될수 있는 덴마크를 견제할 능력도 있었다. 이런 상황은 스웨덴의 많은 이들이 바사가 사람인 폴란드 국왕을 다시 국왕으로 받아들이길 고려하게 만들었다.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4세

브와디스와프 바사, 크리스티나의 6촌

....초상화를 보는 순간...바사가 사람이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기다란 코는 아무리 봐도 바사가 DNA인듯해요....

 

 

하지만 몇몇 상황이 크리스티나를 국왕으로 즉위하게 했다. 가장 먼저 구스타프2세 아돌프의 총신들이자 나라를 이끌어가던 섭정단은 구스타프2세 아돌프의 유지를 반할 뜻이 없었다. 그들은 구스타프2세 아돌프가 후계자로 지명한 크리스티나를 국왕으로 만들려했다.

브와디스와프4세의 사절이 스웨덴에 와서 "구스타프 국왕의 딸이 어디있소? 우린 그런 사람에 대해서 들어본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오."라고 말하자, 그를 맞이했던 섭정중 한명이었던 가브리엘 옥셴셰르나는 어린 공주를 가르키면서 "저분이 바로 그분이오. 저 눈과 코와 이마는 우리 국왕의 모습이오. 저분이 바로 국왕의 딸이시고, 우리의 여왕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다른 상황은 폴란드 군이 스웨덴 군을 무서워한다는 점이었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와의 전쟁에서 의욕을 상실한 폴란드 군은 저 위대한 국왕이 사망한 이후에도 스웨덴을 침공하려하지 않았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전사했지만, 다른 장군들은 건재했기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군과 법률적 사항이 크리스티나를 국왕으로 지지했다는것이다.

섭정단의 최고실력자이자 구스타프2세 아돌프의 가장 충직한 신하였던 악셀 옥셴셰르나는 법률을 명확히해서 구스타프 바사와 칼9세의 후손 중 루터파 신앙을 믿는 이만이 왕국의 적법한 계승자라고 선포했다. 이것은 바로 크리스티나를 의미하는것이었다.

그리고 스웨덴에 있던 군 세력이자 역시 칼9세의 후손이었던 카타리나와 결혼한 팔츠-츠바이크뤽켄 공작인 요한 카시미르같은 인물들이 크리스티나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유력자들 역시 크리스티나를 왕위계승자로 받아들였다.

 

 

악셀 옥셴셰르나

 

 야곱 드 라 가르디

 

 

칼 칼손 길렌헬름 남작

칼9세의 사생아,구스타프2세 아돌프의 이복형 

 

 

 

1633년 3월 15일 6살이었던 크리스티나는 스웨덴의 군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