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바사가의 왕비들까지 왔습니다. 바사가 이전의 왕가는 좀 복잡해서 말입니다.아하하하..
덴마크와 공동왕이 즉위한적도 있고 하여튼 복잡합니다.
바사가의 첫국왕은 구스타프1세입니다. 그는 스웨덴을 독립왕국으로 만드는것은 성공했지만, 전통적으로 의회(귀족)의 영향력이 강했던 스웨덴에 왕권강화를 추구하죠.
어쨌든 구스타프1세는 세번 결혼했습니다.
구스타프1세
첫번째 부인은 정략결혼으로 독일 출신의 카타리나였습니다.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카타리나
Catherine of Saxe-Lauenburg, Katarina in Swedish,
(24 September 1513 – 23 September 1535)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카타리나는 작센-라우엔부르크의 공작인 마그누스1세와 그의 부인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넨부르크의 카타리나의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와 구스타프1세의 결혼은 정략결혼이었습니다. 신교를 받아들인 구스타프1세는 독일의 신교도들과 연합해서 자신의 왕권을 확고히하려 했었죠. 또 카타리나의 언니인 도로테아는 덴마크 왕위계승자의 부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카타리나는 스웨덴어를 전혀 못했고, 구스타프1세는 독일어를 잘 못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부부 사이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고 합니다. 카타리나는 스웨덴에서 우울하고 복잡한 성격에다가 스웨덴어를 못해서 인기 없는 왕비였습니다.
카타리나는 형부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3세가 방문했을때 그와 춤추다가 유산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형부가 떠난 직후 사망했죠. 구스타프1세의 적들은 구스타프1세가 자신의 왕비를 은망치로 때려서 죽게 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카타리나의 가족들은 이것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20세기에 유해를 분석했을때 그런 흔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카타리나의 아들인 에릭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스웨덴 국왕이 됩니다.
구스타프1세는 카타리나가 죽은후 친척이었던 마르가레타와 재혼합니다.
마르가레타 에릭스도테르 레이욘후프푸드
Margareta Eriksdotter Leijonhufvud,
(January 1, 1516 Ekeberg Castle, Närke - August 26, 1551)
...에릭스도테르라는 말은 에리크의 딸이라는 말로 아부지가 에리크라는 소리죠-0-;;
레이욘후프푸드(제대로 읽은거 맞나-0-;;)라는 의미는 사자의 심장이라는 의미라고 하네요.
(이집안 시조쯤 되는 분이 그만큼 용맹했나봅니다...쿨럭..)
마르가레타는 스웨덴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인 레이욘후프푸드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에리크 아브라함스손였고 어머니는 구스타프1세의 친척인 에바 에릭스도테르 바사였습니다.(여기도 보니까 자식이름 뒤에 아부지 이름을 붙이는군요..ㅎㅎㅎ 정교회 전통인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면 바이킹 전통인듯합니다..ㅎㅎㅎ)
구스타프1세가 마르가레타와 결혼하려했을때, 마르가레타는 이미 약혼중이었는데 국왕은 그 약혼을 깨게 만들었죠. 마르가레타의 전 약혼자는 마르가레타의 형제였던 비르타와 결혼합니다.
마르가레타는 가정에 매우 헌신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스타프1세와 마르가레타의 결혼생활을 행복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녀는 신교도였던 남편과 달리 카톨릭이었고, 평생 신앙심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여행을 갔다 오던중 폐렴에 걸려서 사망합니다. 마르가레타가 죽은후 구스타프1세는 무척 상심했다고합니다.
구스타프1세와 마르가레타 사이에서는 모두 열명의 아이가 있었고 그 중 큰 아들과 막내아들은 각각 스웨덴의 요한3세와 칼9세가 됩니다.
..구스타프1세가 두번째부인이 죽어서 슬펐다는데.... 어쨌든 부인이 죽은 1년후에 재혼합니다. 그녀는 두번째 부인의 조카였습니다.
