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써놨던 글인데 손을좀 봐서 올립니다.
제가 공주님들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두권의 책인데 바로 소설 '데지레'와 '캐서린 스윈포드'였습니다 덕분에 스웨덴 왕가에 무척이나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고, 또 한동안 랭카스터공작이야기에 심취했었답니다.때문에 영국 역사에 대해서도 쬐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그때 생각했던 글입니다
유럽에서 남성왕위계승자만을 인정하는 살리카법이 통용되지 곳은 주로 영국과 스페인입니다.(나머지는 여성의 왕위계승권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만.....러시아 같은 경우는 여계로 이어진적도 있으니...)
중세 유럽에서 살리카법이 인정되지 않는다는것은 곧 변방 국가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더군요.
영국이나 스페인 모두 유럽의 변방국가였죠. 영국은 아직 개척되지 않은곳이고 스페인은 이슬람 세력이 중세까지도 남아있던 곳이었기 때문이죠.
어쨌든 영국역사에서 몇몇 왕위계승자는 어머니의 권리를 통해서 왕으로 즉위합니다. 그리고 여왕도 있죠. 그래서 그 여성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합니다.(여기서 영국은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합니다. 스코틀랜드나 다른지방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요. 예전에 읽었던 책에는 잘 나와있던데..영어책이다보니 자세히 안 읽었거든요..)
영국이라는 나라는 고대에 몇몇 나라들로 나누어져있던곳이 합쳐져서 형성된 나라입니다.
잉글랜드라고 불리는 곳을 토대로 웨일즈,스코틀랜드 가 차례로 병합되었고 아일랜드는 영국의 지배를 인정했으나 언제나 영국에서 독립하려고 한곳이었습니다.(영국 입장에서 아일랜드는 언제나 통치하기 곤란한곳이었죠.....)
영국이 역사에 알려진것은 유명한 율리우스 가이사르에 의해서입니다. 유럽의 캘트족을 평정하고 게르만족을 저지했던 그는 브리타니아를 정복하려고 갔습니다만 실패하죠.^^;;; 하지만 로마에 이런 섬이 존재한다는것이 알려지게 되었죠. 그리고 로마가 제정시대로 들어간후 로마에 복속됩니다.
(어느황제때였는지는...--;;;로마사를 별로 안좋아하여...아하하..)
하지만 로마에서 최변방 지역이었던 영국지역은 로마가 붕괴하기 시작하자 통치력이 미치지지 못하게 되죠.
...고대사를 잘 모르는 관계로 생략하고.....
영국의 초기 왕조는 왕국이라기 보다는 큰 부족의 부족장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종족들도 여러종족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정복왕 윌리엄이 나오기전 덴마크 정착민의 세력이 강했습니다.(이부분에 대해서는 햄릿에 대해 잠시 언급이 있죠.^^)
잘 모르는 부분인지라 그냥 대충 건너뛰고......
영국의 왕실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 시작으로 헨리2세를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가 미약했던 영국왕권을 강화시키고 그의 자손들이 현 영국왕가의 선조가 되기때문이죠.
헨리2세는 영국의 왕위계승권을 그의 어머니였던 마틸다를 통해서 확보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첫번째 여성은 바로 마틸다입니다.
그녀는 정복왕 윌리엄1세의 아들이었던 헨리1세의 딸입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스코틀랜드의 공주였던 Edith(에디뜨)입니다. 에디뜨는 헨리1세와 결혼후 이름을 노르만식으로 마틸다(영어식으로는 모드군요...모드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온거로군요..음..)로 고칩니다.(윌리엄1세가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작이었기에 궁정에서는 노르만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 헨리1세의 적자는 마틸다와 그녀의 남동생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오빠는 왕위계승전에 사망하게 됩니다. 헨리1세는 자신의 딸이 왕위계승권을 가지길 원했습니다만 그녀의 사촌이자 헨리1세의 조카였던 스티븐이 왕위계승을 주장하면서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Empress Matilda (February, 1101 — September 10, 1167; Saxon form Maud or Maude)
영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이었던 헨리1세와 스코틀랜드 공주였던 마틸다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7살이 되었을때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5세의 아내로 내정되고 1110년 신성로마제국으로 보내져서 그곳에서 황후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하인리히5세와 1114년 결혼을 합니다. 그녀는 1116년 로마와 투스카니를 방문했고 남편 부재시에 통치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인리히5세와의 사이에 살아남은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23살이 되던 1125년 그녀의 남편인 하인리히5세는 사망합니다.
남편이 죽었을때 마틸다의 남동생은 이미 사망한 뒤여서 그녀는 영국의 왕위계승자중 하나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헨리1세는 그녀가 합법적 왕위계승자라는것을 인정받기위해 무척이나 얘썼다고 합니다.
남편이 죽은후 마틸다는 왕국을 계승하기위해 영국으로 돌아왔고 1127년 그녀는 자신보다 7살이나 어린 앙주의 고프리(제프리인가?? Geoffrey)와 재혼합니다.(Geoffrey의 별명이 Plantagenet이었다고 하네요...아하하..) 결혼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결혼후 바로 아버지가 있는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1131년 다시 남편곁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세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버지가 죽은후 자신의 왕위계승을 주장하면서 영국에서 전쟁을 했습니다. 마틸다와 스티븐의 내전은 마틸다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만 queen이 아닌 'the lady of England'로 머물렀고, 귀족들의 반발로 결국 왕위에 오르지 못한채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그리고 영국의 왕위는 스티븐에게 다시 돌아갔죠. 마틸다는 왕위계승에서 멀어진듯 했으나 그녀의 아들이었던 헨리는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그리고 스티븐의 통치에도 문제가 있어보였죠. 결정적으로 1153년 스티븐의 아들이 죽은후 헨리는 스티븐의 계승자로 인정받습니다.
하지만 노년에 마틸다는 아들들의 다툼을 지켜봐야겠습니다. 그리고 "The lady of England"이긴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 외국인같았죠. 그녀는 독일어,프랑스어,라틴어로만 말했다고 합니다.( 어릴때 영국을 떠났고 또 늘 프랑스에서 살았으니 그럴만도 한듯...)
그녀가 죽은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있다는군요.
"여기 헨리의 딸이자 아내이자 어머니가 묻혀있다" (아버지 헨리1세,남편 하인리히5세-영어로 헨리-, 아들 헨리2세)
마틸다과 그의 아들 헨리2세
이렇게 어머니를 통해 영국 왕가를 계승한 헨리2세는 프랑스의 전 왕비이자 아퀴텐의 상속녀였던 엘레노어 드 아퀴텐과 결혼하죠.(결혼하기 전에 그는 단지 앙주백작이었을뿐이긴 합니다만 엘레노어는 수도승 같은 남편 루이7세보다 열정적이었던 헨리를 더 좋아했죠..단 이 열정적 성격때문에 늙어서는 둘이 치열하게 전쟁을 했다는...쿨럭 ) 헨리2세가 상속받은 영지는 영국과 노르망디(어머니를 통해서),앙주(아버지를 통해서),아퀴텐(아내를 통해서) 로 프랑스 왕보다도 더큰 영지를 가진 신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중세에 프랑스내에서 영국왕의 위치가 애매했죠^^
이렇게 성립된 플랜태지넛 왕조는 프랑스 왕은 골칫거리였죠. 영국의 왕은 프랑스내의 최대 영지를 가진 신하였으니(왕보다 더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죠) 어떻게든 영지를 되찾는 문제가 불거지게되죠. 하여튼 이런 저런 사정으로 결국 백년전쟁이 일어나게 되죠. 하지만 이 백년전쟁은 영국내 사회도 재편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하여튼 플랜태지넛 왕조도 지속되다가 장미전쟁무렵 요크가와 랭카스터가문으로 나뉘게 됩니다.
이 장미전쟁을 종식시키고 튜더 왕조를 성립한 왕이 헨리7세입니다.
