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

'유럽의 할머니'빅토리아 여왕의 손주들...4.둘째아들 앨프러드의 자녀들

엘아라 2008. 12. 29. 14:50

빅토리아여왕의 둘째아들이자 넷째아들은 앨프러드입니다. 애칭은 애피였죠.그는 어릴때부터 해군에 매혹되었고 해군제독이 됩니다. 그는 해군으로 세계 여러나라를 돌아다녔죠. 그는 수많은 영국 식민지들을 방문한 첫 왕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했을때는 한 아일랜드인이 암살기도를 시도하죠.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오스트레일리아에 반 아일랜드 감정이 일어났으며 앨프러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암살기도범은 처형당했습니다.

그리스국민들은 오톤국왕을 몰아내고 바이에른가문을 거부한후, 강대국의 힘의 균형을 실감했죠. 그들은 이익을 얻을수 있는 강대국이었던 영국의 왕자인 앨프러드는 왕으로 원합니다. 하지만 여러가지 문제에 말려드는것을 우려한 빅토리아 여왕은 그 계획에 반대하죠.

앨프러드는 러시아의 알렉산드르2세의 고명딸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과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둘의 결혼생활은 매우 불행했습니다. 러시아황제의 딸이자 러시아 여대공이었던 마리는 자신이 차남과 결혼했기때문에 고작 덴마크 왕의 딸인 알렉산드라에게 우선권이 있는것을 참을수 없어했죠. 게다가 오빠들사이에서 자라나서 연약한 미인이라기 보다는 톰보이같은 여성이었고 매우 교육을 많이 받았던 마리보다는 약간 백치미가 흐르는 아름다운 알렉산드라가 더 환영받는 영국의 분위기에도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마리의 이상형처럼 보였던 잘생긴 해군인 앨프러드는 좀더 정치적이고 지적재치를 원하는 마리의 이상형은 되지 못했죠.

 

앨프러드는 백부가 사망한후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령을 이어받습니다. 이때 그의 형인 버티는 외국의 통치령을 이어받는다면 영국의 왕위계승권리를 포기해야한다고 주장하죠. 결국 그는 영국의 왕위계승권리를 포기합니다.( 애피가 죽은 후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령이 코넛공작가로 돌아갔을때 코넛공작과 그의 아들은 영국의 왕위계승권리를 위해 공작령을 포기합니다.)

마리는 영국을 끔찍해 했기 때문에 독일 공작이되는데 적극적으로 찬성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코부르크에서는 그녀가 가장 높은 지위의 여성이었으니 더 바랄나위도 없구요.

 

앨프러드는 빅토리아 여왕이 죽기 직전에 사망합니다.

 

 

 

 

 

앨프러드,에든버러공작,후에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작

The Prince Alfred,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Alfred Ernest Albert; 6 August 1844 – 30 July 1900)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에든버러의 공작부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Grand Duchess Maria Alexandrovna of Russia

 Duchess of Edinburgh and Duchess of Saxe-Coburg and Gotha

 (17 October 1853 – 24 October 1920)

 

 

 

둘은 모두 1남 4녀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과 함께있는 에든버러가 사람들

여왕 왼쪽에 마리 공작부인이 보이고 그 앞쪽 세명이 그녀의 딸들입니다.

여왕의 오른쪽에 앉은 여성은 독일의 황후 빅키,

마리 옆의 여성은 빅키의 딸 빅토리아(애칭모레타)그옆은 여왕의 막내딸 베아트리스

 


 

애피의 큰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이름의 앨프러드입니다. 세례명은 앨프러드 알렉산더 윌리엄 어니스트 앨버트로 애칭은 아버지를 따라 영애피였습니다.  아버지 앨프러드가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작이 되자 그는 공작의 후계자로 독일로 보내어져서 교육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부모의 은혼식날 자살기도를 했습니다. 그의 자살 기도 원인에 대해서는 몇몇 이야기가 있는데 한 여성과 귀천상혼을 했는데 그의 부모가 허락하지 않아서 좌절감에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그가 매독으로 인한 우울증에 빠졌다고 합니다. 1899년에 매독으로 인한 다양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살기도에서 바로 죽지는 않았지만 그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프러드공

