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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왕비들...(101) 룩셈부르크의 마리 : 샤를 4세의 왕비 (두번째)

엘아라 2022. 9. 1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사실 룩셈부르크의 마리 자체는 그다지 자료가 없는데 부모 배경 설명하다보니 길어졌네요 =-=

절대 글 읽기 싫어서 그런것 아닙니다 

배경설명하느라 룩셈부르크 가문에 림부르크 가문이랑 브라반트 가문이야기에 결국 부르고뉴 공작 가문 이야기까지 읽었습니다 =-= (여기 상속문제는 진짜 머리 깨지게 읽어도 어려워요..ㅠ.ㅠ 이게 플랑드르 지방까지 몽땅 부르고뉴 공작 가문으로 상속되는 배경이야기중에 하나거든요...ㅠ.ㅠ 언젠가 이 상속문제도 써봐야겠습니다.)

 

프랑스의 왕비들...(101) 룩셈부르크의 마리 : 샤를 4세의 왕비 (두번째)

 

룩셈부르크의 마리
Marie of Luxembourg
(1304 – 26 March 1324) 

 

 

룩셈부르크의 마리아(마리)는 1308년 아버지가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었을때 약혼하게 됩니다. 바로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으로 바이에른 공작이자 라인의 팔츠그라프였던 루돌프 1세의 아들인 루드비히였습니다. 하인리히 7세는 사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될수 있었던 루돌프 1세가 자신을 지지해줬고 이때문에 무사히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될수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때문에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딸을 루돌프 1세의 후계자와 결혼시키려했던 것입니다.하지만 이 결혼은 성사되지 않는데 가장 큰 이유는 1311년경 루드비히가 사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리의 삶은 더욱더 불행해지는데 10살이 부모가 모두 사망하기 때문이었습니다. 1311년 어머니인 마르거리테가 사망했으며 2년후인 1313년에는 아버지인 하인리히 7세가 사망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미성년이었던 마리와 동생 베아트릭스는 오빠이자 보헤미아의 국왕이었던 요한의 보호아래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의 삶도 중세 시대 많은 여성들처럼 알려진바가 크게 없는데 아마도 오빠의 궁정에서 조용히 살았었으며 어쩌면 중세 시대 많은 여성 왕족들처럼 자신도 정략결혼의 대상이 될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의 오빠, 룩셈부르크의 요한 (얀 룩셈부르스키)

 

그리고 마리는 1322년 첫번째 아내인 부르고뉴의 블랑쉬와 헤어진 프랑스의 국왕 샤를 4세와 결혼하게 됩니다. 이 결혼은 전형적인 정략결혼으로 마리의 오빠인 요한은 당시 로마인의 왕이었던 바이에른 가문의 루드비히(황제 루드비히 4세)를 견제하려했었습니다. 요한은 아버지가 죽은뒤 로마인의 왕이 되고 싶어했지만 그는 세력이 미약했고 두명의 강력한 경쟁자들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와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의 바이에른 공작 루드비히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서 루드비히를 로마인의 왕으로 지지했었습니다. 하지만 루드비히의 힘이 세지자 그를 견제하기 위해서 다시 합스부르크 가문과 동맹을 맺었으며 또한 제국에 대해서 강력한 반대 세력중 하나였던 프랑스와도 동맹을 맺으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동생인 마리를 국왕 샤를 4세의 두번재 아내로 보냈던 것입니다. 

샤를 4세 입장에서도 마리와의 결혼은 나쁘지 않았는데, 룩셈부르크 가문은 원래 프랑스 왕가와 가까운 가문이었으며 또한 마리는 황제의 딸로 마리를 통해서 제국에 간섭할수 있는 연결고리를 얻을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후계자가 급했던 샤를이 10대 후반으로 바로 아이를 낳을수 있는 마리와 결혼하는 것 역시 도움이 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샤를 4세와 룩셈부르크의 마리의 결혼식

 

1322년 9월 마리는 프랑스의 샤를 4세와 결혼식을 올렸으며 1323년 5월 프랑스의 왕비로 대관했었습니다. 마리는 남편의 바람대로 임신했었지만 1323년말 첫 아이인 딸을 낳지만 곧 사망합니다. 이후 마리는 다시 한번 임신합니다. 아마도 후계자가 급했던 샤를에게 마리가 곧 임신한 것은 매우 기쁜 일이었을 것입니다만 불행은 이어지게 됩니다. 

1324년 3월 임신한 마리와 샤를 4세는 아비뇽으로 가서 교황 요한 22세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었습니다.이때 마차가 전복되었으며 마리는 루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조산합니다만 아이는 몇시간 살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샤를 4세는 의사들을 동원해서 아내를 치료하려했습니다만 마리 역시 결국 3월 26일 사망했습니다.

 

교황을 만나는 샤를 4세와 룩셈부르크의 마리

 

마리가 죽은뒤 샤를 4세는 서둘러 재혼했는데 그는 여전히 후계자가 될 아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