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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왕비들...(80)덴마크의 잉에보르 : 필리프 2세의 왕비(세번째)

엘아라 2022. 3. 1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잉에보르의 삶이 험난하더라구요 ㅠ.ㅠ

 

프랑스의 왕비들...(80)덴마크의 잉에보르 : 필리프 2세의 왕비(세번째)

 

덴마크의 잉에보르

프랑스의 왕비

Ingeborg of Denmark 

(French: Ingeburge;)

(1174 – 29 July 1237)

 

필리프 2세는 여전히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기에 서둘러 다른 여성을 찾아야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교황이 결혼 무효를 인정하지 않은 그에게 딸이나 누이를 주려는 가문은 별로 없었습니다. 1196년 필리프 2세는 메라니아 공작의 딸인 메라니아의 아그네스와의 혼담을 진행합니다. 메라니아의 공작은 벨프 가문과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갈등사이에서 영향력을 크게 확대한 인물이었으며 이런 야심이 많았기에 딸을 프랑스 왕비로 보내는 것을 허락했을 것입니다. (...지금보니 아그네스의 자매인 메라니아의 게르투르트는 헝가리 왕비로 오페라 반크반에 나오던 그 사악한 왕비네요 =-=)

 

메라니아 공작 베르톨트와 그의 아내와 자녀들

 

필리프 2세는 재혼하기 위해서 잉에보르에게 결혼무효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잉에보르는 이를 거부했으며 결국 필리프 2세는 잉에보르를 탑에 가두어버리고 사람들을 못만나게 한뒤 1196년 6월 메라니아의 아그네스와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필리프 2세는 잉에보르와는 달리 아그네스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대해줬습니다. 

 

사실 이전의 교황이었던 셀레스티노 3세는 필리프 2세가 자신의 권고안을 무시하고 몇번의 조정을 요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었으며 아마도 이것은 그가 더이상 이 문제에 힘을 쏟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198년 셀레스티노 3세가 죽고 그의 후임으로 인노첸시오 3세가 교황이 되면서 다시 잉에보르 문제가 대두되게 됩니다. 아마 새 교황은 필리프 2세의 행동이 교황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황은 필리프 2세에게 아그네스와 헤어지고 잉에보르를 풀어주고 재결합하라고 명하게 됩니다. 당연히 필리프 2세는 이를 거부했으며 교황은 이를 거부한다면 파문할것이라고 위협했었습니다.

 

교황 인노첸시오3세

 

당연히 필리프 2세는 기존처럼 교황의 명령을 거부했으며 결국 1200년 교황은 필리프 2세를 파문했으며 프랑스 내의 성무를 금지합니다. (프랑스라고 하지만 프랑스 전체가 아니라 필리프 2세가 통치하던 왕실 영지에서만 성무가 금지 되었습니다. ) 성무가 금지되면 교회에서 유아세례와 임종 고백을 제외한 일을 하지 않았기에 기본적으로  결혼이나 장례식 같은 기본적인 일을 할수가 없었으며 이것은 필리프 2세에게 압박으로다가오게 됩니다. 특히 성무가 정지당했기에 필리프 2세의 아들인 루이가 카스티야의 블란카와 결혼식을 프랑스에서 올릴수 없었으며 둘은 노르망디 공작령에서 결혼식을 해야했었다고 합니다. 

 

필리프 2세는 여전히 교황의 명령을 무시했었으며 아그네스와의 사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아그네스와의 결혼을 유지해야할 필요성이 더 있었을 듯합니다. 하지만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 문제 때문에 덴마크와의 동맹이 필요했으며 결국 1200년 9월 교황의 뜻을 받아들여서 아그네스와 헤어지고 잉에보르와 재결합하는데 동의합니다. 이 결과 파문은 취소되었습니다만, 필리프 2세는  아그네스와 헤어지지 않았으며 교황은 다시 한번 필리프2세를 질책하게 됩니다.

 

필리프 2세

 

1201년 3월 필리프 2세는 교황의 대사를 만났으며 아그네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들을 적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다시 한번 협상합니다.  이런 상황은 교착상태로 남았으며 잉에보르는 여전히 갇혀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바뀐것은 1201년 7월로 멜라니아의 아그네스가 셋째아이를 낳다가 사망하게 됩니다. 

 

아그네스가 죽은뒤 필리프 2세는 여전히 잉에보르와 다시 결합할 생각이 없었으며 잉에보르와의 관계를 도리어 아그네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적자로 만드는데 집중했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여전히 잉에보르를 가둬두고 결혼 무효를 받아들이라고 압박을 하게 됩니다. 1201년이후 프랑스에서는 성무가 재개되지만 잉에보르는 여전히 갇혀있었고 필리프 2세에게 핍박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필리프 2세는 1200년대 후반에 사생아 아들이 태어나는데 아마도 그 아들의 어머니와 재혼을 추진했었다는 추정도 있습니다. 

 

잉에보르는 결국 자신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1213년 필리프 2세는 잉에보르와 재결합하기로 결정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잉글랜드 왕위계승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잉글랜드내에서 존왕이 귀족들에 의해서 왕위를 위협당했고 일부 귀족들은 존왕의 조카인 카스티야의 블란카(블랑쉬)와 그녀의 남편인 루이 8세를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추대하려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필리프 2세는 아들에게 명분을 더 해주길 원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잉에보르와의 재결합이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잉에보르는 비록 20여년간 투옥당하고 외면당했었지만 왕비 지위를 회복한뒤 남편과 나쁘지 않게 지냈으며 또한 프랑스 왕비로 프랑스 왕가의 일에 적극적으로 지지했었습니다. 잉에보르가 왕비의 지위를 되찾은 뒤 필리프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루이 8세와 그의 아내인 블랑쉬는 잉에보르에게 왕비로 존경을 표했었습니다. 

 

루이 8세와 카스티야의 블란카

 

1223년 필리프 2세는 사망했으며 그는 유언장에서 잉에보르에게 돈을 주도록 명령을 했었는데 사실 이것은 잉에보르의 지참금을 그대로 돌려준것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또 아들인 루이 8세에게 잉에보르를 잘 대해주라고 했었으며, 루이 8세는 물론 루이 8세의 아들인 루이 9세 역시 잉에보르를 왕비로 대우해줬었다고 합니다.

 

잉에보르는 오래도록 고난을 겪었기에 정치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수도원에서 조용히 자선사업을 하고 남편의 명복을 빌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