카타리나 스텐보크
Katarina Stenbock
(Torpa, Västergötland on 22 July 1535 - Strömsholm, Västmanland on 13 December 1621)
카타리나는 구스타프1세의 두번째 부인인 마르가레타의 여자 형제인 비르타와 마르가레타의 전 약혼자였던 구스타프 오로프스손 스텐보크의 딸이었습니다. 그녀 역시 국왕과 결혼하기 전에 약혼자가 있었는데 구스타프1세는 그 약혼을 깨고 카타리나와 결혼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카타리나는 국왕과 결혼하기전에 전 약혼자와 도망가려고 했고, 국왕과 결혼한 후에는 자신의 전 약혼자에 대해서 잠꼬대를 자주 했다고 합니다. 교회와 성직자들은 이 결혼에 반대했는데 그녀가 구스타프1세의 죽은 부인의 조카였기때문이었습니다.
카타리나와 구스타프1세의 결혼식때 스웨덴 전역에 걸쳐서 흑사병이 창궐했고, 결혼식날 도시 하나를 불태웠기에 사람들은 모두 불길한 징조라고 여겼다고 합니다. 게다가 카타리나가 왕비로 대관한후 궁전에 도착했을때 또다른 도시 하나가 불타는것이 궁전에서 보였기에 역시 불길한 징조라고 여겨졌다고 합니다.
카타리나와 구스타프1세와의 결혼은 불행했는데, 국왕은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이 결혼하는것"을 반대하는 법률을 만들려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결혼한 다음해 부터 구스타프1세는 아프기 시작했고, 카타리나는 남은 결혼생활 8년간을 남편 병간호하는데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구스타프1세가 죽은후 그녀는 61년간 과부로 지냈다고 합니다.
남편이 죽은후 유산을 상속받아 매우 부유한 생활을 햇던 카타리나는 스웨덴 국왕들에게 돈을 빌려주고는 했다고 합니다.
구스타프1세의 세 아들들이 스웨덴의 왕이 됩니다. 그중 첫번째 왕비의 아들은 에릭14세가 되었고, 두번째 왕비의 아들중 두명이 요한3세와 칼9세가 됩니다. 에릭14세는 스웨덴의 왕권을 강화하려했고 때문에 귀족들의 견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귀족을 억압했기에 결국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그 중심인물은 에릭14세의 동생이자 후에 스웨덴 국왕이 되는 요한3세였다고 합니다.
에릭 14세
에릭14세는 여동생인 엘리자베트 공주의 시녀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와 오랫기간 지내다가 정식결혼했습니다. (재미난것은 그 역시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와 혼담이 오간 사람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카린 맨스도테
Karin Månsdotter (In English Catherine, "Carin", "Karen", in Finnish:Kaarina Maununtytär),
(November 6, 1550–September 13, 1612)
카린은 평민출신으로 유일하게 왕비가 된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데시데리아 왕비는 남편이 왕위계승자로 선출되었을때 이미 Princess였습니다.) 카린의 아버지는 군인이었다가 간수가 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광장에서 야채장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에릭14세의 동생인 엘리자베트 공주의 시녀가 되었고, 이때 에릭 14세를 만났다고 합니다. 카린은 에릭14세의 정부가 되죠. 그후 에릭14세는 카린과 정식으로 결혼했고 그녀를 왕비로 선포합니다.
에릭14세는 귀족들에 의해서 유폐당했고, 성에 갇혀서 독살당했습니다. 왕위계승권문제 때문에 카린은 남편과 함께 있지 못했고, 아들인 구스타프는 폴란드의 수도원에 보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딸인 시리드와 함께 있는 것은 허락받았고, 그녀는 자신이 남편과 떨어져 유폐되었던 핀란드에서 남은 생을 보냈습니다.
