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공의 큰아들인 알버트 에드워드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영국의 에드워드7세가 됩니다. 그가 태어났을때 여왕과 알버트공은 제1왕위계승자가 태어난것에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버티라는 애칭의 그는 제1왕위계승자로 부모의 엄청난 기대에 중압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누나인 빅키보다 총명하지 못했기에 부모의 실망은 더했다고 합니다. 그결과 부모의 기대와는 엇나간 아들이 되어버렸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말이 떠오르는군요.)
버티의 스캔들때문에 아픈몸으로 안좋은 날씨에 아들을 만나러갔던 알버트공은 병이 악화되어 사망합니다. 이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은 아들 버티를 미워해서 평생 정치에 참여햐는데 훼방을 놓았고 때문에 버티는 정치와 무관한 인생을 즐기게(??)됩니다. 많은 정부들과 스캔들이 있었고 덕분에 빅토리아 여왕은 아들을 더 싫어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었죠.
영국의 에드워드7세
King Edward VII of the United Kingdom
(Albert Edward; 9 November 1841 – 6 May 1910)
에드워드7세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앙9세의 딸인 알렉산드라 공주와 결혼했습니다. 알렉산드라는 당시 유럽 최고의 미녀라는 평가를 들었죠. 이 결혼이 크리스티앙9세의 후손과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이 결혼한 첫번째였죠. 이결혼으로 에드워드7세는 유럽의 uncle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합니다.--;;; 이결혼을 제안한것이 알버트공이었기에 알버트공이 죽은후에도 빅토리아여왕은 남편의 뜻에 따라 알렉산드라와의 결혼을 승락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라와 에드워드7세의 결혼식
이런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어도 에드워드7세는 정부를 두었습니다. 사실 에드워드7세의 정부들을 보면 에드워드7세가 재치있고 영리한 여성을 좋아한 모습을 보이는데 알렉산드라 왕비의 성품은 약간은 지루한면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불행한 결혼생활때문인지 알렉산드라 왕비는 아이들에 대해 매우 독점욕이 강했고 딸들을 곁에 두고 살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딸들의 결혼에 시큰둥해했고 둘째딸인 빅토리아 알렉산드라는 결국 미혼인채 살죠. 버티는 이런 부인에게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자식들에 대해 강한주장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영국의 알렉산드라 왕비
Alexandra of Denmark
(Alexandra Carolina Marie Charlotte Louise Julia; 1 December 1844 – 20 November 1925)
에드워드7세와 알렉산드라왕비 사이에서는 모두 3남3녀가 태어납니다.
에드워드7세와 알렉산드라 그리고 그 자녀들
에드워드7세의 큰아들은 알버트 빅토르로 세례명은 알버트 빅토르 크리스티앙 에드워드였고 애칭은 에디였습니다. 그는 달수를 다 못채우고 태어났다고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가장 사랑한 손자중에 한명이었던 그는 연년생이던 동생 조지와 함께 전세계를 돌면서 영국의 식민지를 순례합니다. 그후에 동생 조지는 해군에 남았지만 그는 대학에 들어갑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났던 그는 답답한 왕실보다 좀더 자유주의적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에디가 첫번째로 사랑한 여자는 고모 앨리스의 딸이던 헤센의 알릭스 대공녀였습니다. 알릭스의 형부이자 자신의 멘토였던 바텐베르크의 루드비히에게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하고 있죠. 하지만 스캔들때문에 인도에 가있던 사이 알릭스는 러시아의 황태자와 약혼해버리죠. 다음 신부 후보로는 오를레앙가의 엘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프랑스인이었는데다가 카톨릭이었기에 환영받지 못했고 결국 헬렌이 카톨릭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결혼은 무산되었습니다. 