Hereditary Prince Alfred of Saxe-Coburg and Gotha

(Alfred Alexander William Ernest Albert; 15 October 1874 – 6 February 1899)

 

 

앨프러드의 첫째딸은 마리입니다. 세례명은 마리 알렉산드라 빅토리아로 애칭은 미시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애피의 첫째딸이 자신의 이름을 물려받길 원했지만 공작부인은 마리가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의 이름을 받길원했다고 합니다. 해군으로 몰타에 오랜기간 머물렀던 에든버러가 사람들은 역시 해군이었던 웨일즈의 조지 (후에 조지5세)와 친했습니다. 미시보다 약 10살가량 많았던 조지는 미시가 어릴때부터 눈여겨봐왔죠. 미시는 눈부시게 아름답게 자랐고 조지는 미시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미시 역시 어릴때부터 자신에게 다정했던 조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구요. 조지가 미시와 결혼하고 싶어한다고 밝혔을때 두 아버지들인 버티와 애피는 적극적으로 찬성했습니다만 두 어머니들인 알렉산드라와 마리는 결사반대했습니다.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조지가 에든버러 공주와 결혼하는것을 반대했고 마리는 (왕이 되지 못하는 차남인)영국왕자와 결혼하는것을 반대했죠. 그리고 공작부인은 딸을 왕비로 만들만한 혼처를 구합니다. 그가 바로 루마니아의 왕태자였던 페르디난드(애칭난도)였습니다. 정략결혼이었던 이 결혼은 전체적으로는 불행한 결혼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시는 루마니아에서 자신의 새조국에 헌신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죠. 그래서 불행했지만 남편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미시의 말년도 그리 편한것은 아니었습니다. 미시의 아들인 카롤은 여러스캔들끝에 부인인 그리스의 헬레나와 별거한후 파리로 망명해서 정부와 살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고 아들 미하이가 왕이고 인기없는 동생 니콜라에가 섭정이 되자 루마니아로 되돌아 옵니다. 그는 카롤2세로 즉위하고 부인과 이혼하죠. 미시는 그런 아들과 싸웠으나 소용이 없었죠. (어머니와 떨어지게된 미하이는 아버지를 무척이나 싫어했다고 합니다. 망명한 후에는 아버지를 만나는것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에든버러의 마리, 루마니아의 왕비

Princess Marie of Edinburgh ,Queen of Romania;

(Marie Alexandra Victoria;  29 October 1875 – 18 July 1938)

 

 

 

 


루마니아의 페르디난드1세

Ferdinand I of Romania

( Ferdinand Victor Albert Meinrad of Hohenzollern ,August 24, 1865 – July 20, 1927)

 

 


 

 

앨프러드의 둘째딸은 빅토리아 멜리타입니다. 애칭은 더키였죠. 더키는  고종사촌인 에르니와 결혼하라는 압력을 받습니다. 이것은 빅토리아 여왕의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둘은 서로에 대해서 연애감정이 없었고 더키는 자신의 러시아 사촌인 키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죠. 사촌간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 러시아 정교회의 관례와  또 문란한 사생활이 일상적이었던 로마노프가의 남자들에 대한 우려로 더키의 어머니는 둘의 결혼을 허락할수 없다는것을 밝힙니다. 결국 에르니와 결혼을 하지만  둘의 결혼생활은 불행했죠. 에르니는 더키와 자신의 딸인 엘리자베트에 열성을 다했고 더키에 대해서는 더키가 불평할 정도로 애정을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둘은 멀어졌고 거친 싸움이 오갔다고 합니다.(더키는 에르니에게 고함을 쳤고 차 트레이드를 집어던지곤했다고합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둘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죠. 결국 빅토리아 여왕의 사망후에야 둘은 이혼을 할수 있었습니다. 둘의 이혼에 대한 스캔들은 온 유럽에 퍼졌으며 니콜라이2세와 그 어머니 마리야 황태후간의 편지에는 차라리 죽는것이 이혼보다 낫다고 할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에르니는 둘이 계속 살았다면 자신이 더키를 죽이거나 더키가 자신을 미치게 만들거나 했을꺼라고 했습니다.누나 빅토리아도 둘이 이혼하는것이 둘을 위해 좋은 결정이었다고 말합니다.

