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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들과 그 후손들...(331)마리야 안드레예브나 루미안츠예바 : 표트르 대제의 정부(?) :두번째

엘아라 2022. 3. 2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오래살아서 그런지 이야기들이 좀 있더라구요.=-=

 

정부들과 그 후손들...(331)마리야 안드레예브나 루미안츠예바 : 표트르 대제의 정부(?) :두번째

 

마리야 안드레예브나 마트비예브나

마리야 아늗레예브나 루미안츠예바

 Maria Andreyevna Rumyantseva née Matveyeva 

Мария Андреевна Румянцева (Румянцова), урождённая Матвеева 

(1699–1788)

 

궁정에서 추방된지 3년 뒤인 1735년 마리야의 남편인 알렉산드르 루미안츠예프는 다시 군의 지위로 복직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능력있는 군인이자 외교관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1738년에는 현재 우크라이나 지역의 총독으로 키예프로 갔으며 마리야와 가족들 역시 남편과 함께 키예프로 가게 되었습니다. 

안나 여제가 통치하던 당시 마리야는 이전에 잘 알고 지냈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와 다시 연락을 했으며, 아마도 훗날 옐리자베타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군의 지지를 얻을때 마리야의 남편 역시 여기에 가담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옐리자베타 여제

 

1740년 옐리자베타 여제가 즉위한뒤 마리야와 마리야의 남편인 알렉산드르 루미안츠예프는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됩니다. 알렉산드르 루미안츠예프는 외교관으로 콘스탄티노플에 갔었으며 이후 외교관으로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1743년 오보 조약을 서명한 사람이 바로 알렉산드르 루미안츠예프이기도 했었습니다. (오보 조약으로 홀슈타인-고토로프의 아돌프 프리드리히가 스웨덴의 왕위계승자가 될수 있었습니다. ) 

마리야 역시 궁정에서 확고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데 남편이 백작 지위를 얻게 되면서 마리야 역시 백작부인이 되었을뿐만 아니라 옐리자베타 여제와의 관게 덕분에 궁정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었습니다. 

 

1744년 옐리자베타 여제는 마리야에게 황태자비로 내정된 안할트-제브르스트의 조피(후예 예카테리나 2세)의 시녀장으로 그녀의 궁정을 관리하도록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위는 곧 사라지는데 예카테리나 2세는 마리야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실제로 황태자비의 시녀장 지위에서 해임되었을때 황태자비의 어머니와 수상에 대한 적의때문이라고 여겨졌었습니다만, 마리야는 여전히 여제의 친한 친구로 궁정에 남아서 지위를 누렸었습니다. 아마도 마리야가 해임된것은 정치적으로 미묘한 문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야는 여제의 친한 친구였으며 마리야의 남편은 외교관이자 영향력있는 정치가로 내각의 수상이 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제는 그를 수상으로 임명하길 거부했었는데 이런 상황과 연결되어서 마리야 역시 황태자비의 시녀장 지위를 유지할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카테리나 알렉세예쁘나 대공비, 후에 예카테리나 2세

 

1749년 마리야의 남편인 알렉산드르가 사망하고 마리야는 과부가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궁정에서 머물렀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했었습니다.  궁정내에서 빚도 많이 졌는데 빚을 갚기 위해서 옐리자베타 여제의 도움을 자주 받았으며 후에는 예카테리나 2세의 도움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는 마리야가 처음에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야는 궁정내에서 영향력이 컸으며 평가도 좋았었습니다. 게다가 마리야의 딸인 프라스코비아는 예카테리나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결국 예카테리나 2세는 즉위한뒤 마리야를 자신의 궁정 시녀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마리야의 아들인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루미안츠예프에게도 군의 높은 지위를 부여했었습니다. 이후 마리야는 여전히 궁정에서 황실 가족들과 친하게 지냈었으며 궁정내 행사에 참석했었습니다. 이를테면 마리야는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이었던 파벨 페트로비치 대공의 첫번째 결혼식 연회에서 파벨 대공과 처음으로 춤을 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마리야는 매우 춤을 잘 췄으며 파벨 대공은 이를 기억하고 마리야와 춤을 췄다고 합니다. 또 시간이 지나서 예카테리나 2세가 연 또 다른 무도회에서 여제의 손자였던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대공과 함께 폴카를 추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나이든 후의 마리야, 옆의 흉상은 예카테리나 2세 같습니다.

 

마리야는 화려한 생활을 했지만 다른 이들을 돕는 일 역시 했는데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헌신적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마리야는 당대 고아나 불우한 어린 아이들을 받아들여서 적극적으로 돌봤었다고 합니다.

 

마리야는 1788년 사망했었습니다.

 

마리야는 아들인 표트르와 세명의 딸인 예카테리나, 프라스코비아, 다리아를 낳았습니다.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루미안츠예프는 아버지처럼 군인으로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군사 이론가이기도 했었습니다. 특히 그는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었습니다. 그리고 포템킨은 러시아 군 개혁을 위해서 그의 이론을 채택하기도 했었다고 하빈다. 

마리야의 딸들은 모두 고위 귀족들과 결혼했지만, 예카테리나는 결혼 얼마뒤 남편과 헤어져서 평생 부모와 살아었습니다. 둘째딸인 프라스코비아는 예카테리나 2세의 친구로 궁정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막내딸인 다리야는 러시아 사교계에서 유명한 여성이기도 했었습니다.

 

마리야의 딸 프라스코비아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