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뭐랄까 요즘 왜이리 마음이 조급한걸까요 ㅠ.ㅠ
예전에는 뭐 느긋하게 하면 되지..이런 생각이었는데 요즘에는 글을 써도써도 더 아직도 안됐어..이런 생각뿐이네요..ㅠ.ㅠ
프랑스의 왕비들...(67) 키예프의 안나 : 앙리 1세의 왕비 (세번째)
키예프의 안나
안나 야로슬라브나
프랑스의 왕비
Anne of Kiev or Anna Yaroslavna
(c. 1030 – 1075)
안나의 석상
1060년 안나의 남편인 앙리 1세가 사망하고 둘의 아들이었던 필리프가 프랑스의 국왕 필리프 1세가 됩니다. 필리프 1세가 즉위했을때 그는 미성년이었으며 이때문에 섭정이 필요했었습니다. 앙리 1세는 죽기전 자신의 매제였던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를 섭정으로 임명했었습니다. (...아 이름이 익숙해서 봤더니 정복왕 윌리엄의 장인인 플랑드르 백작이 바로 이 보두앵 5세군요. -0-;;;)
안나는 정식으로 대관한 왕비였으며 국왕의 어머니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안나는 비록 공식적으로 아들의 섭정은 아니었지만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마도 보두앵 5세와 함께 섭정으로 일을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때문에 필리프 1세치세 초기의 문서에 자주 안나가 등장하는 것으로 추정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1061년경 안나의 기록이 갑자기 사라지는데 이것은 그녀가 재혼하는 것과 영향이 있습니다. 안나는 1061년이나 1062년경 발루아 백작 랄프 4세와 재혼을 했었습니다. 발루아 백작 랄프 4세는 프랑스 왕가의 영지인 파리지역 근처의 강력한 영주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카페 가문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1041년경부터 카페 왕가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며 앙리 1세의 강력한 동맹중 하나였었습니다. 안나와 랄프 4세가 재혼한 상황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았습니다만 안나가 문서에서 이름이 사라졌으며 아마도 아들인 국왕과 살짝 불화를 겪게 됩니다.사실 왕비가 재혼한것에 대해서 경계하는 면이 있긴 했겠지만 그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나가 랄프 4세와 재혼한 것 차제는 스캔들이 아니었지만 랄프 4세가 안나와 결혼한것은 스캔들이기도 했었습니다. 왜냐면 랄프 4세는 이전의 아내와 결혼 관계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안나와 재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랄프는 Haquenez라는 별명이나 성을 가진 여성과 1060년 결혼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그녀가 간통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면서 그녀와의 결혼이 무효라고 선언했으며 이후 안나와 재혼했었습니다. 이에 Haquenez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서 로마로 향했으며 교회는 이 사건을 조사하게됩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랄프 4세는 교회에 의해서 파문당하게 됩니다.
필리프 1세는 어머니의 결혼에 화를 내게됩니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안나의 두번째 남편이 교회의 파문까지 당한 인물이라는 것에 있을 듯합니다. 게다가 랄프 4세는 필리프 1세의 섭정이었던 보두앵 5세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인물이기도 했기에 당연히 보두앵과 주변 인물들은 랄프 4세가 국왕의 새아버지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기에 어린 국왕을 더욱더 부추겼을 것입니다. 이런 불화와 교회의 파문은 결혼후 안나와 랄프 4세가 궁정에서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것으로 해결이 됩니다. 하지만 안나의 영향력을 줄지 않았으며 이후 궁정에 다시 드나들었습니다. 게다가 보두앵 5세가 죽을무렵 필리프 1세는 랄프 4세를 새아버지로 부르기까지 했었으며 이후 랄프 4세는 국왕의 측근으로 여러문제에 대해서 국왕을 지지했었으며 전쟁에도 참전했었습니다.
1074년 랄프 4세가 죽으면서 안나는 또한번 과부가 됩니다만 안나 역시 곧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안나가 언제 사망했는지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는데 일반적으로는 1075년경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기록은 1080년 필리프 1세에 대한 기록에서 어머니인 안나가 이미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기에 적어도 두번째 남편이 죽은 1074년 이후에서 1080년 이전 사이 언젠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안나는 앙리 1세와의 사이에서 네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추정합니다. 그중 두 아들인 필리프 1세와 베르망두아 백작 위그만이 정확히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필리프 1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프랑스의 국왕이 되었으며 베르망두아 백작 위그는 베르망두아 백작 지위를 받았으며 또한 1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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