비록 요한3세와 칼9세는 카린과 에릭14세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카린은 왕비로 인정받았으며, 이후 요한3세의 궁정을 방문했을때 시어머니인 카타리나 스텐보크와 동서인 카타리나 야겔로니카와 함께 "세명의 왕비"가 만났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또 후에 폴란드로 보내졌던 아들 구스타프를 만났지만, 그는 폴란드에서 성장해서 예수회 수사가 되었기에 스웨덴어를 전혀 못했고, 카린은 스웨덴어 이외의 말을 전혀 못했기에 둘은 만나서도 말한마디 나눌수 없었다고 합니다.
요한3세는 한번은 카톨릭교도와 한번은 신교도와 결혼습니다.
스웨덴의 요한3세
요한3세의 첫번째 부인은 폴란드 국왕의 딸이었습니다.
폴란드의 카타리나 야겔로니카
Catherine Jagiellon
(Polish: Katarzyna Jagiellonka; Finnish: Katariina Jagellonica; Swedish: Katarina Jagellonica av Polen)
(November 1, 1526 - September 16, 1583)
카타리나 야겔로니카는 폴란드의 국왕이었던 지그문트1세와 보나 스포르자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보나 스포르자는 밀라노 공작가문인 스포르자 가문 출신으로 고모인 비앙카는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1세의 두번째 부인었습니다.
카타리나는 구스타프1세의 두번째 아들인 요한과 결혼했는데, 요한의 형이었던 에릭14세는 둘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에릭14세는 동생이 외국 공주와 결혼해서 자신의 왕위를 빼앗는데 외국 세력을 등에 업을까봐 걱정해서였다고 합니다.
에릭14세가 동생 요한을 공격했을때, 카타리나는 에릭14세에게 붙잡힙니다. 당시 러시아의 짜르였던 이반은 그녀를 자신의 부인으로 러시아로 보내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러시아로 보내지기전 에릭14세는 권력을 잃었고 이덕분에 카타리나는 러시아로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0-;;;
카타리나는 카톨릭신자였고, 정치적인 면과 종교적인 면에서 남편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에릭14세와 카린 맨스도테의 아들인 구스타프를 폴란드 예수회로 보낸것도 카타리나였다고 합니다.
카타리나는 요한 3세와 사이에서 세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인 시기스문드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독실한 카톨릭으로 성장했고, 이것은 후에 시기스문드가 왕위를 이은후 문제가 됩니다. (스웨덴은 신교입니다.)
두번째 부인은 아주 아름다운 스웨덴 여성이었습니다.
구닐라 비엘케
Gunilla Bielke (1568 – 1597)
구닐라 요한스도테 비엘케는 요한3세의 사촌의 딸로, 궁정에서 어린시절 요한3세의 딸인 안나의 놀이친구로 함께 자랐고, 성장한후에는 왕비의 시녀가 되었습니다. 아름다웠던 그녀는 요한3세가 청혼하기전 이미 약혼자가 있었죠. 하지만 요한3세는 아버지 구스타프1세처럼 구닐라의 약혼을깨고 그녀와 결혼합니다.
요한3세가 청혼했을때, 구닐라는 그의 청혼을 거부했고 이에 요한3세는 열받아서 장갑으로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닐라의 가족은 국왕과 구닐라가 결혼하길 원했고 결국 가족에게 굴복한 구닐라는 국왕과 결혼합니다.
구닐라와 요한의 결혼식때, 요한의 형제들은 이 결혼을 귀천상혼으로 생각해서 국왕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하지만, 정작 요한과 그 형제들의 어머니 역시 구닐라와 같은 스웨덴 귀족출신이었습니다.-0-;;)
구닐라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성이었고, 요한3세는 그녀와 결혼한 이유가 그 아름다움때문이었습니다. 국왕은 왜 외국 왕녀와 결혼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자신은 아름다운 부인을 얻길 원했고, 선을 위해 보내오는 외국 왕녀들의 초상화는 믿을수 없기때문이다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헨리8세보다 현명하시군요..ㅎㅎㅎ)
구닐라는 남편인 요한3세에게 매우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남편의 첫번째 부인과는 반대로 그녀는 신교도였죠. 요한3세는 자신의 부인의 뜻에 따라 의견을 자주 바꾸기도 했다고 합니다.