헨리7세 역시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를 통해서 왕위계승권을 받게 됩니다.
(보퍼트 가문은 랭카스터 공작 존오브콘트와 그의 오랜 정부이자 마지막 아내였던 캐서린 스윈포드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로 부터 시작한 가문으로 랭카스터 가문의 왕이 집권할때 왕가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됩니다...게다가 캐서린 스윈포드의 외손녀인 시슬리 네빌은 요크가의 왕인 에드워드4세와 리처드3세의 어머니가 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두번째 여인은 바로 마거릿 보퍼트입니다.
Lady Margaret Beaufort (May 31, 1443 — June 29, 1509)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는 랭카스터공작 존오브콘트의 후손으로 랭카스터 왕가와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랭카스터 가문의 왕이었던 헨리 4세의 이복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가문 사람들은 헨리4세,헨리5세,헨리6세때 모두 핵심 권력을 가진 신하였죠. 헨리6세가 아직 후계자가 없을때 마거릿은 그녀의 왕위계승권때문에 헨리6세의 이부동생인 에드문드 튜더와 결혼합니다.(에드문드 튜더는 리치몬드백작 오웬 튜더의 아들로 헨리6세의 어머니였던 프랑스 공주 카트린느가 재혼해서 낳은 아들이었죠. 자신의 동생이지만 왕위계승권과 먼 헨리 튜더를 왕위계승권에 가깝게 하기 위해 헨리6세는 마거릿과 헨리를 결혼시키죠.) 그리고 이 결혼을 통해서 헨리7세가 되는 헨리 튜더가 태어납니다.(14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마거릿은 자신의 아들이 중요한 인물임을 파악하고 할아버지이름을 따서 짓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왕들의 이름인 헨리라는 이름을 선택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헨리 튜더가 태어났을때 마거릿은 이미 과부였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장미전쟁 초기에 이미 사망했죠. 마거릿은 자신의 아들과 재산을 지키기위해 두번더 재혼을 합니다. 첫번째 재혼상대는 버킹엄공작의 아들이었던 헨리 스탯포드였고 두번째 재혼상대는 요크가의 신임을 받던 신하인 토마스 스탠리였습니다. 이 두번의 결혼으로 마거릿은 아들과 재산을 지킬수 있었고, 대영주로써 아들을 위해 재산과 영향력을 사용할수 있었습니다. 마거릿은 자신의 사촌의 아들이자 역시 어머니를 통해 왕위계승권을 생각하던 2대 버킹엄 공작 헨리 스탯포드를 설득해서 자신의 아들을 지지하는 반란을 일으키도록 획책했습니다. 하지만 그 반란은 실패했고, 버킹엄 공작은 처형당했으며 마거릿은 사권박탈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리처드3세는 마거릿을 느슨하게 감시했고,마거릿은 다시 아들을 위해 요크가의 공주였던 엘리자베스(에드워드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녀)와 아들의 결혼을 성사시켰죠. 그리고 마거릿의 아들 헨리는 리처드3세와의 전투에서 승리해서 왕위계승권을 획득했으며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므로써 이후 왕위계승자들을 위한 권리마저 확보하게 됩니다.
아들에게 엄청나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마거릿은 비록 왕의 모후를 의미하는 queen mother칭호를 얻지는 못했지만 the king's mother로써 굉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실제적인 왕의 모후 역할을 해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수있었다고 합니다.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리치몬드와 더비의 백작부인
(첫번째 남편 에드문드 튜더가 리치몬드 백작이었고, 마지막 남편 토마스 스탠리가 더비의 백작이었습니다. 토마스 스탠리가 더비의 백작이 된건 순전히 마거릿 보퍼트가 부인이었기때문이죠.)
마가렛 보퍼트의 아들인 헨리 튜더(헨리7세)
손에 들고있는것은 랭카스터가의 상징인 붉은 장미입니다.
마거릿 보퍼트의 아들은 헨리7세로 왕에 오르게 되고 튜더 왕조가 성립되죠. 튜더왕가는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했을뿐만 아니라 후의 후계자들의 왕위계승권을 위해 요크가의 왕위계승권을 가진 여성과 결혼해서 성립된 왕가 되죠. 이 튜더왕가에 요크가의 왕위계승권을 준 사람이 바로 에드워드4세의 딸인 엘리자베스입니다.
이 이야기의 세번째 여성은 바로 요크의 엘리자베스입니다.
Elizabeth of York (11 February 1466 – 11 February 1503)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4세와 그의 부인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원래 랭커스터가문의 가신인 그로비의 존 그레이경과 결혼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남편이 장미전쟁중 사망한후 요크가의 왕이 되는 에드워드4세와 결혼하죠. 둘의 결혼은 비밀결혼이었기에 사람들중에는 둘의 결혼이 합법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에드워드4세의 동생인 리처드였죠. 결국 에드워드4세가 죽은후 에드워드4세의 두 아들은 런던탑에서 사라졌고, 리처드가 그뒤를 이어 왕이 됩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딸들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성역권으로 도망갔죠. 이후 리처드는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그 딸들을 성역권에서 나오게한후,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왕비가 아닌 그냥 귀족부인으로 대우하면서 감금했습니다. 반면 왕의 딸들이었던 조카들에게는 괜찮은 대우를 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궁정에서는 리처드3세가 아픈 부인을 독살하고 조카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할꺼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때문에 헨리 튜더가 영국 진격을 서두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헨리 튜더가 승리한후, 마거릿 보퍼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간의 협상대로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헨리 튜더와 결혼해서 왕권을 강화합니다.
경건했던 마거릿 보퍼트는 왕비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싫어해서 궁정에서 은퇴하도록 압력을 넣습니다. 그리고 왕의 어머니로 수많은 특권을 누리죠. 반면 엘리자베스는 시어머니의 그늘에 가려진 삶을살았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막내인 캐서린 튜더를 낳은 직후 사망했습니다.
요크의 엘리자베스
헨리7세의 왕비
손에 들고있는것은 요크가의 상징인 흰장미입니다.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아들인 헨리8세
..너무나 유명한 분이시죠.
헨리7세의 아들인 헨리8세는 아들을 얻기위해 수장령까지 공표하면서 이혼을 했죠. 그렇게 얻은 아들이 바로 에드워드6세였습니다만 어린나이에 즉위했던 에드워드6세는 건강이 좋지 않았죠. 후손없이 사망할 가능성이 있자 에드워드6세는 누나인 메리가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것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메리는 열성적인 카톨릭 교도였기에 신교도를 박해할 가능성이 있었죠. 때문에 주변 신하들이 자신의 누나 메리가 아니라 사촌의 딸인 제인 그레이를 여왕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거의 묵인해줍니다. 하지만 제인 그레이는 정통성이 약했죠. 결국 그녀는 메리여왕즉위후 사형을 당합니다.
이번 이야기의 네번째 여인은 제인 그레이입니다.
