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예전에 빅토리아 여왕을 스토킹할때 그가계에 대해서 엄청나게 글을 많이 읽었었답니다. 빅토리아 여왕과 그 자손들에 대해서는 자료도 많이 남아있고 전기도 많아서 읽을거리가 엄청나게 많다죠.
제가 얼떨결에 찾은 자료중에 Prince eddy-the king we never had라는 BBC프로그램이 있었답니다. 전 위키에 인용되어있길래 드라마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다큐멘터리더라구요.
어쨌든 그때 이후 한동안 관심대상이셨었습니다. 그 다큐멘터리중 가장 인상깊었던멘트는 "에디는 죽음으로써 자신이 잊혀졌을뿐만아니라 자신의 좋은 평판도 잊혀졌다"라는것이었답니다. (....영어실력이 딸려서.....한 열번넘게 봤는데도 제대로 들은 말들이 많이 없었어요..ㅠ.ㅠ)
웨일즈의 앨버트 빅터 왕자
클라렌스와 애본데일 공작
Prince Albert Victor, Duke of Clarence and Avondale
(Albert Victor Christian Edward; 8 January 1864 – 14 January 1892)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손이자 에드워드7세의 큰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잊혀진 왕자였지만, 동생 조지5세가 즉위할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오 에디가 있었다면 더 좋은 왕이 될텐데.."라고 했다고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이자 왕위계승자였던 웨일즈공 에드워드와 그의 부인인 아름다운 덴마크의 공주 알렉산드라의 장남인 앨버트 빅터 왕자는 1864년 1월 8일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왕위계승서열2위였던 이 왕자는 2달이나 조산으로 태어났고, 모두들 건강하게 성장하기 어려울것으로 생각했다.
1864년 3월 10일 버킹엄궁전의 개인 예배당에서 세례식이 열렸고, 세례명은 앨버트 빅터 크리스찬 에드워드였다. 앨버트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이름에서, 빅터는 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에서, 크리스찬은 외할아버지인 덴마크의 크리스티앙9세의 이름에서따왔고, 마지막으로 에드워드는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고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인 켄트공작 에드워드의 이름에서 따론것이었다. 보통은 앨버트 빅터왕자로 알려져있었으나 가족들은 그를 에디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대부모들은 벨기에의 레오폴1세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외삼촌), 덴마크의 크리스티앙9세(외할아버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알렉산드리네(바덴의 알렉산드리네, 할아버지 알버트공의 형수), 프로이센의 왕태자비인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고모), 앨프러드 왕자(숙부),헤센-카셀의 변경백 빌헤름(어머니 알렉산드라의 외할아버지)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공작부인인 루이제 카롤리네(헤센-카셀의 루이제 카롤리네, 어머니의 할머니)였다.
에디의 부모
웨일즈공 앨버트 에드워드와 그의 부인인 웨일즈 공비 알렉산드라
에드워드7세는 아버지 이름을 따서 앨버트라는 이름이 들어갑니다. 애칭은 버티였죠.
이것은 후에 손자인 조지6세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만, 즉위할때는 조지6세로 즉위합니다.
에디의 아버지인 웨일즈공은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에게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그는 어머니의 궁전과 멀리 떨어진 말보러하우스에서 친구들과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에디가 6살이 될무렵 웨일즈공은 그의 수많은 정부들중 한명의 이혼소송에 증인으로 참석해야했고 이것은 그가 바람둥이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일중하나였다.(..에드워드7세의 정부들은 모두 유부녀였습니다.-0-;;;)
빅토리아 여왕은 이런 아들의 영향아래 성장하는 손자들을 걱정했고, 직접 손자들의 교육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에디와 에디의 동생인 조지는 여왕이 임명한 가정교사인 존 달튼 목사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존 달튼은 야망은 있는 인물이었지만 훌륭한 교사는 아니었다. 두 왕자를 위한 엄격한 교육 스케줄을 고안했고 왕자들에게 그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왕자들은 그를 거부했으며, 심지어는 기초교육조차 받으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달튼은 자신의 실패를 무마하기 위해서 에디의 지적능력과 인성 모두에 문제가 있다고 불평했다. 뿐만아니라 에디는 두달 일찍 태어난것때문에 학습능력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여겨졌고, 빅토리아 여왕의 개인비서인 폰슨비경은 에디가 그의 어머니 알렉산드라처럼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여겼다.