구닐라의 아들인 요한은 후에 자신의 숙부인 칼9세가 형에게서 왕위를 뺏았을때, 신교도로 칼 9세를 지지했으며, 정당한 스웨덴 왕위계승자였지만 왕위에 뜻이 없었다고 합니다.^^*
요한3세의 아들인 시기스문트는 카톨릭으로 폴란드 왕도 겸하고 있었죠. 하지만 스웨덴은 그의 정책에 반발하면서 독립합니다.
시기스문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국왕으로는 지그문트3세 입니다.
그는 폴란드 공주였던 어머니를 통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국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폴란드와 스웨덴 국왕이며 카톨릭 교도라는 중요한 위치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과 결혼합니다. 그는 두번 결혼했는데 두 아내인 안나와 콘스탄스는 자매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스는 스웨덴 왕비로 대관하지는 못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안나
Anna of Austria, or Anna of Habsburg
(Polish:Anna Austriaczka,[1] Anna Habsburżanka, Anna Rakuszanka)
(Graz August 16, 1573 - Warsaw February 10, 1598 )
합스부르크의 안나는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카를2세와 그의 부인인 바이에른의 안나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조부모는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트1세와 그의 부인인 보헤미아의 안나 였습니다. 페르디난트1세는 카를5세의 동생으로 스페인의 펠리페2세의 숙부였죠. ^^* (카를5세는 할아버지를 통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제위를, 아버지를 통해서 당시 유럽에서 제일 부유한 지방이었던 부르고뉴 지방을, 어머니를 통해서는 스페인과 신대륙을 물려받았었습니다. 하지만 뭐 사건이 좀있은후, 스페인 왕위는 아들 펠리페2세에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위는 동생인 페르디난트1세에게 물려줬습니다.)
안나의 부모인 카를2세는 열다섯명의 아이를 낳았고, 안나의 형제들로는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트2세,스페인의 펠리페3세의 왕비가 되는 마르가레타 등이 있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귀족들은 안나를 시기스문드의 왕비로 반대했는데, 합스부르크가와의 연합을 원치 않아서 였습니다. (리투아니아쪽에 신교 귀족들이 많던가 그렇습니다.) 귀족들은 안나가 폴란드로 들어오는것을 막으려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안나는 폴란드 왕비와 스웨덴 왕비로 대관했습니다. 하지만 스웨덴에서 시어머니인 구닐라를 만났을때, 둘은 종교때문에 서로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안나와 시기스문드는 사랑에 빠져서 매우 행복한 부부였으며, 안나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예술에 매우 심취했기에 그녀를 반대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고합니다.
구스타프1세의 막내아들이자 쇠더만란드 공작인 칼은 조카인 시기스문드가 독실한 카톨릭 교도로 스웨덴에 역시 카톨릭 세력을 확장하려했을때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서 국왕(칼9세)이 됩니다. 하지만 그의 짧은 치세는 끊임없는 전쟁을 치뤄야했습니다. 폴란드는 물론 러시아와도 견제해야했으며,치세 마지막해에는 덴마크와도 전쟁을 했습니다. 칼9세는 덴마크와의 전쟁중 지병이 악화되어서 사망했으며, 그의 계승자는 겨우 17살이었던 아들 구스타프 아돌프였습니다. 그가 바로 구스타프2세 아돌프입니다.
칼9세
....칼9세는 사실 9세가 아니라고 합니다.
원래는 세번째 칼 국왕(칼3세)인데 어쩌다가보니 칼9세로 되었다고 하네요.
이후 순서는 맞습니다. 덕분에 현 스웨덴 국왕님이 칼16세 구스타프가 된거랍니다..아하하..