Lady Jane Grey (ca. September-October, 1537 – February 12, 1554)
제인 그레이는 헨리8세의 여동생이었던 메리 튜더의 외손녀입니다. 메리튜더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로 알려져있었는데 정략결혼으로 늙은 왕이었던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결혼했었습니다. 이미 늙은 왕이었던 그와 결혼을 했던 메리 튜더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죠. 그녀는 남편이 죽은후 사랑하는 사람과 재혼을 허락받는 조건으로 늙은 왕과 결혼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은 서퍽공작이 되는 찰스 브랜든이었습니다. 그 결혼으로 태어난 아이중 한명이 프랜시스 브랜든으로 헨리 그레이와 결혼합니다. 그들의 아이중 한명이 제인 그레이입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답고 총명한 소녀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합법적 왕위계승자중에 한명이었습니다만 헨리8세는 자신의 아이들을 왕위계승권에서 우선한다고 명기했습니다. 하지만 에드워드6세는 자신이 죽은 후 카톨릭교도인 누나 메리가 즉위하는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에 몇몇 신하들은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그 음모를 꾸민 사람이 바로 노섬벌랜드 공작이였던 존 더들리(엘리자베스여왕이 사랑했던 로버트 더들리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인 길버트 더들리를 제인과 결혼시켜서 제인을 여왕으로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에 대해 그녀의 부모도 동참했다고 합니다. ( 잘못된 일이라고 길버트 더들리와의 결혼을 거부한 그녀에게 강제로 결혼 시킨것도 그녀의 부모였다고 합니다.) 에드워드6세가 사망한후 제인은 여왕으로 선포되었습니다만 런던시민의 지지를 얻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왕위계승을 주장하는 메리 여왕이 진군하자 메리 여왕을 지지하게 되죠. 결국 제인 그레이는 런던탑에서 살해당합니다.(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살해당했지만 그녀의 부모는 무사했습니다. 존더들리도 처형당하지만 존더들리의 다른 아들들은 무사했습니다.......하지만 반역죄때문에 런던탑에 있어야했죠....로버트 더들리와 엘리자베스 여왕이 처음 만난것도 런던탑에서였다는...--;;;;)
레이디 제인 그레이
제인그레이의 외조부모인 메리튜더와 찰스 브랜든
제인 그레이의 부모인 프랜시스 브랜든과 헨리 그레이
제인그레이를 물리치고 왕위를 계승한 것은 바로 피의 메리라고 불리는 메리여왕입니다.
그녀는 어머니와 이혼한후 자신을 서출로 인정해버린 아버지때문에 평생을 불행하게 보냈습니다.
비록 그녀가 왕의 딸로 인정을 받았지만 princess가 아닌 lady로 불리는데 큰 상처를 입었을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다섯번째 여성이 바로 메리1세입니다.
Mary I (18 February 1516 – 17 November 1558)
메리 여왕은 헨리8세와 그의 첫번째 아내였던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캐서린 왕비는 바로 카스틸랴의 여왕이었던 이사벨라와 아라곤의 왕이였던 페르난디드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캐서린 왕비의 언니 중 한명이 바로 그 유명한 후아나 라 로카 (미친 후아나)입니다. 캐서린 왕비는 처음에 헨리8세의 형이었던 아서와 결혼했지만 남편이 일찍 죽는 바람에 과부로 지냈습니다. 그녀의 시아버지였던 헨리7세는 그녀에게 별 신경을 안썼습니다만 정치적으로 그녀가 중요해지자 다시 자신의 아들과 결혼 시킵니다. (후에 이것이 이혼의 빌미가 됩니다.)
캐서린 왕비는 아이를 낳았지만 메리를 제외한 아이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왕비에게서 더이상 아들을 기대할수 없을것을 알자 헨리8세는 아내와 이혼을 결심합니다. (앤 불린과 사랑에 빠진것이 결정타였습니다만..중요한것은 앤 불린이 헨리8세의 다른 정부들과 달리 그의 정식아내가 되길 원했다는것입니다.) 헨리8세는 자신이 형수와 결혼했다는것을 이유로 들면서 이혼을 요청합니다. (...그의 아버지인 헨리7세가 캐서린과 그를 결혼시킬때 같은 이유로 교황의 허락이 있었죠..)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교황의 가장 큰 지지세력은 합스부르크가의 카를5세입니다. 그는 캐서린의 언니였던 후아나의 아들이었죠. 카를5세는 이모가 이혼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교황으로부터 이혼허락을 얻을수는 없었죠. 왕권과 늘 부딪히던 교회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헨리8세는 결국 수장령을 반포하고 아내와의 결혼을 무효화시킵니다.(이혼이 아니라 결혼 무효였던듯..그러니까 그의 딸인 메리가 공주가 아니라 lady칭호를 쓰는듯합니다.) 그에 대해서 캐서린 왕비는 자신은 끝까지 영국의 왕비임을 주장하죠. 하지만 캐서린 왕비는 유폐되고 메리는 앤불린에 의해 엘리자베스의 시녀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메리는 자신은 왕의 적법한 딸이지 시녀나 사생아가 아니라고 강변했다고 합니다. 앤불린이 죽은후 메리의 처지는 조금 나아졌습니다만 여전히 그녀는 적법한 딸이 아니었죠. 헨리8세가 마지막으로 캐서린 파와 결혼한후에 그녀의 처지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캐서린 파는 헨리8세의 아이들을 잘 돌봐줬다고 합니다.
헨리8세는 자신이 죽은후 왕위계승 서열을 정했습니다. 에드워드6세-메리-엘리자베스 순이였죠.
동생 에드워드6세가 사망한후 제인 그레이가 왕위에 오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메리는 자신이 적법성을 주장하며 군대를 모읍니다. 그리고 런던으로 진격하죠. 하지만 메리 여왕이 즉위한후 영국을 다시 카톨릭으로 돌릴려고 노력합니다. 과격한 방법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신교도에 대한 박해를 시작합니다. 많은 신교도 인사들이 구식 카톨릭 형벌법으로 화형을 당했습니다. 때문에 그녀를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메리 여왕은 사촌인 카를5세의 아들이었던 펠리페2세와 결혼을 합니다.
펠리페2세는 아내인 포르투갈의 마리아가 죽은뒤 아내를 찾고 있었습니다. 자신보다 상당히 나이도 많고 아름답지도 않았던 메리 여왕과의 결혼을 원치 않았으나 영국에 대한 카톨릭 세력의 확대를 꾀했기에 결국 정략결혼을 택합니다. 영국 의회는 스페인의 전쟁에 영국이 개입하는것을 반대해서 펠리페2세가 영국 국정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단서로 결혼을 승인합니다만 남편을 끔찍히 사랑했던 메리 여왕은 스페인의 전쟁에 개입하죠. 결국 메리 여왕은 영국의 프랑스내 마지막 영토였던 칼레지역을 잃게 됩니다. 메리 여왕은 동생 엘리자베스를 상당히 경계했고 그녀가 왕위계승을 한다는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펠리페2세는 메리에게 엘리자베스에게 잘 대해주라고 충고하죠. 메리 여왕은 마지못해 엘리자베스에게 최소한의 호의를 베품니다.
아이를 무척이나 바랬던 메리여왕은 아이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많은 나이에 임신을 실패해서 그녀의 건강을 악화시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를 낳을수 있을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신이 임신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임신이 아니고 병이었죠.... 때문에 즉위한지 4년이 되는 1558년에 그녀는사망합니다. 그리고 왕위는 그녀의 동생이었던 엘리자베스에게 돌아가죠.
메리1세
엘리자베스는 메리 여왕보다 더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헨리8세는 캐서린 왕비가 죽기만을 기다려야했지만(그녀는 스페인 공주였습니다. 외교문제때문에..) 앤불린은 간통죄로 사형당했죠. 어머니가 죽은후 서녀가된 엘리자베스는 메리가 그랬던것보다 더 어렸습니다. 어린 소녀에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죠. 그후 왕의딸로 대우를 받지만 많은 사건에 휩쓸립니다. 그리고 언니에 의해서 런던탑에 감금당하기도 하죠.
이번이야기의 여섯번째 여성은 바로 엘리자베스1세입니다.