 이혼후 딸과 6개월씩살던 더키는 딸 엘리자베트가 장티푸스로 사망합니다. 장례식동안 더키는 딸을 잃은 충격에 히스테릭한 행동들을 했다고합니다. 딸이 죽은후 더키는 오래전부터 알았던 러시아쪽 사촌인 키릴 대공과 재혼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니콜라이2세는 둘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죠. 키릴 대공은 러일전쟁당시 함대 공격에서 겨우 살아남았고 더키가 있던곳으로 가서 그곳에서 결혼합니다. 허락없이 결혼했기에 키릴대공과 더키는 망명생활을 해야했습니다만 얼마후 키릴대공은 다시 러시아로 돌아갈수 있었고 황제는 둘의 결혼을 승인합니다. 더키 역시 빅토리아 표도르브나 대공비가 됩니다. 그리고 마리야와 키라 두 딸이 태어납니다만 후계자가 될 아들을 간절히 기다리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더키와 키릴은 핀란드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바라던 아들 블라디미르가 태어났습니다.핀란드에서 더키는 매우 궁핍하게 살았는데 사촌인 스웨덴의 마거릿 왕태자비에게 블라디미르에게 먹일 아이 음식을 달라는 편지를 보낼정도였습니다. 가족은 더키의 친정인 코부르크로 갑니다. 코부르크에서 빅토리아는 나치를 지지했고 나치정당에 돈을 기부했다고 합니다. 니콜라이2세의 죽음이 확실해지자 키릴은 자신을 러시아의 황제로 선포하고 더키는 이를 지지하고 남편을 위해 열성을 다하죠. 하지만 헌신을 다한 남편이 부정을 저지르고 있었다는것에 충격을 받았고 그를 결코 용서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1936년 2월 더키는 쓰러졌고 가족들이 더키곁으로 왔습니다. 언니 마리가 왔을때는 매우 기뻐했지만 남편 키릴이 그녀를 만지자 진저리쳤다고 합니다.

 

 

 

 

빅토리아 멜리타, 한때 헤센의 대공비였으며, 러시아의 빅토리아 표도르브나 대공비

Princess Victoria Melita of Edinburgh and Saxe-Coburg and Gotha
Grand Duchess of Hesse (1894-1901) and Grand Duchess Viktoria Feodorovna of Russia.

(Victoria Melita; 25 November 1876 – 2 March 1936)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Grand Duke Cyril Vladimirovich of Russia,

(Kirill Vladimirovich Romanov) (October 12, 1876 (N.S.)–October 12, 1938)

러시아의 알렉산드르2세의 셋째아들이자 러시아의 알렉산드르3세의 첫번째 동생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그의 부인인 마리야 파블로브나(미헨)대공비의 아들

(사진은 키릴과 더키 그리고 첫딸인 마리야)

 

 

 

 

 

에른스트 루드비히, 헤센의 대공

Ernest Loudwig, Duke of Hesse

( Ernst Ludwig Karl Albert Wilhelm), (25 November 1868-9 October 1937)

 

 

 

빅토리아여왕과 더키 그리고 딸 헤센의 엘리자베트 대공녀

(맨 왼쪽과 맨오른쪽 여자는 둘다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들인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제니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헬레나 빅토리아입니다. 남자아이는 에나의 동생인 바텐베르크의 모리츠)


 

 

앨프러드의 셋째딸은 알렉산드라입니다. 세례명은 알렉산드라 루이즈 올가 빅토리아로 애칭은 산드라였습니다.