잠시 시빌 얼스킨과의 만남이 있었지만 왕비로는 적당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평가때문에 포기했죠. 결국 빅토리아 여왕이 좋아하던 여왕의 오촌 조카인 테크의 메이 공녀(테크의빅토리아 메리,테크공작인 프란시스와 캠브리지의 메리 아델라이드-애칭 팻메리-의 딸)와 약혼합니다. 둘은 정략적으로 약혼했지만 불행한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약혼후 얼마되지 않아 에디는 인플루엔자로 사망합니다. 그는 죽기직전 엘렌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가 죽었을때 어머니 알렉산드라의 슬픔은 이해했지만 버티역시 큰 슬픔에 빠져 아들의 관옆을 떠나지 않은것에 사람들이 놀라워했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몇가지 루머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잭더리퍼에 관한 이야기였죠. 하지만 몇몇증거를 통해 그가 잭더리퍼라는것은 아니라고 인정이 됩니다. 또 그에게 사생아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답니다. 에디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Prince Eddy-the king We never been had'에 보면 이런 문구가 나오죠. "에디는 죽음으로써 자신이 잊혀졌을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좋은 평가도 잊혀졌다'
알버트 빅터 왕자, 클라렌스와 애본데일 공작
Prince Albert Victor, Duke of Clarence and Avondale
(Albert Victor Christian Edward; 8 January 1864 – 14 January 1892)
그의 아버지는 그가 죽을때가지 왕이 아니었기에
그는 프린스오브 웨일즈가 아니라 클라렌스 공작이었습니다
에드워드7세의 둘째아들은 조지입니다. 세례명은 조지 프레드릭 에른스트 앨버트였습니다. 조지는 형인 에디와 연년생이었죠. 형과 세계 여러곳을 항해한후, 대학에 간 형 에디와는 달리 그는 평생 해군으로 복무합니다. 복무중 그는 역시 해군으로 평생을 복무한 숙부인 에든버러 공작 앨프러드와 친했으며 몰타에 있는 그의 집에서 자주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앨프러드의 큰딸인 마리(애칭 미시)가 있었죠. 어린시절부터 미시를 보아왔던 조지는 아름답게 성장한 미시와 결혼하길 원했습니다.하지만 두 어머니들의 격렬한 반대에 결혼을 포기해야했죠. 형이 죽은후 형의 약혼녀였던 테크의 메이와 결혼합니다. 둘은 매우 사랑하는 사이였고 조지는 아버지와 달리 정부없이 아내에게만 헌신했다고 합니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독일황제와 러시아 황제 둘다와 친척관계였던 그는 결국 러시아와함께 독일에 선전포고하죠. 그리고 1차대전동안 독일에 대한 악감정때문에 가문의 성을 독일성이 아니라 윈저로 바꾸고 영국내에 살던 많은 친척들에게 독일 왕족칭호를 포기하도록하죠. 조지5세와 메리 왕비는 엄격한 부모였고 왕실존속을 위해 모든것을 희생하면서 살았습니다. 실제로 20세기초 격변속에서도 영국왕실이 유시될수 있었던것은 메리 왕비와 그녀의 며느리였던 엘리자베스 왕비의 노력이 컸죠.
(개인적으로는 참 좋아하는 왕족입니다. 둘은 왕족의 의무를 위해 많은것을 포기하고 희생했고 몰락한 친척들을 위해 자신들이 할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영국왕실 존속이 우선이었던 그들에게는 한계가 있었다고 생각한답니다.그 한계때문에 친척들한테서는 욕먹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안좋은 인상을 주는 분들이랍니다. )
영국의 조지5세
King George V of the United Kingdom
(George Frederick Ernest Albert; 3 June 1865 – 20 January 1936)
영국의 메리 왕비
Mary of Teck, Queen Mary of the United Kingdom
(Victoria Mary Augusta Louise Olga Pauline Claudine Agnes; 26 May 1867 – 24 March 1953)
메리 왕비는 애칭이 메이였지만 공식적으로는 빅토리아 메리로 불렸던듯합니다.
조지의 형인 에디와의 약혼사진에 보면 Princess Victoria로 표기되어있죠.
메리왕비와 조지5세
조지5세와 러시아의 니콜라이2세
둘은 이종사촌관계로 조지의 어머니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이의 어머니 마리야 황태후는 자매간이죠.
좀더 대머리틱한 머리가 니콜라이2세이니 왼쪽이 니콜라이2세 오른쪽이 조지5세입니다.
메리 왕비와 두 손녀, 엘리자베트와 마거릿
현 영국여왕님이랑 그 동생분이시죠.
메리 왕비는 손녀인 엘리자베트를 끔찍히 사랑했다고 합니다.
여왕님의 어머님이신 엘리자베트 왕비역시 시부모의 사랑받는 며느리였다고합니다.