1875년의 에디
1877년 에디가 13살 조지가 12살이 되었을때 그들은 영국 해군 군함을타고 전 세계를 여행하며 공부하게 되었다. 둘은 해군 훈련을 받는 동시에 영국의 왕위계승자들로써 자신들이 통치할 지역들을 순방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여행에 달튼역시 동행했고, 두 왕자에게는 끔찍한 여행으로 남았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성공적 여행이었다. 왕자들은 태평양의 섬들과 극동아시아, 아프리카를 거쳐 지중해를 돌아봤고 미국에도 갔다. 이때 둘에게 매우 멘토 역할을 한 사람은 바텐베르크의 루드비히로 그역시 어린시절에 해군으로 험한 생활을 하면서 향수병에 걸렸었다. 이런 그를 견디게 해준것은 가족들의 사랑과 웨일즈공과 앨프러드왕자의 지지였다. 후에 에디의 사촌인 헤센의 빅토리아와 결혼한 루드비히는 평생 두 왕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교류를했다
1883년 두 왕자들은 헤어지게 된다. 에디는 교육을 위해 캠브리지 대학으로 간 반면, 조지는 계속 해군에 남아서 군생활을 계속했다. 에디는 대학교육을 받은 첫번째 왕자였다. 캠브리지에서 에디의 교사였던 한 사람은 에디의 첫인상에 대해서 그다지 좋지 않게 평가하고 있다. :'나는 왕자가 캠브리지에 가서 그다지 좋은 결과를 낼수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 그는 읽을때 단어의 뜻을 아는것조차 힘들어한다'
에디는 그와 비슷한 신분의 다른 학생들처럼 학자 타입은 아니었다. 그는 대학생활을 즐겼다. 그는 시험을 빼먹기도 했고, 예술가등과 다른 다양한 계층의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는 클럽에 가입해서 다른이들과 함께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으며 당시로는 혁신적인 생각이라고 할수있는 의견에 지지를 보내기도했다. 이중 대표적인예가 아일랜드 통일문제였는데,에디는 아일랜드의 자치를 강력하게 지지햇다.
당시 캠브리지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중심지였고 이러한 사회운동들 사이에는 '그리스식 사랑'을 표방하는것도 있었다. 에디의 친목모임 사람들은 오늘날 기준에서 보면 게이라고 불릴수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에디가 '그리스식사랑'으로 기쁨을 얻었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적어도 그가 원했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것이다.
1885년 21살이 된 에디는 이제 공적임무를 시작해야했다. 그는 제2왕위계승자였다. 에디는 아버지가 복무했던 화려한 군복의 제 10 경기병대에 합류했다. 그리고 군복을 입고 있지 않을때는 높은 칼라의 멋진 모습의 바람둥이가 되었다.
1880년대의 에디
1889년 그는 친한 관계였던 바텐베르크의 루이스공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16살된 자신의 사촌인 헤센의 알릭스 대공녀에게 빠져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나는 당신이 내가 알릭키를 얼마나 마음에 두고있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오. 나는 그녀에게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어떤 표시도하지 않고있소. 비록 마음속으로는 나는 그녀에게 그것을 말하길 열망하지만, 나는 내가 좀더 기다리는것이 좋다고 생각하오
바텐베르크의 루드비히와 그의 부인인 헤센의 빅토리아
루이스라는 이름으로 영국에서 살았던 루드비히는 에디와 조지와 무척이나 친분이 많았다고 합니다.
에디가 그에게 보낸편지는 에디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루드비히의 부인인 빅토리아는 에디의 사촌으로 에디의 고모인 앨리스의 딸이었죠.