Elizabeth I (7 September 1533 – 24 March 1603)
엘리자베스1세는 헨리8세와 그의 두번째 아내였던 앤 불린 사이에 태어난 딸입니다. 앤 불린(일명 천일의 앤)과 결혼하기 위해(또 아들을 얻기위해) 수장령까지 감행했던 헨리8세에게 앤불린이 아들을 못낳는것은 크나큰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앤불린은 자신을 위해 압력넣어줄 황제 조카도 없었죠^^;;;
헨리8세는 앤불린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리라 확신을 했고 다른 시녀였던 제인 시무어와 사랑에 빠져있었죠. 게다가 국제관계도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앤을 간통죄로 처형합니다.(헨리8세는 다섯번째 아내이자 앤 불린의 친척이였던 캐서린 하워드도 간통죄로 처형합니다.) 하지만 이건 조작됐을가능성이 컸죠.... 어쨌든 엘리자베스는 어머니가 죽었을때 겨우 3살이었습니다. 이제 왕의 서녀일뿐이었던 그녀에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죠. 그녀의 시중을 들었던 부인이 왕에게 엘리자베스의 지위를 확실히 해달라는 편지에서 아이가 자라는데 속옷조차 없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결국 왕의 마지막 아내였던 캐서린 파가 왕에게 중재를 하면서 그녀는 나은 대우를 받습니다. 동생 에드워드6세가 즉위한후 평온한 삶을 살았습니다만 왕의 외삼촌이었던 토마스 시무어와 결혼할거라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캐서린 파와 결혼하면서 그런 이야기는 잠잠해졌죠. 엘리자베스는 캐서린 파의 집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그녀의 동생인 에드워드6세가 사망하고 제인 그레이가 왕위에 올랐을때 그녀는 언니 메리를 지지합니다.(그것은 언니 메리의 권리를 침해한것인 동시에 자신의 권리를 침해한것이기때문입니다.)
언니 메리가 왕위에 오른후 그녀는 경계대상 1호가 됩니다. 열성적 카톨릭인 메리 여왕에 비해 신교도였던 그녀는 신교도들의 반란에 중심인물이었죠. 하지만 그녀 자신은 알고는 있었을지라도 직접적 개입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반란을 일으킨 인물들도 엘리자베스가 개입된것을 부인하죠.) 메리여왕은 엘리자베스를 런던탑으로 보냅니다만 처형할수는 없었죠. 그래서 한성에 감시인을 두고 유폐시킵니다. 하지만 여왕이 죽어가자 모든 사람들이 엘리자베스에게 달려가기 시작하죠.
언니 메리 여왕이 죽고 엘리자베스 여왕은 즉위합니다. 그녀는 로버트 더들리를 사랑했습니다만 그는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았죠. 먼저 그의 집안 대대로 반역자 가문에 그와 여왕이 결혼할꺼라는 소문이 돌때 로버트 더들리의 아내는 의문사 하죠. 결국 여왕은 로버트 더들리와 결혼하지 않을꺼라는것을 확실히 하면서 다른 외국 왕자들과의 혼담을 시작하죠.(거기에는 형부였던 펠리페2세와 펠리페2세의 사촌인 오스트리아의 대공,카트린 드 메디치의 아들등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외국 왕자들과의 혼담 이야기는 그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엘리자베스여왕의 치세는 근검절약이 목표였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영국은 가난한 변방국가였죠.(특히 프랑스내의 영지를 다 잃어서 그런듯..) 여왕은 변덕스러웠으나 현명한 신하를 뒀고 그 신하의 충고에 따랐습니다. 특히 윌리엄 세실은 여왕의 가장 충성스럽고 유능한 신하였죠. 엘리자베스 여왕을 말할때 그를 빼놓을수 없을듯합니다.( 그는 여왕의 뜻을 충실히 따랐으나 변덕스럽고 조심스러웠던 여왕에 가끔 사임하겠다고 위협할때도 있었습니다.^^)
여왕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기때문에 왕위계승자에 모두들 궁금해 했습니다. 하지만 합법적인 여왕의 친척들은 여왕의 승인없이 몰래 결혼했습니다. (신교도였기에 여왕의 승인이 필요..) 때문에 여왕은 승인없이 결혼한 친척들에 대해서 매우 화를 냅니다. 결국 합법적 왕위계승자는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6세 밖에 없게 됩니다.
여왕은 말년까지 후계자를 확정하지 않았으나 모두들 제임스6세가 왕위에 오를것을 알았습니다.
여왕은 자신이 죽은후 모두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스튜어트 왕가에 반감을 가지게 된 많은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시대를 더욱더 그리워하게 됩니다.^^
(무적함대를 무찌르고 동인도 회사를 확장하는등 여왕의 치세는 화려한듯하나..국고는 늘 부족해서 전쟁자금을 언제나 아껴서 쓰고 아일랜드에서는 늘 반란을 일으키고 스페인을 견제하기위해 네덜란드를 지원했으나 별 큰 성과는 없었고 또 스코틀랜드에 대한 정치적 간섭도 언제나 왔다갔다 거리는등.... 여왕 생존시에는 그리 큰 환영을 못받은듯..)
13세의 엘리자베스1세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인 앤 불린
엘리자베스 여왕이 결혼하지 않고 죽음으로 왕위는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로 넘어가게 됩니다. 제임스6세의 아버지는 단리경으로 그의 어머니가 스코틀랜드로 시집갔던 헨리7세의 딸 마거릿의 딸입니다. 어머니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 여왕(메리 스튜어트)로 그녀의 아버지 제임스5세 역시 마거릿의 아들이었죠. (헨리 8세는 마거릿 튜더의 자손들을 왕위계승에서 배제 시키려 했으나 결국 마거릿 튜더의 자손들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죠.)
이번 이야기의 일곱,여덟번째 여성들은 마거릿 튜더와 그녀의 손녀인 메리 스튜어트입니다. 먼저 마거릿 튜더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죠.
Margaret Tudor (29 November 1489–October 1541)
마거릿은 헨리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 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와 영국 사이에 평화조약의 일환으로 스코틀랜드왕인 제임스4세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제임스4세가 죽었을당시 그녀는 임신중이었고 왕위를 이어받을 제임스는 나이가어렸죠. 결국 그녀는 아들 제임스 5세의 공식적 섭정이 됩니다.하지만 그녀의 오빠였던 헨리8세가 즉위한후 프랑스와 전쟁관계가 되었을때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동맹관계였기에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전쟁을 반대합니다. 결국 적국의 왕과 혈연관계였던 그녀는 더이상 아들의 섭정으로 있을수가 없었죠. 아들 제임스5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자 (왕위계승서열상 그녀의 아들들 바로다음인) 친 프랑스파였던 알바니 공작존스튜어트가 섭정이 되고 그녀는 섭정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녀가 섭정자리에서 물러나게된 원인중 하나는 그녀의재혼에 있습니다. 그녀는 앤거스 백작인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재혼하면서 더글러스 가문이 권력자로 부상하게 되죠. 그걸 반기지 않았던 다른 귀족들이 연합하여 그녀를 섭정자리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알바니 공작이 프랑스에서 도착하고나서 정치적으로 마거릿과 그녀의 아들들을 떨어뜨려놓습니다. 임신한 그녀는 에딘버러로 가게 됩니다. 그녀의 오빠인 헨리8세는 마거릿에게 아들과 함께 영국으로 오라고 하지만 아들이 왕위를 잃을것을 두려워한 그녀는 그 제안을 거절합니다.
마거릿은 두번째 결혼에서 마거릿이라는 딸을 낳습니다. 그녀는 후에 레녹스 백작이었던 매튜스튜어트와 결혼해서 단리경인 헨리스튜어트를 낳습니다. 헨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 스튜어트와 결혼해서 그의 아들인 제임스6세가 후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죠.
권력을 잃은 그녀는 잠시 영국에 있다가 다시 스코틀랜드로 갑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조용한 삶을 살려고 하죠.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권력을 잡기위해 아내의 오빠였던 헨리8세의 원조를 받습니다만 실패합니다.
마거릿은 그녀가 스코틀랜드에 머무는동안 그녀의 남편은 런던에서 그의 옛사랑을 만난다는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의 돈으로 살아가고 있던 무능한 남편이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나쁘게 작용해서 둘은 결국 이혼합니다. 그리고 마거릿은 헨리 스튜어트와 재혼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성년이 되어 직접통치하는 아들 제임스 5세의 조언자가 되죠.
