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

'유럽의 할머니'빅토리아 여왕의 손주들...1.큰딸 빅토리아의 자녀들

엘아라 2008. 12. 23. 09:37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ㅎㅎㅎ 글쓰기 싫어서 예전에 삭제했던 글을 은근슬쩍 올립니다....ㅎㅎㅎ

(뭐하러 삭제한건지..쿨럭..)

 

 

그래서 유럽의 할머니라고 불린 빅토리아여왕의 손자 손녀들에 대해 다뤄볼까 합니다.

자녀들이 모두 9명으나 루이즈공주는 자녀가 없었으니 8편이 되겠군요.

 

 

 

"유럽의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

Queen Victoia of England

 (Alexandrina Victoria; 24 May 1819 – 22 January 1901)

다이아몬드 쥬빌리의 공식 사진

 

빅토리아 여왕의 자녀들중 자녀들이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았던(....딸중 하나는 결혼했으나 결혼 무효로 선언 되었습니다.) 헬레나 공주와 자녀가 없었던 루이즈 공주를 제외한 7명의 자녀들의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왕족과 결혼했고 그중에는 통치자나 그의 부인이 된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빅토리아 여왕이 유럽의 할머니라는 칭호를 얻었죠.

 

 

 

빅토리아 여왕과 남편인 알버트공

 

빅토리아 여왕과 남편인 알버트공의 첫번째 아이는 빅토리아 아델라이드 메리 루이즈로 어머니와 같은 이름인 빅토리아로 불렸으며 가족들 사이에서는 애칭으로 빅키라고 불렸습니다. 빅키는 독일의 프리드리히3세와 결혼해서 독일의 황후가 되죠.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공은 첫번째 아이가 딸인것이 실망했지만 빅키는 알버트공이 가장 사랑한 자녀였다고 합니다. 매우 총명했으며 아버지의 정치적 사상을 가장 잘 이해했던 빅키는 프로이센의 왕태자의 아들인 프리드리히(애칭 프리츠)와 결혼합니다. 비록 정치적 목적도 있었지만 빅키와 프리츠는 매우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영국인이라는 의식이 강했던 빅키는 프로이센에서 그리 인기있는 존재는 아니게 됩니다. 게다가 자유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정치적 신념이 강했던 빅키를 시부모는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억압합니다.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독일의 황후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 공의 큰딸

The Princess Victoria, Princess Royal

(Victoria Adelaide Mary Louise) (21 November 1840 – 5 August 1901)

이 그림은 빈터할터의 그림으로 버킹엄 궁에 아직도 걸려있다고 합니다.

 

 

 

빅키의 남편 프리츠

독일의 프리드리히3세

Frederick III ( October 18, 1831 – June 15, 1888)

(Frederick William Nicholas Charles, German: Friedrich Wilhelm Nikolaus Karl)

 

 

 

빅키는 모두 4남4녀를 낳았습니다.

 

 큰아들은 빌헤름으로 후에 독일의 황제인 빌헤름2세가 됩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어린 빌헤름2세

 

 

빌헤름2세와 그의 황후인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빌헤름2세

William II or Wilhelm II  (27 January 1859–4 June 1941)

 ( Prince Frederick William Victor Albert of Prussia; German: Prinz Friedrich Wilhelm Viktor Albert von Preußen)

 

 

빅키의 큰아들은 독일의 빌헤름2세로 세례명은 프리드리히 빌헤름 알버트 빅토르 였고 애칭은 빌리였습니다. 빌헤름2세가 태어날때 그는 어머니 뱃속에서 위치가 뒤집혀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머리가 아래쪽으로 된 일반적 태아 자세가 아니라 머리가 위쪽으로 되어있는 자세였죠. 난산끝에 태어난 그는 위치때문에 어깨와 팔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에 대해 어머니 빅키는 매우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한쪽 팔이 더 짧아졌지만 그는 운동으로 장애를 극복했다고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첫번째 손자였던 그는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자유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있던 부모보다 조부모(빌헤름1세와 아우구스타 황후)의영향력 아래 자라난 그는 부모와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고합니다. 빌헤름2세는 이종 사촌인 헤센의 엘리자베트 대공녀(애칭엘라)를 사랑했지만 그의 청혼에 엘라는 자신은 황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빅토리아 아우구스타와 결혼했습니다.1차대전이 끝난후 그는 퇴위를 했고 네덜란드로 망명했습니다. 빌헤름2세는나치가 독일을 구하거나 황실에 도움이 될것이라고  생각 하지 않았고 자신의 장례식이 나치 선전용으로 쓰일것을 우려해서 독일에 묻히는것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빅키의 큰딸은 샤를로테로 애칭은 샬리였고 무척이나 아름다운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성격은...ㅎㅎㅎ) 그녀는 후에 작센-마이닝겐의 공작부인이 됩니다.