그리고 알릭스의 언니입니다.^^*
에디가 어린 알릭스가 좀더 자라 청혼할 나이가 되길 기다리는동안, 그의 평생에 오점이 될 스캔들이 터졌다.
당시 전보배달소년들은 돈을 가지고 다니는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1889년 7월 어린 찰스 스윈코우가 18실링을 가지고 있는것이 발견되었을때, 경찰은 그를 도둑으로 생각했다. 결국 찰스는 그가 Fitzrovia에 있는 어떤 집에서 한 신사와함께 성관계를 가진후 받은 화대라고 실토했다. 곧 클리블랜드 스트리트 19번지는 남성매춘의 중심으로 밝혀졌다. 클리블랜드 스트리트 스캔들이라는 이 사건은 에디가 죽은후에도 오점으로 남았다.
경찰조사에서 19번지의 단골들중한명이 웨일즈공의 시종무관인 아서 서머셋 경이 있다는것을 밝혀냈다. 당시에는 어떤 동성연애 행위도 심각한 법죄로 간주되고 있었지만, 클리블랜드 스트리트의 귀족 고객에 대한 처벌은 사회계급 전복으로 연결될수도 있었다. 서머셋경의 교활한 변호사인 아서 뉴튼은 이것을 알아차렸고, 주류의 두려움을 이용했다. 그는 그의 고객이 자신보다 더 높은 어떤 이의 요금을 지불해야했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1889년 9월16일자로 한 평민 관리다 다음과 같은 메모를 적었다. :'나는 뉴튼이 만약 우리가 계속한다면, 매우 높은 사람들이 포함될것이다..PVA까지도...라고 자랑하는것을 들었다.' 그 이름은 절대로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PVA의 철자는 'Prince Albert Victor라고 쉽게 알아차릴수 있다. 하지만 현재 이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보여진다. 이것은 뉴튼이 그의 고객에 대한 압박을 피하기 위해 윤색한 이야기라는것이다.그리고 이것은 잘 작용했다. 이 스캔들의 부수적 사람들이"남색의 역겨운 행위와 과도한 외설적인 행위"에 대한 판결로 가벼운 형을 살았다. 그리고 서머셋의 체포는 명분이 없어졌다.
그해 10월 에디는 인도로 보내졌다. 많은 이들이 스캔들을 피해서 인도로 간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계획은 이미 봄부터 있었던 계획이었다. 하지만 스캔들을 피하기는 더없이 좋은 계획이기도 했다. 인도에서 에디는 한 기술자의 부인인 마거리 해든을 만났다. 후에 에디가 죽은후 마거리 해든은 자신의 아들인 클라렌스 해든이 에디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클라렌스 해든은 그 주장을 이어받았고 미국에서 책을 출판했으며 국왕(조지5세)에게 돈을 요구했다. 결국 재판이 벌어졌고 클라렌스 해든이 1887년 이전 출생이라는 증거문서들이 나왔다.
에디가 인도에서 돌아왔을때, 알릭키가 자신에게 냉담한 이유를 알았다. 알릭키의 마음에는 에디의 사촌인 러시아의 황태자 니콜라이가 있었기때문이었다. 그리고 알릭키는 에디를 거절하고 니콜라이를 받아들였고, 유명한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황후가 된다.
알릭스와 니콜라이
빅토리아 여왕은 외손녀 알릭스가 에디와 결혼하길 바랬다고 합니다만 알릭스는 그를 거절했죠.
대신 개종하는것때문에 사랑하지만 결혼하는것을 거부해왔던 니콜라이와 결혼합니다.
...참고로 니콜라이2세역시 에디의 사촌입니다. 니콜라이2세의 어머니인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는 덴마크 공주로 에디 어머니 알렉산드라의 동생이었죠.