마거릿은 영국과 스코틀랜드가 좀더 평화로운 관계가 되길 바랬지만 스코틀랜드에 영향력을 펼치려는 헨리8세와 그를 경계하던 제임스5세의 관계는 불편했죠. 그녀는 자신의 아들과 조카인 메리공주(후에 메리1세)를 결혼시키고 싶어했지만 실현되긴 어려웠습니다.
세번째남편역시 그녀의 재산으로 살아가면서 다른 여자들에게 한눈을 팔았습니다. 때문에 그녀는 무척이나 불행했죠.
아들이 기즈의 마리와 결혼한후 며느리와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후에 영국의 제임스1세가 되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6세는 마거릿은 증손자로 제임스6세의 아버지 단리경은 마거릿의 외손자였고 제임스6세의 어머니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마거릿의 친손녀였습니다. 제임스6세는 마거릿튜더를 통해서 자신의 권리를 확보하게 되는것이죠^^
마거릿 튜더,
스코틀랜드의 왕비
마거릿 튜더의 아들이었던 제임스5세는 스코틀랜드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외삼촌 헨리8세를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와의 유대를 더 강화시키려 했죠. 때문에 프랑스 공주와 첫번째 결혼을 하고 두번째 결혼 역시 프랑스의 유력 가문이었던 기즈가의 공주와 합니다. 그녀가 바로 메리 스튜어트의 어머니인 기즈의 마리입니다. 딸이 태어난지 6일후에 남편을 잃은 마리는 영국의 간섭을 피하고 자신의 섭정지위를 공고히하기 위해 딸을 프랑스의 황태자비로 보냅니다. 그결과 태어난지 6일만에 여왕이 된 메리 스튜어트는 어릴때부터 프랑스의 황태자비로 프랑스 궁정에서 자라납니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바로 카트린느 드 메디치로 메리 스튜어트를 무척이나 아꼈다고 합니다.( 카트린느가 결혼할때 친척인 교황으로 부터 받은 진주를 메리에게 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진주들은 메리의 아들인 제임스가 물려받아 영국 왕가의 보석으로 자리잡아 공식 왕관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이제 메리 스튜어트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Mary I of Scotland (Mary Stuart, popularly known as Mary, Queen of Scots); (December 8, 1542 – February 8, 1587)
메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왕이었던 제임스5세와 그의 두번째 아내였던 기즈의 마리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태어난지 겨우 6일만에 아버지 제임스5세는 사망했고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되죠.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마리드기즈가 섭정이 됩니다. 메리 스튜어트는처음에 헨리8세의 아들이었던 에드워드와 결혼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나라간의 반목으로 힘들었죠. 그런때 프랑스의 앙리2세는 자신의 아들이자 도핀인 프랑수아와의 결혼을 제의합니다. 메리의 어머니였던 마리드기즈는 프랑스와의 유대를 좋아하죠. (게다가 프랑스의 기즈가에서도 찬성합니다. 조카가 프랑스의 왕비가 되면 이익이 될테니까요.) 메리는 프랑스의 황태자비로 어린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내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의 왕비는 그 유명한 카트린느 드 메디치였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디안 드 푸아에게뺐긴 그녀는 평생 아이들 교육에 힘썼다고 합니다.(...하지만 아들들이 하나같이...음냐..) 덕분에 메리도 매우 좋은 교육을 받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메리는 프랑스어,라틴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그리스어,스코틀랜드어와 승마 바느질등을 교육받았다고 합니다.(...재미난 사실은 프랑스 궁정에서 우아하게 교육받은 메리는 음유시인들의 찬사를 받는 우아한 황태자비였습니다만 그녀와 언제나 비교되는 엘리자베스 여왕은 캐서린 파의 도움으로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둘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엘리자베스쪽이 훨씬더 학식이 깊었다고 합니다...아마도 엘리자베스가 훨씬더 학구적 분위기-바꿔말하면 제약적인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엘리자베스여왕이 즉위했을때 메리는 아직 도피느(황태자비)였습니다만 그녀의 시아버지였던 앙리2세는 며느리의 영국 왕위계승을 은근히 주장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의 서녀였으므로 정식 결혼으로 태어난 아이가 아니기에 왕위계승권이 없고 그럼 가장 가까운 합법적 계승자는 메리라는 주장이죠.) 나중에 이문제는 더 커져서 결국 메리는 반역죄로 영국에서 처형당하게 됩니다.
메리는 남편 프랑수아가 즉위하자 왕비가 됩니다. 하지만 남편은 얼마 살지 못하죠. 남편이 죽은후 그녀는 프랑스 왕비 지위는 잃었지만 자신의 왕국인 스코틀랜드가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신교와 구교간의 다툼으로 혼란한 상황이었죠. 남편이 죽은후 스코틀랜드로 돌아갑니다.
메리가 스코틀랜드에 돌아왔을때 모든 신하들이 그녀를 반겼습니다. 정당한 권리를 가진 여왕이 돌아왔기에 희망에 차있었죠.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그녀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자신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합니다. 그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면 그녀와 그녀의 자손들에게 왕위계승을 인정하겠다고 하죠. 어쨌든 왕위계승권을 인정받는 분위기였으나 엘리자베스 여왕이 로버트 더들리를 메리의 남편감으로 추천하자 그 이야기는 없었던 것으로 되죠.
메리 여왕은 다른 남편감을 물색합니다. 그리고 단리경 헨리 스튜어트를 찾아내게 되죠. 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이 허락할지 의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단리경을 메리의 남편 후보를 협상할 사람으로 선택하게 만들어 스코틀랜드로 보내게 합니다.그리고 단리경과 메리는 결혼합니다.이 결혼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분노했습니다. 특히 둘다 영국 왕위 계승권에 가까운 인물이라 둘의 결혼은 누가 봐도 영국 왕위 계승을 위한것이었죠. 하지만 이미 정식으로 결혼한 둘에게 어쩔수 없었죠.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 음모를 꾸민 단리경의 어머니를 런던탑에 잠시 가둬두는데 만족했습니다.
메리와 헨리는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만 문제는 단리경이 아직 어린 경박한 사람이라는점이었습니다. 아내로 부터 나온 권력을 너무나 당연히 했고 아내 위에 군림하려 했죠. 메리는 이런 남편을 선택한것을 곧 후회합니다. 그리고 임신을 핑계로 그를 멀리합니다. 그럴수록 남편은 더욱더 그녀에게 분노하죠. 어쨌든 그녀는 남편보다는 이탈리아인 비서와 가깝게 지내고 조언을 구합니다. 이에 단리경은 임신 5개월인 아내 앞에서 그를 살해합니다. 메리는 자신의 친구조차 지키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남편에게 복수하리라 다짐하죠. 그녀는 아들을 낳습니다. 그가 바로 제임스6세입니다. 나중에 남편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척합니다만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랑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그녀를 호위햇던 보스웰백작 제임스 험브리였습니다. 보스웰 백작은 메리의 남편을 암살합니다. 그리고 그녀를 납치해서 강제로 결혼하죠. 물론 이건 한바탕의 연극에 불과했습니다. 메리는 남편이 죽기전 이미 임신중이었으리라 추정됩니다. 그리고 남편의 살해범을 감싸주죠. 하지만 남편의 살해범과 결혼하기에는 힘들었기에 강제 결혼이라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그와 결혼한 메리는 불행의 시작이 됩니다. 단리경의 아버지인 레녹스 백작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해범을 방치하는데 불만을 품습니다. 그리고 보스웰백작의 횡포와 메리 여왕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신하들이 그녀에게 왕위를 1살짜리 아들에게 넘길것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보스웰 백작은 덴마크로 간신히 도망가죠. 단리경이 영국의 귀족이었기에 단리경의 살해에 메리 여왕도 개입되었다는데 영국도 개입하게 됩니다. 결국 메리는 영국에 망명하게 되고 어린 아들 제임스가 제임스6세로 즉위해서 주변의 신하들에 의해 나라를 다스리게 됩니다. 하지만 메리는 자신이 스코틀랜드 여왕임을 주장하죠. 결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녀를 감시인을 붙여서 가두게 합니다. 자신의 복위를 위해 힘쓰던 메리는 이런저런 음모에 말려들면서도 20여년을 삽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스페인과 동맹해서 영국내 카톨릭 교도들을 획책해서 반란을 일으켜 영국의 왕위를 노렸다는 혐의를 받습니다. 이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정치적 파트너였던 윌리엄 세실은 그녀를 죽일 것을 여왕에게 건의 합니다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반란이라 하더라도 엘리자베스 여왕은 다른 군주가 신하들의 손에 처형되는것을 원치 않았다고 합니다.) 차일피일 미루는 여왕을 보다 못한 윌리엄 세실은 여왕에게서 사형 집행 명령서를 받은후 바로 집행해버립니다. 그렇게 메리 여왕은 사망합니다. ( 메리 여왕의 사형이 결정되자 스코틀랜드에서 항의 사절이 왔습니다만 어머니 얼굴도 기억 못하는 제임스6세는 자신의 영국 왕위계승권을 인정해준다면 어머니의 처형을 묵인해주겠다는 거래를 엘리자베스여왕과 합니다.)비록 엘리자베스 여왕은 살아 생전에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으나 모두들 제임스 6세가 영국왕이 될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스코틀랜드의 메리여왕
이렇게 영국 왕가는 스튜어트 왕가로 바뀝니다. 제임스1세(영국과 스코틀랜드 통합 왕으로써)의 영국왕 즉위는 스코틀랜드 왕가가 영국을 지배하는 의미도 있었습니다만 반대로 영국이 스코틀랜드를 병합하는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이후 영국은 스코틀랜드를 얻게 되었죠.
