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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왕비들...(100) 룩셈부르크의 마리 : 샤를 4세의 왕비 (첫번째)

엘아라 2022. 9. 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하다보니까 점차 더 익숙한 인물들이 나오긴 하네요.

룩셈부르크 가문도 봐야하는데 말입니다. =-=

 

프랑스의 왕비들...(100) 룩셈부르크의 마리 : 샤를 4세의 왕비

 

 

룩셈부르크의 마리

Marie of Luxembourg 

(1304 – 26 March 1324) 

 

룩셈부르크의 마리는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황제가 된 하인리히 7세와 그의 아내인 브라반트의 마르가레테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왕과 왕비로 대관하는 하인리히 7세와 브라반트의 마르가레테

 

황제 하인리히 7세는 원래 룩셈부르크 백작의 아들로 그리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하인리히 7세의 할아버지인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5세는 원래 림부르크 공작의 아들로 어머니가 룩셈부르크 백작의 상속녀였기에 룩셈부르크 백작령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하인리히 7세는 원래 림부르크 공작 가문의 후손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림부르크 공작령이나 룩셈부르크 백작령 모두 저지주(Low Country)에 속해있었습니다. . 룩셈부르크 백작령이 제국내 지역이긴 했지만 프랑스와 가까웠으며 이것은 상대적으로 룩셈부르크 백작령이 프랑스에 영향을 많이 받는 곳이라는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하인리히 7세가 황제가 될수 있었던 것은 당시 상황이 매우 복잡했고 그에게 운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로마인의 왕이었던 알브레히트 1세가 조카에게 암살당한뒤 제국은 다시 한번 혼란해지게 됩니다. 당연히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는 후보를 내지 못했었는데 이때 당시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필리프 5세가 제국에 개입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인 샤를을 왕위후보로 내세웠으며 여러가지정치적 작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아마도 제국내 제후들이 제국외 세력인 프랑스 왕가에 대해서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필리프 5세는 동생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당시 라이벌이 될만한 제후들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퍼트리는데 주력했고 이것은 다른 유력한 제후들 역시 왕위에 오를수 없는 결과를 낳습니다. 결국 프랑스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필요했으며 비록 프랑스와 강한 유대관계가있긴 했지만 프랑스의 이익을 직접 대변하는 사람이 아닌 하인리히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하인리히 7세

 

마리의 어머니인 브라반트의 마르가레테는 브라반트 공작 요한 1세의 딸이었습니다. 재미난 것은 브라반트의 마르가레테의 고모였던 마리는 프랑스의 필리프 3세의 두번째 부인으로 샤를 4세의 의붓할머니이기도 했습니다. (어랏..이거 친족관계 아닌가=-=;;;) 하인리히 7세가 브라반트의 마르가레테와 결혼한 것인 림부르크 공작령에 대한 문제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림부르크 공작 가문의 남성 직계가 단절되자 림부르크 공작령의 상속을 둘러싸고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림부르크 공작령의 상속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여러명이었는데 먼저 마지막 림부르크 공작의 딸이었던 에멘가르트는 게데른(헬레Gelre)의 백작 레지날 1세와 결혼했고, 로마인의 왕이었던 루돌프 1세로부터 림부르크 공작령에 대한 상속을 승인받게 됩니다. 

 

브라반트 공작 요한 1세와 그의 아내인 플랑드르의 마르거리트 그리고 둘의 네 자녀들

 

문제는 림부르크의 에멘가르트가 후손없이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에멘가르트의 사촌이었던 베르크 백작 아돌프 8세는 자신이 림부르크 공작령에 대한 상속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고, 이 권리를 브라반트 공작 요한 1세에게 팔아버립니다. 브라반트 공작령 역시 저지주에 속해있었으며  공작은 자신의 영지를 넓혀서 림부르크와 브라반트를 어우르는 하로렌의 공작이 되려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 1세는 림부르크 공작령에 대한 권리를 놓칠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림부르크 공작령에 대한 상속권리를 주장할수 잇는 사람은 베르크 백작 뿐만 아니었습니다. 바로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6세는 림부르크 공작의 손자이자 마지막 공작의 사촌으로 역시 림부르크 공작령에 대한 상속권리를 주장할수 있었습니다. 또한 쾰른의 대주교는 브라반트 공작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에 대해서 위협을 느꼈으며 브라반트 공작을 견제해야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250년 경의 하로렌 지방

 

결국 이런 복잡한 상속문제와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쾰른의 대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세력과 브라반트 공작을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세력이 림부르크 공작령에 대한 상속문제를 두고 대립하다가 결국 전쟁을 치루게 됩니다. 이 전쟁이 바로  6년간이나 지속된 림부르크 계승 전쟁이었습니다. 룩셈부르크 백작인 하인리히 6세는 쾰른 대주교를 지지했는데 아마도 이것은 브라반트 공작이나 베르크 백작이 다른 친척들의 합의 없이 그냥 영지에 대한 상속권리를 서로 주고 받은데 불만이 컸기 때문일듯합니다. 이 전쟁은 결국 브라반트 공작의 승리로 끝났으며 림부르크 공작령은 브라반트 공작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이때 1288년 6월에 일어난 보링겐 전투 Battle of Worringen는 중세 유럽의 가장 큰 전투중 하나였으며, 이때 쾰른 대주교와 그의 지지세력들은 대패하게 됩니다. 쾰른 대주교는 포로로 잡혔을뿐만 아니라 룩셈부르크 백작이었던 하인리히 6세와 그의 형제들은 모두 이곳에서 전사하기까지 했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와 숙부들 모두가 전사했을뿐만 아니라 룩셈부르크 지역의 많은 기사들 역시 사망했었기에 룩셈부르크 백작 가문은 힘이 매우 약해졌으며 아마 이것은 하인리히가 프랑스의 국왕에게 보호를 받았던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보링겐 전투

 

이런 복잡한 관계는 브라반트 공작과 룩셈부르크 백작간의 갈등으로 이어질수있었으며 이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킬수도 있었습니다. 결국 두 가문은 서로 화해하기로 했으며 이 결과 룩셈부르크 백작인 하인리히 7세와 브라반트 공작의 딸이었던 마르가레테가 결혼했던 것입니다. 둘은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하인리히 7세와 룩셈부르크의 마르가레테와의 사이에서는 세명의 자녀가 태어납니다. 아들인 요한은  보헤미아의 국왕이 되었었는데 후에 요한의 아들인 카를은 황제 카를 4세가 되었습니다. 딸인 마리아(마리)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으며 또다른 딸인 베아트릭스는 헝가리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요한과 보헤미아의 엘리자베트의 결혼식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