 

 

샤를로테

작센-마이닝겐의 공작부인

Princess Charlotte of Prussia (24 July 1860 - October 1919)

(Victoria Elisabeth Augusta Charlotte)

Duchess of Saxe-Meiningen

 

 

 

샤를로테의 남편

작센-마이닝겐의 베르나르트공

작센-마이닝겐의 마지막 공작

Bernhard III Frederick Wilhelm Albrecht Georg,( 1 April 1851 -  16 January 1928)

 Duke of Saxe-Meiningen

 

 

빅키의 큰딸은 샤를로테로 세례명은 빅토리아 엘리자베트 아우구스타 샤를로트로였습니다. 그녀는 어린시절 부모 보다는 조부모를 더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오빠인 빌헤름2세와 더욱더 가까운 사이였다고 합니다. 샤를로트는 작센-마이닝겐의 베르나르트와 결혼했습니다. 둘의 사이에 페오도라라는 딸이 태어납니다만 샤를로트는 베른린에서 사회적 삶을 위해 가족 생활을 등한시 합니다. 그녀는 건강이 않좋은 자신의 딸을 돌보지 않고 시녀나 하인들 또는 어머니인 빅키에게 맡겨두었다고 합니다. 페오도라는 조지3세로부터 물려받은 포르피린증이라는 유전병때문에 건강이 안좋았고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조지왕의 광기..라는 영화가 있죠.--;;;)

 

 

둘째아들은 하인리히왕자입니다. 그는 형을 도와 1차대전에 독일해군으로 복무했고 독일이 전쟁에서 진뒤에는 극우독일민족주의자가 됩니다. 

 

 

 

하인리히

Prince Heinrich of Prussia (August 14, 1862 – April 20, 1929)

(born  Albert Wilhelm Heinrich)

 

 

 

헤센의 이레네, 하인리히의 부인

이레네와 하인리히는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들이죠.

Princess Irene of Hesse and by Rhine  (11 July 1866 – 11 November 1953)

(Irene Luise Marie Anna)

 

 

빅키의 둘째아들은 하인리히로 세례명은 알버트 빅토르 하인리히입니다. 그는 독일 해군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이종사촌이자 헤센의 대공녀였던 이레네와 결혼했습니다.(이레네는 독일 통일 전쟁이었던 오스트리아-프로이센간의 전쟁이 끝날무렵 태어나서 평화라는 이름으로 이레네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헤센은 오스트리아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1차대전 직전 그는 사촌인 영국의 조지5세에게 전쟁에 참여할것인지 의중을 물었고 조지5세의 모호한 대답에 그는 조지5세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것이라 판단해서 형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1차대전이 후 그 역시 망명했습니다. 그는 아주 극단주의적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는데 독일에서도 그의 주장은 위험한것으로 간주되었고 결국 그는 은퇴해서 시골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의 주장은 나치의 주장과 매우 비슷합니다.--;;; )

 

셋째아들은 지기문트로 어린나이에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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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문트

Prince Sigismund of Prussia  (September 15, 1864–June 18, 1866)

(Franz Friedrich Sigismund)

 

 빅키의 셋째아들은 지기문트로 세례명은 프란츠 프리드리히 지기문트였습니다. 빅키는 아기인 그가 위의 세아이들보다 총명했기에 매우 훌륭하게 자랄것이라 기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기문트는 21개월때 수막염으로 사망했습니다

 

둘째딸은 어머니의 이름과 같은 빅토리아로 애칭은 모레타였습니다. 

 

 

빅토리아, 샤움부르크-리페 공비

Princess Viktoria of Prussia  (April 12, 1866 – November 13, 1929)

(Frederica Amalia Wilhelmine Viktoria)

 

 

빅키의 둘째딸은 빅토리아로 세례명은 프레더리카 아말리아 빌헤미나 빅토리아고 애칭은 모레타였습니다. 빅토리아는 언니 샤를로테와는 달리 밑의 두동생들인 조피와 마르가리타와 함께 부모를 무척이나 따랐고 영국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모레타는 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이 계획한 혼처인 불가리아의 알렉산더공(바텐베르크의 알렉산더로 불가리아의 통치자로 선출되었습니다.)과의 결혼을 매우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바텐베르크가에 대한 빅토리아 여왕의 영향력(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자 모레타의 올케였던 이레네 왕자비의 언니인 헤센의 빅토리아는 알렉산더의 형인 루드비히와 결혼했으며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인 베아트리스는 알렉산더의 동생인 하인리히 모리츠와 결혼했습니다)이 불가리아에 영향을 줄것을 우려한 비스마르크의 반대에 따라 할아버지인 빌헤름1세와 오빠인 빌리는 그 결혼을 반대합니다. 어머니인 빅키는 빅토리아 여왕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만 아버지인 프리츠는 중립적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공이 퇴위한후에도 모레타는 그와 결혼하길 원했으나 알렉산더는 헤센 극장의 배우와 귀천상혼합니다. 이 일은 모레타에게 충격적인 일로 한동안 우울증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모레타는 샤움부르크-리페의 아돌프 공과 결혼했습니다. 남편이 죽을때까지 자녀가 없었죠. 1차대전이 끝난후 그녀는 러시아 망명객이었던 35살 어린 평민과 결혼해서 오빠인 빌헤름2세에게 충격을 줬다고 합니다.