엘리자베스여왕이 사망할무렵 이미 왕위계승자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6세밖에 남지 않았죠. 게다가 그는 영국의 왕위를 이어받기위해 이런저런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본인 스스로가 신교도였으며, 역시 신교도였던 덴마크 공주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딸이 태어나자 영국의 여왕이름을 따서 엘리자베스라고 이름짓기도 했죠. 하지만 제임스6세가 영국의 제임스1세로 즉위한 이후 영국인과 스코틀랜드인들 모두 불만이 많았다고 합니다. 제임스1세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도 여럿있었고, 또 영국에서 정치적 기반이 약한 제임스1세가 귀족작위를 마구 남발한결과 제임스1세가 동성연애자라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합니다.(...뭐 읽어본 전기에는 실제로 남자를 좋아하셨다고합니다만..--;;;일단 그가 새로운 인물들에게 귀족작위를 많이 부여한것은 영국에서 약한 정치세력을 강화하기 위한것이었다고합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스튜어트 왕가가 영국을 통치하던 시기는 매우 어수선했습니다.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 잠시 공화정이 되었다가 다시 왕정으로 복귀하는등의 일이 일어났죠.
아버지 찰스1세가 청교도 혁명때 처형당하는것을 지켜본 제임스2세는 신교 세력을 억제하고 구교 세력을 확대시키려고 합니다. 이에 신하들은 위협을 느끼죠. 하지만 제임스2세의 아내였던 앤 하이드는 착실한 신교도였고 그녀의 살아남은 두딸 역시 신교도였기에 왕위계승자에 대한 위협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임스2세의 카톨릭 교도인 두번째 아내가 아들을 낳자 상황은 변하게 됩니다. 그의 아들이 왕위 계승을 하게되면 다시 혼란이 생길수도 있었습니다. 결국 의회는 제임스2세의 장녀 메리와 결혼한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빌렘에게 진군을 요청하게 됩니다. 어린시절부터 이미 타고난 정치가였던 빌렘은 자신이 왕위에 오를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대와 함께 영국으로 갑니다. 하지만 장인이 망명할 시간을 벌게 해주려고 아주 천천히 가죠. 그리고 빌렘은 부인인 메리와 함께 영국의 왕위를 계승받습니다..
아홉번째 여성은 메리2세입니다.
Mary II (30 April 1662–28 December 1694)
메리는 제임스2세와 그의 신교도 아내였던 앤 하이드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제임스2세와 앤 하이드 사이에 태어난 아이중 성인이 된 아이는 메리와 나중에 앤 여왕이 되는 앤 공주 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그녀는 그녀의 큰아버지였던 찰스2세의 협약에 따라 루이 14세의 아들이었던 황태자 루이와 결혼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 의회는 그것을 파기하게 하고 그녀의 사촌이자 신교도였던 오라녜공 빌렘과 결혼합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매우 성실했지만, 결혼초기 남편인 빌렘은 그녀에게 무관심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세번의 유산이후 병을 앓아서 더이상 아이를 가질수 없게되자 매우 불행해했다고 합니다. 또 결혼한지 3년이 지나서 빌렘은 메리의 시녀였던 엘리자베스 빌리어스를 정식정부로 인정했습니다. 둘의 관계는 매우 불행했고, 심지어는 메리의 아버지 제임스2세가 딸을 불행하게 하는 사위에게서 딸을 떼어놓으려한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습니다.
메리여왕은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명예혁명이 일어난후 의회의 청을 받아들여 여왕으로 즉위합니다만 동시에 남편도 함께 즉위하길 바랬기에 남편인 오라녜공 빌렘은 영국의 윌리엄3세로 공동즉위합니다.이런 가장 큰 이유는 남편이자 정치적 야심이 가득찼던 빌렘이 원했기때문이었습니다. 또 메리본인과 동생 앤을 제외하고는 신교도 왕위계승자중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바로 남편이었기때문이기도 했을껍니다. 공동즉위한 후에도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남편 윌리엄3세의 말을 적극적으로 찬성했고,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있는동안은 국정을 수행했지만 남편이 돌아온후에는 그 권리를 바로 남편에게 넘겨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그녀도 종교지도자의 권리는 스스로 행했다고 합니다.
이런 메리2세의 헌신으로 윌리엄3세는 메리에게 점점더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메리가 사망했을때는 매우 슬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메리2세가 죽은직후, 윌리엄3세는 오랜세월 자신의 정부였던 엘리자베스 빌리어스와의 관계를 깹니다. 그 이유가 메리여왕의 바램이었기때문이라고 합니다.
윌리엄3세는 부인인 메리여왕보다 좀더 오래살면서 통치했습니다만, 이후 왕위는 메리의 동생인 앤에게 갑니다.
메리2세
윌리엄3세
오라녜공 빌렘3세
그가 죽은이후 침묵공 빌렘의 직계는 단절되었고, 침묵공의 동생의 후손이 오라네공지위를 계승합니다.
...오라녜-나사우 가문은 나사우 가문의 큰 두분가중 오토1세의 후손인가문입니다
반면 나사우의 다른 큰 분가인 발람1세의 후손들은 나사우 공작가문이 되면서 나사우 가문 협약에 따라 오토1세계열의 분가인 나사우-딜렌부르크가문이 계승받았던 룩셈부르크를 물려받게됩니다.
열번번째 여성은 앤여왕입니다.
Anne (6 February 1665 – 1 August 1714)
앤은 제임스2세와 그의 첫번째 아내였던 앤하이드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어린시절을 그녀의 할머니였던 헨리에타 마리아 왕비와 프랑스에서 살았습니다.(헨리에타 마리아는 찰스1세의 아내로 프랑스의 루이 13세의 동생이자 루이 14세의 고모였습니다. 그녀의 딸 헨리에타 안은 루이 14세의 동생이었던 오를레앙공작 필리프의 첫번째 부인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영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사라 제닝스와 친분관계를 유지합니다.(그녀는 후에 말보로 공작 존 처칠의 아내가 되고 앤 여왕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 됩니다.) 그의 아버지는 카톨릭인것을 공식적으로 밝힙니다만 그녀와 그녀의 언니는 신교도로 자랍니다. 그녀는 1683년 신교도인 덴마크의 왕자 율겐(후에 컴벌랜드 공작 조지)와 결혼합니다. 둘은 대중에 인기있는것은 아니었지만 행복한 삶을 영위합니다. 둘다 평온한 삶에 안주했죠.
