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있는글들/목요일 : 프랑스의왕비들

프랑스의 왕비들...(68) 홀란드의 베르타 : 필리프 1세의 왕비

엘아라 2021. 10. 2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아 스캔들의 필리프 1세군요... 

음냐..왕권 강화하기도 바빠야하는거 아닙니까 왜 대규모 스캔들을 일으키는겁니까 -0-;;;;

그나저나 여기도 정치상황이 엄청 복잡한데 말입니다..ㅠ.ㅠ

(앙주 가문할때 읽어놓긴 했지만 그래도 복잡한것은 복잡한거죠..ㅠ.ㅠ)

 

프랑스의 왕비들...(68) 홀란드의 베르타 : 필리프 1세의 왕비 

 

홀란드의 베르타

Bertha of Holland

 (c. 1055 – 15 October 1094)

 

베르테 또는 프리슬란트의 베르타 또는 베르트라다 등으로 알려진 홀란드의 베르타는 홀란드 백작이었던 플로랑 1세와 그의 아내인 작센의 게르트루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베르타의 아버지인 플로랑 1세는 홀란드 백작의 아들로  빌 서쪽의 프리슬란트 지역을 통치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베르타의 어머니인 게르트루트는 작센의 공작인 베른하르트 2세의 딸로 아버지가 프리슬란트 지역에 대한 통치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아마도 이것이 그녀가 플로랑 1세와 결혼한 이유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베르타의 아버지인 플로랑 1세는 1061년 사망했으며 베르타의 어머니인 게르트루트는 미성년인 아들의 섭정으로 일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1063년 플랑드르 백작의 아들이었던 로베르와 재혼합니다. 로베르는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의 아들이었습니다. 로베르는 게르트루트와 결혼한뒤 게르트루트와 함께 섭정으로 일을 했었습니다만 그는 더 복잡한 플랑드르 상속 문제에 끼어들게 됩니다. 사실 그는 아버지 생전에 플랑드르 지역에 대한 상속권리를 포기하고 돈을 받았었습니다. 그리고 형인 보두앵 6세가 즉위한 뒤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조카인 아르눌프 3세가 백작이 되자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플랑드르의 로베르 1세의 씰

 

로베르는 누이인 마틸다와 정복왕 윌리엄의 도움을 받아서 플랑드르 백작령을 무력으로 점령합니다. 보두앵 6세의 아내와 아들들은 이에 대해서 대항했었는데 여기에 프랑스 국왕이었던 필리프 1세가 외삼촌인 로베르가 아닌 사촌들을 지지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집니다. 결국 로베르는 1071년 플랑드르 백작이 되었고 국왕인 필리프 1세와 화해를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로베르는 결국 의붓딸인 베르타를 자신의 사촌인 필리프 1세와 결혼시키게 된것입니다. 

 

사실 베르타는 프랑스의 국왕과 결혼하기에는 그다지 높지 않은 신분으로 여겨졌었습니다. 비록 외할아버지가 작센의 공작이긴했지만 그것은 프랑스 내에서 그다지 영향력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대가문의 출신도 아니었으며 카페 가문이나 카롤링거 가문같은 프랑스의 왕가와도 그다지 연결고리가 큰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베르타가 왕가와 친척관계가 아니라는 의미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여전히 친족간의 결혼을 금하고 있었고 여전히 카페 가문은 교회를 존중하는 입장이었기에 가까운 친족과는 결혼할수 없었습니다.  결국 베르타는 왕실에서 선택할수 있는 나름 괜찮은 선택이었다고도 볼수 있습니다

 

1072년 베르타는 프랑스의 국왕 필리프 1세와 결혼해서 프랑스의 왕비가 됩니다만 아마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기에 그녀는 궁정에서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결혼후 6년간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기에 이 역시 베르타가 궁정에서 숨죽이며 살았던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르타는 1078년 딸인 콩스탕스를 낳은 뒤 두 아들인 루이와 앙리를 낳게 됩니다. 아이들이 태어났을때 왕실에서는 기적이라고 여겼었는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국왕 부부는 아이를 얻기 위해서 노력을 했으며 수아송에 있던 은둔 성자인 성 아르눌프가 둘을 위해 기도한뒤 아들이 태어나면 카롤링거 왕가의 이름인 루이라는 이름을 쓰라고 했다고합니다. 

 

필리프 1세와 베르타 그리고 둘의 아이들

 

 

 

아이들이 태어난 뒤 베르타와 필리프 1세의 사이는 멀어지게 됩니다. 부부가 정확히 왜 멀어졌는지는 알려져있지 않지만 필리프 1세는 아내에 대한 마음이 차가워졌으며 얼마뒤 그의 마음에 다른 여성이 들어오게 됩니다. 바로 베르트라다 드 몽포르라는 이름의 여성이었습니다. 1092년 필리프 1세는 아내와 헤어지고 베르트라다와 재혼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합니다. 당연히 베르타는 이에 대해서 반발합니다만 이 결혼에 베르타만 반발한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베르트라다 드 몰포르는 바로 앙주 백작 풀크 4세의 아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필리프 1세의 아내인 베르타는 물론 베르트라다 드 몽포르의 남편인 앙주의 풀크 4세 역시 이에 대해서 반발했었습니다. 

 

필리프 1세는 베르트라다와 결혼하기 위해서 베르타를 성에 감금합니다. 이것은 베르타의 의붓아버지였던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의 반발을 사는 것이었습니다만 이미 늙은 로베르는 의붓딸을 구할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베르타는 1094년 연금당한채 사망했습니다. 필리프 1세는 복잡한 문제 없이 자유로워졌고 사랑하는 베르트라다 드 몽포르와 재혼할수 있었습니다. 

 

필리프 1세와 베르트라다 드 몽포르 그리고 각자의 배우자인 베르타와 앙주의 풀크 4세

 

베르타는 필리프 1세와 세아이가 있었는데 그중 두 아이가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딸인 콩스탕스는 안티오크의 보에몽 1세와 결혼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인 루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프랑스의 국왕 루이 6세가 됩니다. 루이 6세는 당연히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던 아버지와 새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