점점 나이가 들수록 스캔들의 대상이 쉬워졌기에 서둘러 부인을 맞이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던 에디는 여러 공주들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중 가장 부적격인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프랑스 왕위계승요구자인 파리백작의 딸인 오를레앙의 엘렌이었다. 그녀는 카톨릭이었고, 영국의 왕위계승자는 카톨릭과 결혼해서는 안되었다. 게다가 프랑스 여성이었다. 프랑스 공주와 왕비가 된예는 찰스1세의 왕비였던 헨리에타 마리아가있었다. 그때 영국은 청교도 혁명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둘은 매우 사랑에 빠졌고, 빅토리아 여왕이 중재에 나서서 둘의 결혼을 의회에 설득하기로 했다. 하지만 엘렌의 아버지 파리백작은 그 결혼에 반대했다. 에디가 왕위를 포기할수있다는 말을 했는데도 거절했다. 엘렌은 교황에게 중재를 요청했지만, 교황역시 개종에 반대했고 결국 둘은 헤어질수 밖에 없었다.
엘렌 드 오를레앙
파리백작의 딸
후에 아오스타 공작부인
엘렌언니인 포르투갈 왕비만 키가 크신줄 알았는데 엘렌도 키가 컸다고 하네요.
그래서 역시 키컸던 에디와 잘 어울렸다는..........
후에 에디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엘렌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엘렌과 헤어진후 에디는 아름다운 시빌 얼스킨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그녀는 신분이 낮았다. 웨일즈공은 자신의 스캔들로도 머리가 아팠기에 에디가 결혼하지 않는다면 식민지로 보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자녀들에 대한 독점욕이 강했던 에디의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아들을 다시 멀리 떼어놓는다는것을 생각할수없었다. 때문에 적당한 여성을 찾기 시작했고, 얌전하고 완벽하게 우아한 테크의 메이를 찾아낸다. 에디의 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은 처음에 알릭키와의 결혼을 찬성했지만, 알릭키가 러시아로 시집가버리자,에디의 신부후보로 다른 손녀인 프로이센의 마르가레테(모시)를 추천한다. 하지만 에디와 모시는 서로 관심이 없었다. 그후 메이가 신부 후보로 이야기되자 그녀의 이상적 모습-아름답고 예의바르며 온순하며 강한 책임감을 가진 모습에 강하게 찬성한다.
테크의 메이
후에 조지5세의 왕비인 메리 왕비
...그러고보니 메리 왕비도 첫번째 이름이 빅토리아군요....--;;;;
에디와의 약혼사진에 보면 테크의 빅토리아로 적혀있습니다.
(.....에디가 죽은후 어머니 알렉산드라에게 보내진 사진이었는데 그래서 에디의 이름앞에 the last가붙더군요)
에디는 다른 이들의 말에 순응했으며, 1891년의 약혼발표때도 그랬다. 1892년 1월 그는 바텐베르크의 루이스공에게 메이와 사랑에 빠져서하는 결혼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내가 약혼한 모습을 본 당신이 놀랐는지 궁금하오. 내가 진정 당신에게 말할수 있는것은 나도 갑작스럽게 결정한것이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모두에게 최선인것같소.그리고 내가 결혼해야한다면, 지금이 그 시기인것같소.어쨌든,적어도 지금은 정착할때이오.
에디와 메이의 결혼식은 1892년 2월에 열릴예정이었다. 약혼후 둘은 크리스마스때 런던에서 쇼핑을 하고 극장을 다니면서 보냈고, 많은 사람들이 둘을 환영했다.
메이와 결혼후 에디는 아일랜드 총독으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그가 대학때 했던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아일랜드는 자치를 얻는 방향으로 갈수 있을터였다. 하지만 28번째 생일이 지난 얼마후 에디는 아프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 전역을 휩쓸던 독감에 감염된것이었다. 사람들은 아픈 왕자의 소식을 보기위해 말보러 하우스의 공보관으로 몰려갔다. 에디는 계속 열이 났고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92년 1월 14일 에디의 죽음은 검은띠를 두른 영국 신문들에 의해서 발표되었고, 런던 전역에서 종이 울렸다.
