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저 가문이 어떻게 되는지 도대체 알수가 없어서 자료를 찾아 적다보니 가문 이야기만 한편을 했네요 =--
프랑스의 왕비들...(77) 에노의 이자벨 : 필리프 2세의 왕비 (두번째)
에노의 이자벨
프랑스의 필리프 2세의 왕비
Isabella of Hainault
(Also spelled: Ysabella de Hainault, Ysabelle de Hainaut or Ysabeau de Hainaut)
(5 April 1170 – 15 March 1190)
에노의 이자벨은 에노의 백작이 되는 보두앵 5세와 그의 아내인 플랑드르의 마르거리트의 첫째딸로 태어났습니다. 이자벨의 할아버지인 보두앵 4세는 후계자가 될 아들을 바랬는데 첫 손녀가 태어나면서 실망스러워했었다고 합니다만 다음해에 남동생인 보두앵이 태어난것을 보고 사망했었다고 합니다.
에노의 이자벨은 어머니인 플랑드르의 마르거리트의 지도하에 교육을 받게 됩니다. 마르거리트는 딸이 많은 것을 배울수 있게 했는데 예법이나 종교 교육은 물론 읽고 쓰고 기도를 암송하는 것등의 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실 당대 왕족 여성들에 비해서도 매우 높은 수준의 교육이었습니다.
에노의 보두앵 5세는 딸이 태어난 다음해에 상파뉴 백작의 후계자인 앙리와 이자벨을 약혼시켰습니다. 앙리의 고모는 루이 7세의 왕비였던 상파뉴의 아델로 아델은 루이 7세에게 후계자가 될 아들 필리프를 낳아줬기에 매우 궁정에서 영향력이 강했었으며, 아마도 보두앵 5세는 이런 상파뉴 가문과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서 딸을 약혼시켰을 것입니다.하지만 이자벨의 결혼 상대를 상파뉴 백작의 후계자는 아니었습니다. 너무 어린시절에 약혼한것이기에 사실 교회법상 이들의 약혼은 언제라도 깨질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에노 백작과 플랑드르 백작은 이 약혼을 다시 한번 확인하긴했었지만 결국 약혼은 깨지게 됩니다.
루이 7세 통치 말기에 플랑드르 백작이자 이자벨의 외삼촌이었던 플랑드르의 필리프 1세의 영향력이 커지게 됩니다. 루이 7세는 아들의 보호자로 그를 선택할 정도였습니다. 플랑드르 백작은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자신의 조카인 이자벨을 루이 7세의 후계자인 필리프의 신붓감으로 추천합니다. 사실 이것은 왕비였던 상파뉴의 아델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이자벨은 원래 아델의 조카와 약혼했었는데 이 약혼을 깨고 아델의 아들과 결혼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자벨은 지참금으로 아르투아 지방을 가져가기로 약속했고 이것은 왕가에 이익이 되는 것이기에 결국 1180년 4월 이자벨은 루이 7세의 아들이자 공동 국왕이기도 했던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결혼한 다음달에 생 드니에서 대관식을 갖었습니다. 하지만 필리프 2세의 어머니인 아델은 당연히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고부간의 갈등은 예상할수 있었던 일이기도 했습니다.
결혼초 이자벨은 나이가 너무 어렸으며 이때문에 남편인 필리프 2세의 애정을 얻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1184년 플랑드르 백작이었던 외삼촌이 필리프 2세와 갈등을 빚기 시작하면서 더욱더 문제가 됩니다. 당연히 이자벨의 아버지는 플랑드르 백작의 동맹이었고 이것은 필리프 2세가 애정없는 아내인 이자벨과 헤어지기를 바라는 원인이 됩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필리프 2세가 아내와 헤어지기 위해서 사람들을 소집했을때 이자벨은 참회하는 복장에 맨발로 교회에 가서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하소연했습니다. 이런 이자벨의 모습에 사람들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자벨을 대신해서 국왕과 대신들에게 항의를 했었습니다. 상황이 나빠지자 필리프 2세의 숙부였떤 로베르 드 뢰가 중간에 개입해서 아르투아 지방을 잃는 것은 큰 손실이기에 국왕에게 아내와 헤어지지 말것을 충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자벨의 아버지인 에노 백작이 나서서 처남이 아닌 국왕을 지지했으며 이후 필리프 2세는 아내와 헤어지겠다는 생각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리고 1187년 9월 이자벨은 필리프 2세가 기다리던 후계자가 될 아들 루이를 낳았습니다. 아마 이자벨의 지위는 아이를 낳고 나서 더욱더 확고해졌을 것입니다만 이자벨의 의무는 아이 하나만 낳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자벨은 첫아이를 낳은뒤 오래도록 임신을 못하고 있다가 어렵게 1190년 3월 두번째 아이를 낳습니다. 이때 이자벨은 쌍둥이 아들을 낳았지만 그중 한명은 태어나자마자 사망했으며, 다른 한명은 태어난지 3일만에 사망했습니다. 이자벨 역시 아이를 낳은 다음날 합병증으로 사망했습니다.
필리프 2세는 아내가 죽었을때 아내 곁에 없었으며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함께 제 3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나섰다고 합니다.
이자벨의 아들인 루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프랑스의 국왕 루이 8세가 되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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