그녀의 백부였던 찰스2세가 죽고 그녀의 아버지인 제임스2세가 즉위했을때 그의 두번째 아내가 카톨릭이었기에 모두들 후계자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그녀와 그녀의 언니가 왕위계승자로 생각되고 있었기에 별 걱정없었죠. 하지만 제임스 2세의 왕비인 모데나의 마리는 아들 제임스를 낳습니다. 일이 복잡해져서 결국 명예혁명이 일어납니다. 언니 메리와 형부 윌리엄이 자식이 없고 또 앤이 수없이 많이 임신했지만 살아남은 아이 하나없자 제임스2세의 아들인 왕위 요구자 제임스가 왕위를 계승할것을 두려워한 의회는 카톨릭과 결혼하거나 카톨릭을 믿는 사람의 왕위계승을 배제하는 법을 채택하게 됩니다. 이후 언니와 형부가 죽고 앤은 왕위에 오릅니다. 그녀치세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완전히 병합해서 Great Britain이 되죠. 스튜어트왕가를 지지하는 스코틀랜드가 분리될것을 우려한 조치였습니다. 어쨌든 덕분에 제임스2세의 아들은 왕위 요구자로 남고 영국의 왕위는 하노버가로 넘어가게 됩니다. 앤 여왕은 말년에 동생 제임스를 불쌍하게 여겨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시도를 묵인해주려 했습니다만 생각보다 빨리 세상을 떠나게 되죠.
앤여왕
앤여왕의 남편
컴벌랜드 공작 조지
카톨릭 교도가 더이상 왕이 될수 없었기에 신교도집안의 왕위계승자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찾은 사람이 찰스1세와 제임스2세의 사촌이자 제임스1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딸이자 하노버의 선제후비였던 팔츠의 소피아가 선택됩니다. 가장 중요한 신교도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이었죠. 게다가 그녀의 아들인 조지역시 신교도였습니다. 앤 여왕보다 소피아가 먼저 사망했는데...만약 앤여왕이 미리 사망했다면 그녀의 아들이 왕이 되는것이 아니라 그녀가 왕으로 먼저 선포되었을것입니다.^^
열한번째와 열두번째 여성은 제임스1세의 딸이었던 보헤미아의 겨울왕비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와 그녀의 딸인 조피입니다.
Elisabeth, Electress Palatine and Queen of Bohemia (August 19, 1596 – February 13, 1662), born Princess Elizabeth Stuart of Scotland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제임스1세와 그의 아내인 덴마크의 앤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정략결혼으로 신교도였던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과 결혼했습니다. 무척이나 행복한 삶이었지만 남편이 보헤미아의 왕이 되길 승락하면서 그의 가족은 합스부르크가에의해 선제후령과 보헤미아를 상실하게 되죠.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남편은 한해 겨울에만 보헤미아의 왕과 왕비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보통 보헤미아의 겨울 왕비라고 부릅니다.) 그녀와 남편은 네덜란드에서 망명생활을 했습니다만 그녀의 남편은 일찍 사망하고 13명의 아이들을 그녀 혼자서 책임져야했죠. 그래서 늘 가난해서 그녀는 자신의 보석을 저당 잡히는등 빈곤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녀의 큰아들이 팔츠의 선제후령을 회복한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네덜란드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몇몇 아들들은 일찍 죽었고 몇몇 딸들은 결혼 적령기에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시켰습니다. 막내딸인 조피는 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 공작과 결혼하는데 그가 나중에 첫 하노버의 선제후가 되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입니다.
엘리자베스의 아들인 팔츠의 선제후 카를 루드비히는 그의 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를 루이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와 결혼시킵니다. 엘리자베트 샤를로트의 외손자가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 되는 로렌의 프란츠 슈테판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청교도 혁명때 동생이 처형당한데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조카 찰스2세가 즉위하고 나서 영국으로 건너가 남은 여생을 영국에서 보냈습니다.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팔츠의 선제후비,보헤미아의 겨울왕비
신교도 왕위계승자를 찾으려는 영국 의회에 찾은 사람이 결국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막내딸이었던 조피였습니다. 나머지 자식들은 카톨릭 교도와 결혼했거나 수녀거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죠..
Electress Sophia of Hanover (born Sophia, Countess Palatine of Simmern, at The Hague) (October 14, 1630 – June 8, 1714 in Herrenhausen)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과 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막내딸로 태어난 조피는 결혼전 일반적으로 팔라틴 공녀나 팔라틴의 조피라고 불렸습니다. 망명중이었던 가족은 어려운 경제 사정에 영지도 없는 왕족이라 결혼하기 힘들었죠. 하지만 그녀의 오빠인 카를 루드비히가 자신의 선제후령인 팔츠를 다시 되찾게 되면서 그나마 형편이 나아지게 됩니다. 1658년 조피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공작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결혼합니다. 그는 후에 하노버의 선제후가 되는데 때문에 조피도 하노버의 선제후비로 알려집니다.
그녀는 수학자인 라이프니츠와의 평생동안 친구였다고 합니다. 이런한 우정때문에 19세기부터는 그녀가 매우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가진 여성으로 알려졌다고 합니다.^^;;; 또 조피의 조카이자 오를레앙공작부인이었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는 이 고모와 자주 편지를 주고 받았다고 합니다.
1701년 영국 의회가 카톨릭교도의 왕위계승을 제한하는 법령을 발표하자 왕위계승권자로 그녀와 그녀의 자식들이 부상합니다. 조피는 신교도 부모를 가졌고 그녀 자신과 남편도 신교도였으며 자식들도 신교도와 결혼한 신교도 집안이었죠.
조피는 자신과 후손들이 영국의 왕위계승후보가 된이후 줄기차게 왕위계승을 위해서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앤 여왕보다 먼저 죽지 않는다면 조피가 다음 영국 여왕이 되는것이었죠. 하지만 앤여왕이 죽기 몇달전 조피는 사망하고 영국의 왕위는 조피의 아들이자 하노버의 선제후였던 게오르그 루드비히가 영국왕 조지1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영국 왕위는 하노버가로 넘어가게 되죠.
조피의 아들은 영국의 왕이 되었고, 딸인 조피 샤를로트는 프로이센의 왕비가 됩니다.
이렇게 조피의 왕위계승권을 통해 즉위한 조지1세와 그의 아들 조지2세는 영국에 처음 왔을때 영어를 할줄 몰랐다고 합니다.덕분에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어쨌든 하노버 왕가는 빅토리아 여왕까지 갑니다.^^ 그때까지 하노버의 왕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면서 살리카법을 따르던 하노버는 빅토리아여왕의 숙부를 왕으로 받아들입니다. 여왕과 숙부 사이에 왕실 보석을 둘러싸고 다툼이 있었다고 합니다만....뭐....빅토리아 여왕은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버트와 결혼해서 왕가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으로 바뀝니다.
이야기할 열세번째 여성은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뭐 빅토리아 여왕에 대해서도 많이 있으니 조금만 적겠습니다..아하하..
조지3세의 수많은 자식들중에 많은 자식들이 정식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니면 아니면 아내와는 거의 이혼상태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결과 왕위계승권에 문제가 생길정도였습니다. 특히 조지3세의 섭정이자(조지3세가 미치자 아들인 프린스오브웨일즈가 섭정을 했었음) 왕위계승자였던 조지의 유일한 합법적인딸인 샤를로트가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자 더욱더 그렇습니다. 결국 의회는 왕자들에게 부채탕감이라는 미끼로 유혹합니다. 샤를로트의 사망으로 왕위계승이 혼란스러워지자 왕자들도 정식결혼을 서두릅니다. 그중에는 자신의 아이를 10명이나 낳아주고 자신을 먹여 살려주기까지 했던 배우 조던을 버리고 (10명의 사생아들 모두 피츠윌리엄-윌리엄의 아이라는뜻-라는 성을 받습니다.) 유럽의 공주와 결혼합니다.
