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0-;제가 프랑스를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글을 쓰면서 엄청나게 글을 읽어야하는데 필리프 2세는 그냥 대충 적당히 십자군 전쟁이랑 잉글랜드와의 갈등 정도만 알았는데 여기도 무슨 스캔들이 장난이 아니군요.
덕분에 읽어야할 글이 너무 많습니다. 엉엉엉...ㅠ.ㅠ
프랑스의 왕비들...(79)덴마크의 잉에보르 : 필리프 2세의 왕비(두번째)
덴마크의 잉에보르
프랑스의 왕비
Ingeborg of Denmark
(French: Ingeburge;)
(1174 – 29 July 1237)
잉에보르와 필리프 2세의 결혼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1190년 홀아비가 되었으며 왕비감을 찾고 있었습니다. 특히 필리프 2세에게는 자식이 아들 루이 한명밖에 없었고 루이는 어린시절 허약한 아이였습니다. 이것은 필리프 2세에게 후계자 문제로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자신에게 아들을 낳아줄 또다른 여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게다가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와 잉글랜드의 국왕 리처드 1세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으며 리처드를 견제할만한 동맹을 찾는 것이 중요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찾은 동맹이 바로 덴마크와 덴마크의 국왕 크누트 6세였습니다.
덴마크의 크누트 6세 역시 프랑스와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덴마크를 제국내에 편입하려했던 것 때문이었습니다. 황제는 크누트 6세에게 자신의 봉신으로 충성맹세를 강요했는데 당연히 덴마크 국왕은 이를 거절했었습니다. 이것은 제국과 덴마크가 갈등을 빚게 되는 것으로 덴마크는 제국에 대항할만한 강력한 동맹이 필요했을 것이며 아마도 이때문에 크투트 6세는 동생인 잉에보르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의 혼담을 수락하게 된 것일것입니다.
잉에보르는 강력한 프랑스 국왕과 결혼하는 것이기에 덴마크에는 좀 무리할 정도의 지참금을 가지고 갔었습니다. 또한 크누트 6세는 잉글랜드의 크누트 대왕 이후 덴마크 국왕들이 가지고 있던 잉글랜드 왕위계승권리를 필리프 2세에게 양도했었습니다. 이것은 필리프 2세가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의 경쟁관계에서 명분상으로도 우위를 차지할수있는 바탕을 마련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덴마크 함대를 프랑스에 빌려주기까지 했었다고 합니다.
잉에보르는 프랑스로 가서 아미앵에서 필리프 2세를 만났으며 그 직후인 1193년 8월 14일 아미앵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프랑스의 왕비로 대관식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잉에보르의 삶은 결혼식 직후부터 파탄이 납니다.
필리프 2세는 결혼식 전날부터 잉에보르에 대해서 그다지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는데 결혼식 다음날 그는 잉에보르와 결별하길 원했으며 잉에보르를 데려온 덴마크 사절들에게 잉에보르를 데리고 덴마크로 돌아가도록 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덴마크 사절들은 이를 거절하고 덴마크로 돌아가게 됩니다. 잉에보르는 이제 호의적이지 않은 남편이 있는 프랑스에 남겨지게 됩니다. 필리프 2세는 잉에보르를 수녀원으로 보내버렸으며 잉에보르와의 결혼을 무효로 돌리기 위한 시도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필리프 2세는 잉에보르와 자신의 첫번째 아내가 친족간이라는 위조된 족보를 제시하면서 교회에 결혼 무효를 요구하게 됩니다. 교회법상 7대조까지 공통조상이 있다면 결혼은 친족 결혼으로 무효화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193년 11월 랭스의 대주교였던 상파뉴의 기욤은 국왕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결혼 무효화를 선언합니다. 사실 상파뉴의 기욤은 필리프 2세의 외삼촌이었으며, 이때문에 랭스의 대주교는 국왕의 뜻을 받아들여서 바로 무효화를 선언합니다.
수녀원에 갇혀있던 잉에보르는 이동안 고립된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녀는 프랑스어나 라틴어를 하지 못했으며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도움없이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잉에보르는 남편이 이런식으로 자신과의 결혼을 무효화했다는 것을 알고서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결혼무효를 위해 모인 회의에서 몇마디 알지 못하는 단어로 이런식의 결혼 무효는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했었으며 교황에게 제소하겠다는 뜻을 밝히기 까지 합니다. 그리고 잉에보르의 오빠였던 크누트 6세는 동생을 대신해서 교황에게 사절을 파견해서 필리프 2세가 족보를 위조했으며 이 결혼 무효 선언이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교황은 덴마크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며, 프랑스의 필리프 2세에게 이 결혼 무효가 정당하지 않기에 잉에보르와 재결합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주장에 대해서 필리프 2세 주변의 성직자들 역시 동의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쯤 프랑스 국왕들은 교황의 간섭에서 많이 벗어나있는 상태였습니다. 프랑스 내 주교들 상당수가 교황보다 국왕에게 더 충성을 하는 상황이었으며 이것은 필리프 2세가 교황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해도 된다고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필리프 2세는 애매한 지위의 잉에보르를 강제로 수녀원으로 보내서 연금상태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재혼 상대를 찾게 았습니다. 하지만 필리프 2세의 일은 유럽에 널리 알려졌으며 신붓감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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