 

빅키의 넷째아들은 발데마르로 세례명은 요하임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발데마르였습니다. 그는 부모가 가장 좋아한 자녀였다고 합니다.그는 매우 다정하고 성실하며 독립심이 강한 훌륭한 성품이었다고합니다.게다가 무척이나 재미있는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동물들을 매우 사랑했는데 한번은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을 방문했을때 할머니의 방에 애완용 악어를 풀어서 늙은 여왕이 기겁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머니를 무척 따랐고 빅키 역시 다른 아이들보다 그를 매우 편애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모인 앨리스 대공비와 그녀의 딸인 메이 대공녀가 디프테리아로 사망한지 4개월후 역시 같은 병으로 사망합니다.

 

Prince Waldemar of Prussia (Joachim Friedrich Ernst Waldemar)

(February 10, 1868–March 27, 1879) 

 

셋째딸은 조피로 후에 그리스의 소피아 왕비가 됩니다.

 

 

 

조피 ,그리스의 소피아 왕비

Princess Sophie of Prussia (June 14, 1870 – January 13, 1932)

(Sophie Dorothea Ulrike Alice)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1세

Constantine I, King of the Hellenes ( 2 August 1868 - 11 January 1923)

 (Greek: Κωνσταντίνος A', Βασιλεύς των Ελλήνων)

 

 

빅키의 셋째딸은 조피로 세례명은 조피 도르테아 울리케 알리체였고 애칭은 소씨였습니다. 조피역시 언니 모레타와 마찬가지로 부모를 무척이나 따랐고 영국식으로 교육받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오빠인 빌헤름2세와는 무척이나 사이가 안좋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1세와 결혼해서 소피아 왕비가 됩니다. 콘스탄티노스1세는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1세(덴마크의 크리스티앙9세의 아들)과 올가 왕비(러시아의 니콜라이1세의 손녀인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의 아들입니다. 오빠와 무척이나 사이가 좋지 않았고 영국식으로 교육을 받은 그녀는 독일에 헌신하기 보다는 자신의 조국이된 그리스를 더 생각해지만 독일인이었고 독일 황제의 동생이라는 이유때문에 1차대전때 남편인 콘스탄티노스1세에게 친 독일성향의 영향을 끼쳤다고 많은 그리스 인들이 믿었습니다. 콘스탄티노스1세는 두번이나 퇴위해서 망명해야했으며 그녀도 같이 망명생활을 했고 두번째 망명이후 그리스로 돌아갈수 없었습니다. 소피아 왕비의 세아들인 게오르기오스,알렉산드로스,파울로스는 모두 그리스의 왕이 되었고 딸인 헬렌은 루마니아의 왕비가 욉니다.

 

 

.막내딸은 마르가레테로 애칭은 모씨였습니다. 그녀는 헤센-카셀의 공비가 됩니다.

 

 

 

마르가렛테, 헤센-카셀의 백작부인이자 공비

Princess Margarete of Prussia  (April 22, 1872 - January 22, 1954)

(Margarete Beatrice Feodora)

 

 

 

모씨의 남편인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카를

Frederick Charles Louis Constantine,(May 1, 1868 – May 28, 1940, Kassel), 

Prince and Landgrave of Hesse-Kassel

Friedrich Karl Ludwig Konstantin Prinz und Landgraf von Hessen-Kassel

 

빅키의 막내딸은 마르가렛테로 세례명은 마르가렛테 베아트리체 페오도라고 애칭은 모씨였습니다. 모씨 역시 위의 세언니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름 따랐고 영국식으로 교육받았다고 합니다. 모씨는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카를공과 결혼했습니다. 모씨의 첫째아들과 둘째아들은 1차대전중 전사했고 나머지 세아들들은 모두 친 나치주의자였으며 막내아들역시 2차대전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합니다 

 

 

 

 

노년의 빅키

 

자료&사진 출처

몽땅 위키 피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