조지3세의 넷째아들이었던 켄트공작 에드워드도 이때 결혼합니다. 그의 결혼 상태는 조카 샤를로트의 남편이었던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레오폴드의 누나이자 레닝겐공의 미망인이었던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와 결혼합니다. 빅토리아는 전남편사이에 두아이가 있었죠. (빅토리아 여왕의 오빠인 카를 프레더릭과 언니였던 페오도라입니다.)
하지만 가난했던 켄트 공작은 영국에서 살수 없어서 독일에서 거주를 합니다. 하지만 아내가 임신하자 영국의 왕위계승자가 될수도 있는 아이를 외국에서 태어나게 하는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충고에 따라 아내와 아내의 아이들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딸 빅토리아가 태어난것을 봅니다. 하지만 딸이 태어난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사망하죠
Victoria (Alexandrina Victoria; 24 May 1819 – 22 January 1901)
빅토리아는 조지3세의 네째아들인 켄트공작 에드워드와 작센-코부르크-잘펠트 의 빅토리아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태어난후 그녀의 대부모로는 백부였던 섭정왕자(후에 조지4세),러시아의 알렉산드르1세,고모인 뷔르템베르크의 샤를로트 왕비,외할머니인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부인이었습니다. 이름인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는 대부인 알렉산드르1세와 어머니 빅토리아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1살도 되기전 그녀의 아버지는 사망했습니다. 아직 아기일때는 그녀의 왕위 계승 서열은 섭정왕자,클라렌스공작다음이었을뿐입니다. 하지만 조지4세가 즉위하고 사망한뒤 그녀의 백부 클라렌스 공작이 윌리엄4세로 즉위했을때 그녀는 왕위계승서열이 첫번째였습니다. 특히 윌리엄4세가 적자를 가질수 없어보이자 그녀는 더욱더 중요해지죠. 빅토리아는 혼자였지만 그녀의 숙부들에게는 아들들도 많았습니다. 그결과 켄트공작부인은 빅토리아를 과보호하게 되죠. 어쨌든 빅토리아는 18세에 섭정 필요없이 왕위계승을 합니다. 빅토리아가 영국 왕위를 계승할것이 확실해지자 많은 왕족들이 그녀와 자신의 아이가 결혼하길 바랍니다. 아버지쪽 친척중 한명인 캠브리지 공작이 그랬죠. 그리고 어머니쪽 친척들은 그녀의 사촌인 알버트공과 결혼하길 바랬습니다. 결국 빅토리아는 알버트공과 결혼합니다.
빅토리아여왕과 알버트공의 가정생활은 빅토리아 시대 가정생활의 표상이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생활을 표현한 많은 그림들과 사진이 있습니다만......(정작 여왕은 자신의 단점을 잘 알아서 사진찍을때 항상 얼굴을 가리더군요...--;;;;;;; 한사진은 아예 뒤돌아서있다는..쿨럭..)
하지만 남편인 알버트공이 죽은후 여왕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평생 상복을 입고 살고 아들 버티(에드워드7세)를 매우 미워해서 아들이 공적생활을 못하게 훼방을 놓습니다.--;;;;(알버트공이 죽은 원인이 아들 버티때문이라 믿었죠.)
빈터할터가 그린 젊은 시절의 빅토리아 여왕
빅토리아여왕과 알버트공
결혼몇주년 기념이더라..하여튼 결혼식 재연장면이랩니다.
빅토리아 여왕님이 미워한--;; 아들
에드워드7세
여왕은 남편의 죽음이 아들책임이라고 아들이 공적임무를 하는데 훼방을 놓았다고 합니다.
덕분에 에드워드7세는 화려한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셨다는....
오랜동안 살았던 여왕은 20세기가 시작되는해에 사망합니다. 그리고 왕위는 그녀의 아들인 에드워드7세에게 넘어가고 왕가도 작센-코부르크-고타가가됩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이자 에드워드7세의 아들이었던 조지5세는 1차세계대전동안 영국에 인 반 독일감정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특히 왕가와 왕가의 친척들은 독일식 성에 독일 왕족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죠. 결국 그는 왕가의 성을 윈저가로 바꿉니다. 그리고 자신의 독일 친척들에게 성을 바꾸라고 압력을 넣죠^^
그후 조지5세는 손녀 릴리벳(엘리자베스 여왕)을 끔찍히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의 아내 메리 왕비 역시 손자손녀들을 끔찍히 사랑했죠. 뭐 어쨌든.... 에드워드8세가 양위를 하고 조지6세가 즉위한후 현 여왕님에게 왕위가 이어지죠.--;;;;;
현 여왕님에 대해서는 그냥 잠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살아있는 왕족에게는 절대 관심이 없어서 잘모르기때문입니다..아하하...
이번이야기의 마지막 여성은 현 여왕님인 엘리자베스2세입니다.
Elizabeth II (Elizabeth Alexandra Mary Windsor; born 21 April 1926)
엘리자베스 여왕은 후에 조지6세가 되는 요크 공작 알버트와 그의 아내인 요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사이에 태어난 장녀입니다. 여왕의 대부모로는 조부모인 조지5세와 메리왕비,빅토리아여왕의 아들인 코넛공작(도대체 촌수가..쿨럭... 증조할아버지의 동생이니...),고모인 프린세스 로열 메리공주,외할아버지와 이모 였습니다.
여왕의 이름은 엘리자베스는 어머니로부터 알렉산드라는 증조할머니로부터 메리는 할머니로 부터 따왔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태어났을때 그녀의 아버지는 조지5세에게 그녀의 이름에 빅토리아를 넣어야되는지 물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가족들은 애칭으로 릴리벳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녀의 백부였던 에드워드8세가 퇴위하고 그녀의 아버지가 즉위하자 그녀역시 왕위계승자로 교육받습니다. 2차대전이 일어나자 엘리자베스공주는 군에 입대를 해서 여러 후방지원에 참여했다고 합니다.(영국왕실이 굳건해질수 있었던 계기는 2차대전에 있습니다. 2차대전때 엘리자베스 왕비는 그녀의 딸들을 데리고 왕의 곁을 지켰습니다. 폭격이 일어나는 런던에 그대로 머물렀죠. 그결과 국민들은 왕비에대해서 존경심을 가지게 되고 왕실은 해체되지 않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친척인 그리스의 필리포오스 왕자와 결혼하기로 합니다.
이미 영국 해군에 복무중이었고 그의 외삼촌이자 유명한 정치가였던 버마백작 루이스 마운트배튼이 후견이었던 필리포오스는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기전 자신의 그리스와 덴마크 왕위계승권을 포기하고 영국시민인 필립 마운트배튼이됩니다. 엘리자베스와 결혼한 그는 에딘버러공작이라는 타이틀을 얻죠. 남편과 결혼한지 얼마후 그녀의 아버지 조지6세는 암으로 사망하고 엘리자베스는 여왕으로 즉위합니다.
...뭐 지금까지 쭉 여왕님이십니다. 여왕님 집안사정도 좀 복잡하신듯하더군요....--;;; 뭐 한 백년후쯤에는 에드워드7세이야기하듯이 이야기할수 있을까합니다..아하하.......
화사한 옷을 입고 계신 여왕님.
이렇게 해서 영국 여성왕위계승권자에대해서 다 알아봤습니다..
참기네요..쿨럭....
사진출처 : 몽땅 위키피디어
자료출처 : 몽땅 위키피디어, Oxford Illustrated History of the British Monarchy(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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