그녀는 호엔로에-랑겐부르크의 에른스트와 결혼했습니다. 에른스트는  빅토리아 여왕의 이부언니인 페오도라의 손자입니다. 산드라는 매우 가까운 관계였던 두언니들 사이를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어머니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고 때문에 어머니의 보석을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에른스트는 독일의 외교관으로 일했는데 16살의 산드라를 처음본후 반해서 청혼을 했다고 합니다. 18살에 결혼한 산드라는 남편이 전쟁에 참여할때까지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만 남편이 전쟁에 나가있는동안 젊은 의사와 연애사건을 일으켰고 이를 안 어머니 마리 공작부인의 헤어지라는 말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산드라 역시 다른 많은 독일 왕족들처럼 나치당에 가입했다고합니다. 이분이 앨리스 왕자비의 큰딸인 마르가리타의 시어머니시죠.

 

 

 

 

 

알렉산드라, 후에 호엔로에-랑겐부르크 공비

Princess Alexandra of Edinburgh and Saxe-Coburg-Gotha

(Alexandra Louise Olga Victoria; 1 September 1878 – 16 April 1942)

(평온한 삶을 사셔서 그런지 자료가 많이 없군요.)

딸과 함께

 

 

 

 

 에른스트

호엔로에-랑겐부르크 공

Ernest ,Princes of Hohenlohe-Langenburg

Ernest William Frederick Charles  (1863-1950)

알렉산드라와 함께 

 

 

 

 

앨프러드의 막내딸은 베아트리스입니다. 세례명은 베아트리스 레오폴딘 빅토리아로 애칭은 베이비비였습니다. 베아트리스는 외사촌인 러시아의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는 니콜라이2세의 동생이었죠. 비록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사촌들간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황제의 허락이 있다면 결혼할수는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니콜라이2세는 둘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죠.  이에 대해서 베이비비의 언니인 더키는 매우 화를 냈다고 합니다. 베이비비는 스페인의 알폰소 13세와 결혼할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알폰소 13세가 결혼한 사람은 베이비비의 사촌인 에나였습니다. 에나의 결혼식때 베아트리스는 알폰소13세의 사촌인 5대 갈리에라 공작인 알폰소 드 부르봉은 만납니다. 둘의 결혼계획에 대해 스페인 왕실에서는 반대를 했고 결국 둘은 스페인을 떠나 코부르크에서 망명생활을 했습니다.

스페인 왕실의 허락으로 스페인으로 갔습니다. 그녀는 국왕인 알폰소 13세와 가까운 친구사이가 되죠.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알폰소 13세는 많은 연애사건을 일으켰고 사생아들이 태어났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죠. 이런 왕과의 우정은 스캔들이 되기 쉬웠습니다. 국왕의 어머니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왕비는 베이비비를 왕궁으로 불러서 스페인을 떠나라고 했지만 베이비비는 거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죠.(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내가 뭐 잘못한것이 있어서 헛소문때문에 떠나냐..이런 생각이었던듯합니다.) 결국 영국으로 가야했습니다.

시간이 지난후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오는것을 허락받았지만 이미 내전의 시기였습니다. 결국 국왕과 그 가족은 망명생활을 했고 베이비비는 가족 영지에서 지낼수는 있었지만 전쟁시기동안 재산을 잃었으며 둘째아들역시 전쟁중 사망합니다.

 

 


 

 

베아트리스, 갈리에라 공작부인

Princess Beatrice of Edinburgh and Saxe-Coburg-Gotha

(Beatrice Leopoldine Victoria; 20 April 1884 – 13 July 1966)

 

 


 

 

알폰소, 5대 갈리에라 공작

Alfonso de Orleans y Borbón, Infante of Spain, Duke of Galliera

(November 12, 1886 – August 6, 1975)

베아트리스와 함께

 

 

 

 

 

 

에든버러의 네 자매들

왼쪽에서 베이비비, 더키,산드라,미시

 

그림&자료출처

위키피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