영국은 큰 충격에 빠졌다.특히 웨일즈공의 모습은 사람들을 당황시키기조차했다. 불성실한 남편이었던 웨일즈공은 아들의 죽음에 너무나큰충격에 빠졌고 죽은 아들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에게 '제목숨을 기꺼이 그애에게 줄수도 있습니다'라고 적어보낸다. 에디의 약혼녀였던 메이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슬퍼하는 웨일즈 공비의 모습은 제가 봤던 가장 가슴아픈 모습이셨습니다.'라고 적어보내고있다. 다정다감했으며 아이들에게 독점욕을 보였던 에디의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장남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녀는 매일 죽은 아들의 방으로 가서 침대곁에 꽃을 꽂아놓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에디를 잊었다. 에디의 모든것은 동생 조지가 물려받았다. 에디의 약혼녀였던 메이는 조지와 결혼했으며, 조지는 1911년 조지5세로 영국왕으로 즉위했다.그리고 빅토리아 여왕이 생각했던대로 왕실에 강한 책임감을 가진 테크의 메이는 메리 왕비로 조지5세의 곁을 지켰고, 왕가가 힘들때 버팀목이되었다.
조지5세와 메리 왕비
에디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많은 이야기들을 남겼다. 에디가 죽은것이 독감이 아니라 매독이나 또는 독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그가 죽은것이 아니라 랜돌프 처칠경이 음모를 꾸며서 왕위계승자를 바꾼것으로,에디는 죽지 않았고 웨이트섬의 정신병원이나 그래미스 성에 갇혀있다는 이야기가 1930년대까지 퍼졌다
에디는 사람들에게 거의 잊혀져갔다. 특히나 불안한 정세속에서 왕가를 지키려고 발버둥쳤던 조지5세와 메리 왕비의 노력은 그를 사람들에게서 더욱더 잊혀지게 만들었다. 아버지 에드워드7세의 사생활에 치를 떨며 왕가의 건전한 모습만을 보일려고 했던 조지5세에게는 클리블랜드 스트리트의 오명을 가진 형은 당연 부담스러운존재였을것이다.
에디가 사람들의 기억속에 돌아온것은 악명때문이었다. 1970년대 한 아마추어 범죄학자는 빅토리아 시대의 유명한 살인마이자 살인마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잭더리퍼'가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인 웨일즈의 앨버트 빅터왕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매우 근거가 희박했고, 잭더리퍼가 활개치고다닐때 에디는 런던에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에디에 대한 이름을 미치광이와 동일시 하기 시작했다. 그 몇년후 BBC의 한 다큐멘터리는 더욱더 큰 충격적 이야기를 다루고있다. 에디가 살인자는 아니지만 살인의 원인이라는것이었다. 에디는 클리블랜드 스트리트에서 만난 한 카톨릭 소녀를 사랑하게되었고 둘은 비밀리에 결혼했다는것이었다. 그리고 둘의 딸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나왔다. 잭더리퍼는 광폭한 살인마가 아니라 왕자의 비밀을 감추려는 왕실사람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헐리우드 영화가 바로 From Hell(2001)로 조니뎁이 주연을 맡았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윈저가는 조지5세가 많이 만든것이다. 아마도 조지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의 난봉꾼질적 행위가 야기시켰던 모든것에 대항하는 행위로, 조지는 왕실이 스캔들의 냄새조차 없지만 인간성이 너무나 적은 건전한 영국 왕실로 만들려고 유지했다. 만약 에디가 왕이 되었다면 그는 영국 대중들에게 좀더 자연스럽게 다가갔을수도 있다.
웨일즈의 가족들
에드워드7세와 알렉산드라 왕비 그리고 다섯자녀들
맨앞이 에디이고 딸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있는 여성이 어머니 알렉산드라입니다.
참고로 사진상으로는 딸들만큼 젊어보이십니다....
(...당시 뽀샵질을 믿을수 없긴하지만...뭐 저때까지는 나름 변치않는 아름다움이셨을껍니다.)
자료출처
1.위키피디어
2.channel4 : The monarchs we never had :Prince Albert Victor
http://www.channel4.com/history/microsites/H/history/e-h/eddy6.html
그림출처
위키피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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