칼9세는 두번 결혼했는데, 첫번째 부인은 그가 왕위에 오르기전에 사망했기에 두번째 부인인 홀슈타인-고토로프의 크리스티나가 스웨덴 왕비가 됩니다
홀슈타인-고토로프의 크리스티나
Christina of Holstein-Gottorp
(13 April 1573 in Kiel – 8 December 1625 at Gripsholm Castle)
크리스티나는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인 아돌프와 그의 부인인 헤센의 크리스티네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크리스티나의 아버지인 아돌프는 덴마크의 프레데릭1세의 아들로, 형제들과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영지를 분할하면서 첫번째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이 됩니다. (후에 홀슈타인-고토로프는 북유럽의 왕가중 한가문으로 러시아의 표트르3세가 이 가문출신입니다. -어머니가 표트르 대제의 딸이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스웨덴의 왕가가 되기도 합니다.) 크리스티나의 어머니는 헤센의 마지막 란트그라프인 필리프1세의 딸이었습니다. 필리프1세는 네 아들에게 영지를 분할했고, 이후 헤센가문은 헤센-카셀과 헤센-다름슈타트 두가문이 분리됩니다. (...헤센가문좀 팠습니다.-0-;;;.)
크리스티나는 한때 시기스문드의 신부감으로 거론되었지만, 결국 시기스문드의 숙부인 쇠더만란드 공작 칼의 두번째부인이 됩니다. 칼과 크리스티나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는데 둘은 매우 비슷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크리스티나는 매우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궁정을 다스렸으며, 경제 관념 역시 철저했다고 합니다.
크리스티나는 남편이 국내에 있는 동안은 절대 정치적 의견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남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정치적 감각이 떨어지는것은 아니었고, 남편의 부재중에는 섭정으로 훌륭히 일했습니다.
아들인 구스타프2세 아돌프가 겨우 17살에 즉위하자, 크리스티나는 아들의 섭정이 되었고 이후 아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형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또 둘째아들인 쇠더만란드 공작의 섭정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칼9세의 아들이자 스웨덴의 "영광의 시대"를 이끌어낸 국왕이 바로 구스타프2세 아돌프입니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
그는 스웨덴에서 "대왕"으로 불립니다.
30년 전쟁중 뛰어난 장군으로 알려져있지만, 그는 내정에도 매우 뛰어난 국왕이었습니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스웨덴의 귀족가문 출신인 에바 브라헤와 결혼하길 원했지만, 그의 어머니인 크리스티나가 반대했다고 합니다. 크리스티나는 아들이 정략결혼을 하길 바랬다고 합니다. 결국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독일쪽 왕녀인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엘레노라와 결혼합니다.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엘레노라
Maria Eleonora of Brandenburg
(11 November 1599 – 28 March 1655)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엘레노라는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인 요한 지기스문트와 프로이센의 안나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 게을렀지만,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으며 자신은 루터파에서 칼뱅파로 개종했지만, 나머지 가족들에게는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리아 엘레노라의 부모는 정 반대의 성격으로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신교도 신부감을 원했는데, 마리아 엘레노라가 적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 지기스문트는 구스타프2세 아돌프를 마음에 들어했고 마리아 엘레노라 역시 젊은 스웨덴 국왕에 호감을 표시합니다. 하지만 마리아 엘레노라의 어머니인 안나는 이 스웨덴 국왕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죠.
마리아 엘레노라에게는 수많은 구혼자가 있었지만 마리아 엘레노라가 호감을 나타낸 인물은 구스타프2세 아돌프였죠. 마리아 엘레노라의 오빠인 게오르그 빌헬름 역시 이 결혼을 탐탁치 않아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구혼도중 마리아 엘레노라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결혼은 물건너 간것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마리아 엘레노라의 어머니인 안나는 구스타프2세 아돌프를 만나고 나서는 마음이 변했고, 아들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딸을 멀리 데리고 가서 결혼협상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마리아 엘레노라와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서로 같은 취미를 가지고 결혼초에는 매우 행복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스타프2세 아돌프의 경쟁자인 폴란드 국왕은 아들이 있었지만, 마리아 엘레노라는 아이를 유산하거나 사산하는등의 일이 일어났고, 또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늘 전장에 잇어서 언제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죠. 또 마리아 엘레노라는 스웨덴의 날씨와 생활에 적응을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이런 상황이 마리아 엘레노라를 극한으로 몰아가서 그녀는 다른 사람이 있을때도 기분이 나쁘면 남편에게 폭언을 서슴치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아이를 잃을때마다 더이상 아이를 못갖는것이 아닐까 불안에 떨었다고 합니다.