에드워드7세의 큰딸은 루이즈입니다. 세례명은 루이즈 빅토리아 알렉산드라 다르그마입니다. 루이즈 공주와 그녀의 자매들은 부모와함께 샌드링엄에서 오랜시간동안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녀들은 빅토리아 여왕들의 딸들과는 달리 매우 교육을 많이 받은편은 아니라고 합니다. 딸들을 곁에서 떠나보내는것을 싫어하긴 했지만 공주들의 첫번째 의무는 결혼하는것이라고 믿었던 빅토리아 여왕과는 달리 알렉산드라는 딸들을 모두 곁에 두고 싶어했습니다. 루이즈는 어머니에게 얽매여있는 삶으로 도망치기위해 남편을 찾죠. 하지만 딸들이 멀리 떠나는것을 싫어했고 독일 왕족들과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 어머니때문에 괜찮은 결혼상대를 물색하기 힘들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중 한명인 파이프 백작인 알렉산더 더프와 결혼하길 바랍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루이즈의 남편감인 알렉산더 더프에 대해 버티의 친구들중 유일한 괜찮은 사람이라며 허락했다고 합니다. 루이즈와 결혼후 알렉산더 더프는 파이프 공작이 되었습니다. 루이즈와 파이프 공작 사이에는 두명의 딸이 있었는데 루이즈는 공적 생활보다는 가족생활을 더즐기며 조용히 지냈다고 합니다.(그렇기에 후에 사람들은 그녀의 고모인 루이즈 공주와 그녀에 대해 헷갈려했다고 하네요)
프린세스 로열 루이즈 , 파이프 공작부인
The Princess Louise, Princess Royal and Duchess of Fife
(Louise Victoria Alexandra Dagmar; 20 February 1867 – 4 January 1931)
루이즈공주의 남편인 파이프 공작 알렉산더 더프
Alexander William George Duff, 1st Duke of Fife
(10 November 1849–12 January 1912)
에드워드7세의 둘째딸은 빅토리아입니다. 수많은 빅토리아 공주들에게서 구분하기 위해 빅토리아 알렉산드라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죠. 세례명은 빅토리아 알렉산드라 올가 메리이고 애칭은 토리아입니다. 토리아는 오빠인 조지5세와 매우 친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어머니 알렉산드라와 평생 같이 지냈는데 언니와 같은 이유로 결혼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미혼인채로 늙었는데 그녀가 결혼하지 못한것은 결국 어머니 알렉산드라의 독점욕때문이었죠. 어머니 알렉산드라가 죽은 1925년 이후에야 그녀는 자신의 집을 마련해서 혼자 살아갈수 있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알렉산드라)
The Princess Victoria
(Victoria Alexandra Olga Mary; 6 July 1868 – 3 December 1935)
어머니 알렉산드라와 함께있는 빅토리아
에드워드7세의 셋째딸은 모드입니다. 세례명은 모드 샤를로트 메리 빅토리아입니다. 그녀 역시 어머니아래서 30살이 되도록 미혼인채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중 덴마크의 가족모임에서 만나던 외사촌인 덴마크의 칼 왕자와 결혼하게 됩니다. 자신보다 3살이나 아래였던 칼 왕자에 대해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칼왕자의 청혼을 승락했다고 합니다. 어머니 알렉산드라도 자신의 조카와 딸이 결혼하는것에는 반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혼후 덴마크에서 살았지만 시어머니인 루이세 왕태자비와는 그리 친밀한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노르웨이가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모드의 남편인 덴마크의 칼 왕자를 왕으로 선출합니다. 국민투표로 왕위에 오르는것을 인정받은 칼 왕자는 노르웨이식왕명인 호콘7세라는 왕명을 선택한후 칼이라는 이름을 다시는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드는 남편을 따라 노르웨이에 갔지만 건강상태때문에 자주 영국으로 돌아오곤했다고합니다.둘의 아이는 노르웨이의 국왕이 되는 올라프가 있습니다.
웨일즈의 모드, 노르웨이의 모드 왕비
Princess Maud of Wales,Queen Maud of Norway
(Maud Charlotte Mary Victoria; 26 November 1869 – 20 November 1938)
덴마크의 칼, 후에 노르웨이의 호콘7세
Haakon VII
( Christian Frederik Carl Georg Valdemar Axel) (August 3, 1872 – September 21, 1957)
대관식때의 호콘7세와 모드 왕비
에드워드7세의 셋째아들은 존입니다. 그는 조산으로 태어났는데 태어난 다음날 사망하죠. 알렉산드라 왕비는 이를 잊지 않았는데 후에 손자인 존(간질을 앓던 조니, the lost prince의 주인공)왕자가 죽은후 이 존 왕자 옆에 묻혔는데 그때 아들인 조지5세에게 '우리의 사랑드러운 조니들이 나란히 누워있구나'라고 했다고 합니다.(당시 알렉산드라는 약간 치매기가 있으셔서 자꾸 깜빡깜빡했다고 합니다.)
웨일즈의 존
Prince Alexander John Charles Albert of Wales
(6 April 1871 - 7 April 1871)
자료&사진출처
위키피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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