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있는글들/화요일 : 에스파냐

레온의 인판타들...(5) 레온의 산차 : 알폰소 5세의 딸(두번째)

엘아라 2022. 9. 20.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11세기 이전은  너무 힘들어서 왠만하면 안쓰고 싶다고 했었는데 뭐랄까 11세기라도 그렇게 자료가 많은 것은 아니고 여전히 힘듭니다 ..사실 중세가 다 그렇습니다 ㅠ.ㅠ

 

 

레온의 인판타들...(5) 레온의 산차 : 알폰소 5세의 딸(두번째)

 

레온의 산차

카스티야 백작부인, 레온의 왕비

Sancha of León

(c. 1018 – 8 November 1067)

산차와 페르난도

 

 

산차는 결혼이후 아마도 많은 중세 여성들처럼 조용히 살았을 것입니다. 특히 결혼 다음해부터 아이를 낳았기에 아마도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더 집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산차가 카스티야에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동안에도 정치적 상황은 너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산차의 오빠였던 베르무도 3세는 새어머니인 우라카  그라세스를 궁정에서 추방하고 권력을 잡았으며 이전의 친 나바라 정책을 거부하고 나바라와 적대적이 됩니다.사실 레온과 나바라는인접국가로 영지를 두고 갈등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산차의 시아버지였던 나바라의 산초 3세는 베르무도 3세를 무찔렀고 레온 왕국의 중심도시였던 레온 시를 점령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에 베르무도 3세는 갈리시아로 피신해야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레온에서 나바라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카스티야 백작령은 레온과 나바라 사이에 있었으며, 카스티야의 백작이었던 페르난도가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레온의 베르무도 3세

 

1035년 산초 3세가 죽고 난 베르무도 3세는 다시 레온으로 복귀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산초 3세 생전에 나바라와의 관계를 좋게하기 위해서 산초 3세의 딸이었던 히메나 산체스와 결혼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베르무도 3세는 레온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던 매제인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도와 맞부딪힐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1037년에 일어난 타마론 전투에서 페르난도는 베르무도 3세를 살해했습니다.

 

베르무도 3세가 죽고 난뒤 레온의 왕위는 공백이됩니다. 물론 베르무도 3세를 살해하고 세력을 더 넓혀나간 페르난도가 레온을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한동안 왕위는 비어있었습니다. 사실 산차는 베르무도 3세의 유일한 동생이자 알폰소 5세의 살아남은 자녀로 자신의 권리로 왕위에 오를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페르난도 역시 아내의 권리를 통해서 왕위에 오를 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르무도 3세가 죽은 다음해인 1036년에도 페르난도는 대관식을 통해서 정식으로 레온의 국왕이 됩니다. 이때 산차의 지위는 "여왕"이라기 보다는 "왕비"에 가까웠는데 아마도 페르난도가 단독으로 레온을 통치하기 위해서 이렇게 오래도록 대관식도 미루고 레온에서 자신의 권한을 강화했을 것이며 아내의 지위도 여왕이 아닌 왕비로 한정했을 것입니다. 또 아마 산차 역시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남편이 오빠를 죽이고 국왕이 되는 상황에서 아마도 당대 평범한 중세 여성이었던 산차가 할수 있는 것은 많이 없었을 것이며 그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입니다. 산차가 레온의 여왕이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는 남편인 페르난도가 사망한뒤 아들인 산초 2세가 왕위에 오르는데 만약 산차가 여왕이고 페르난도가 아내의 권리로 왕위를 이었다면, 산초 2세가 즉위했을때 산차 역시 여전히 여왕의 지위를 유지해야했습니다. 하지만 산초 2세는 단독으로 국왕이 되었으며 이것은 어머니가 레온의 여왕의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페르난도가 레온의 왕위를 이어받으면서 카스티야 백작령은 레온 왕국과 동등한 입장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은 가문의 상속에 따라 나누어졌다가 합쳐졌다를 반복하게 됩니다.

 

레온과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세

 

산차는 아마도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가족을 잃어야했지만 그렇다고 산차가 무엇인가를 할수 있는 것이 없었고 결국 남편과 아이들과 평온한 삶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중세시대 여성들처럼 남편에게 순종하고 정치적으로 나서지 않는 조용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1065년 남편인 페르난도가 사망하자 산차는 궁정을 떠나 수도원으로 가게 됩니다. 물론 속세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수녀가 된것은 아니었으며 과부가 된 왕비가 궁정에서 은퇴하는 관례를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녀들에게 관심이 많았는데 자녀들이 영지를 두고 다툼을 할때 아들들을 중재하려했었다고 합니다, 산차는 남편이 죽은 2년뒤인 1067년 사망했습니다.

 

산차는 페르난도와의 사이에서 다섯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아버지로부터 영지를 분할받았는데 두 딸들인 우라카와 엘비라는 각각 자모라와 토로 시를 영지로 받았으며 이들은 결혼하지 않고 미혼으로 사망했습니다. 세아들들인 산초와 알폰소 그리고 가르시아는 각각 카스티야와 레온, 갈리시아를 물려받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속에 대해서 형제들은 이견이 있었으며 결국 형제간의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둘째아들인 알폰소가 모든 영지를 차지하면서 그의 후손들이 레온의 왕위를 이어가게 됩니다.

 

레온과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 산차의 아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