마리아 엘레노라가 다시 임신했을때 점성술사가 국왕에게 후계자인 아들이 태어날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합니다.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아들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태어났는데 처음에는 아들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딸이었죠. 아들을 바라는 남편의 마음을 알던 마리아 엘레노라는 자신의 딸때문에 거의 미칠지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딸을 낳은후 그녀는 매우 우울했으며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마리아 엘레노라에 대해서 아프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전사한후 마리아 엘레노라는 더욱더 침울해졌으며 너무나 사랑하고 멋졌던 남편에 대한 회상으로 늘 울었다고 합니다.
더하기1
오스트리아의 콘스탄체
Archduchess Constance of Austria
(Constance Renate of Habsburg, in German Konstanze Renate von Habsburg, Erzherzogin von Österreich, in Polish Konstancja Austriaczka or Konstancja Rakuszanka)
(December 24, 1588-July 10, 1631)
시기스문드의 두번째 부인으로 첫번째 부인인 안나의 동생입니다. 언니가 죽은후 형부와 결혼합니다. 콘스탄체는 매우 독실한 카톨릭 교도로 하루에 두번씩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언니와 달리 그녀는 정치에 관여했으며, 때로는 의회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고 합니다.
더하기2
칼9세는 국왕이 되기전 첫번째 부인을 잃었습니다.
팔츠-지메른의 마리아
Maria of Palatinate-Simmern,
(July 1561 in Heidelberg - 29 July 1589 in Eskilstuna)
팔츠-지메른의 마리아는 팔츠의 선제후인 루드비히6세와 그의 부인인 헤센의 엘리자베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칼9세의 두번째 부인인 크리스티나와는 이종사촌간입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지만 병약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남편의 성격과는 반대였으며, 남편에게 자주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녀는 늘 남편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여섯아이를 낳았는데 어른으로 성장한 아이는 딸인 크리스티나 밖에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는데, 부인을 잃은후 칼은 매우 상심했다고 합니다.
딸인 크리스티나는 후에 팔츠-츠바이브뤽켄의 요한 카시미르와 결혼했으며, 크리스티나의 아들인 카를 구스타프는 후에 스웨덴의 국왕이 됩니다.
더하기3
왕비는 아니지만 Queen인 크리스티나를 덧붙입니다.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
Christina
(Swedish: Kristina Augusta; 18 December [O.S. 8 December] 1626 – 19 April 1689),
later known as Christina Alexandra[1] and sometimes Countess Dohna
긴코에 검은 머리로 태어나서 아들인줄 알았댑니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구스타프2세 아돌프와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엘레노라의 딸이었습니다. 크리스티나가 태어났을때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더이상의 후계자를 기대하기 힘들었기에 크리스티나를 아들처럼 키웠죠.
아버지가 전사한후, 크리스티나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Queen이 아니라 King으로 즉위했다고 합니다.
크리스티나는 매우 총명했는데, 데카르트를 초빙해서 공부할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어린 여왕의 닥달에 데카르트는 새벽부터 가르치느라 몸살이 났고, 결국 일찍 사망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크리스티나는 귀족권력이 강한 스웨덴 정치에 곧 실증을 냈으며, 결국 개종하면서 스웨덴 왕위를 포기합니다. 여왕은 개종하기 전 의회와 타협을 해서 사촌인 팔츠-츠바이브뤽켄의 카를 구스타프를 왕위계승자로 결정한 상태였습니다.
개종후 크리스티나는 로마로 갔고 그곳에서 화려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루이14세의 궁정에 머물기도 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것은 크리스티나의 아버지인 구스타프2세 아돌프는 30년 전쟁에서 신교측에서 싸웠으며 그 역시 독실한 신교도였다는것입니다.^^*)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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