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190) 세르비아의 엘레나 : 이오안 콘스탄티노비치의 부인 (첫번째)

엘아라 2021. 10. 6.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오랫만에 하니까어디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기억이 안나네요 아하하..-0-;;;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네 이야기하던것이 생각이 났네요.

그나저나 이 집안 어디까지 해야하는지 고민이군요 -0-;;;

 

....ㅠ.ㅠ 발칸 반도나 동유럽은 진짜 하나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세르비아를 보다가 삘받아서 정신차려보니 세르비아 이야기만 가득이군요.

후훗..하지만 다음주는 엘레나의 외가인 몬테네그로입니다. 엘레나의 외가가 또 가족 관계로 장난이 아니죠 -0-;;;;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190) 세르비아의 엘레나 : 이오안 콘스탄티노비치의 부인 (첫번째)

 

세르비아의 엘레나

러시아의 옐레나 페트로브나 공비

Princess Helen of Serbia 

(4 November [OS 23 October] 1884 – 16 October 1962)

아버지의 대관식 이후 거리를 행진할때 옐레나

 

 

세르비아의 엘레나 공주는 세르비아의 국왕 페타르 1세Петар I Карађорђевић와 그의 아내인 몬테네그로의 조르카Кнегиња црногорска Зорка(세르비아에서 조르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지만 원래 이름은 루비차 Љубица라고 합니다. 로마자로 표기했는데 봐도 루비차인데 루비카라고 쓰는 것은 어디서 나온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ㅠ.ㅠ 조르카는 그냥 조르카라고 읽어주는데 말입니다.)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엘레나의 아버지인 페타르는 이전 세르비아 국왕의 아들은 아니었습니다만 복잡한 세르비아 정치 상황으로 인해서 국왕이 될수 있었습니다. 세르비아는 오래도록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이후 이슬람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이슬람 세력의 영향력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은 모두 기독교(정교회)를 믿는 지역이었기에 당연히 이슬람 세력과 갈등을 빚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세르비아에 대해서 오스만 제국은 가중한 세금을 부여했었으며 이것은 세르비아가 오래도록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 반대하는 시작하는 원인이 됩니다. 16세기가 되면서 오스만제국의 행정력이 약화되면서 세르비아의 일부 지역에서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가문의 투쟁상황하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또 세르비아의 일부지역을 얻습니다.  이후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투쟁이 격화되면서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이 번갈아가면서 통치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엘레나의 아버지 페타르 1세 (국왕이 되기 전)

 

19세기가 되면서 세르비아는 다른 많은 나라들처럼 국가 정체성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으며 특히 오스만 제국의 통치아래있던 많은 기독교 나라들처럼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게 됩니다. 특히 세르비아라는 이름이 세르브 인들이 사는 지역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민족적 동질성 역시 가지고 있었기에 독립 운동을 더욱더 활발히 일어나게 됩니다. 특히 19세기 초반 민중봉기를 이끌었던 밀로시 오브레노비치가 세르비아의 통치자가 되었고 그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펼쳐나갔으며 결국 19세기 중후반무렵 완전히 독립하게 됩니다.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세르비아의 군주

 

19세기 밀로시 오브레노비치가 첫번째 세르비아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만 세르비아의 정치 상황은 안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려는 움직임은 좋았지만 세르비아가 자유주의적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주변 강대국들이자 세르비아에 도움을 줄수 있는 오스트리아나 러시아가 반대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나폴레옹 전쟁이후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강력한 보수주의를 선택했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당연히 유럽 내부에서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새로 성립된 세르비아가 자유주의적 헌법등을 선택한다면 유럽내의 사람들을 자극할것이라 여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주변 강대국의 강압은 세르비아 내부에서 불만을 품는 원인이었으며 결국 이때문에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는 아들에게 양위하고 세르비아를 떠나야했었습니다. 

밀로시 오브레노비치의 장남인 밀란 오브레노비치는 즉위한뒤 한달도 안되어서 사망했으며 그의 동생인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가 미성년으로 군주 지위를 이어받습니다만 안정적으로 유지할수 없었기에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가 이어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 역시 결국 군주 지위에서 물러냐야했으며 퇴위했었던 밀로시 오브레노비치가 돌아와서 세르비아의 군주가 됩니다.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세르비아의 군주, 엘레나의 할아버지

 

하지만 세르비아의 혼란 상황은 계속되는데 밀로시 오브레노비치가 죽고 그의 아들인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가 군주지위를 이어받게 되지만 그 역시 암살당하게 됩니다. 통치 군주 지위는 밀로시 오브레노비치의 조카이자 미하일로 오브네노비치의 사촌이었던 밀란 오브레노비치가 이어받았습니다. 하지만 밀란이 즉위했을때 그는 미성년자였기에 통치는 다른 인물이 하게 되었습니다. 밀란 오브레노비치는 성인이 된뒤 통치를 시작했었습니다. 그는 열정적인물로 결국 세르비아 왕국을 성립해서 첫번째 국왕 밀란 1세가 되었습니다만 그 역시 세르비아를 조율하는데는 실패했습니다. 게다가 아내인 나탈리아와도 사이가 나빴으며 이것은 그가 세르비아에서 밀려나는 원인이 됩니다. 밀란 오브레노비치는 아들인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에게 왕위를 물려줘야했었습니다.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는 아버지 밀란 1세의 뒤를 이어서 국왕 알렉산다르 1세가 됩니다. 하지만 그 역시 세르비아 내부 문제를 해결할수는 없었습니다. 특히 드라가 마신과의 결혼은 세르비아 내부의 귀족들의 큰 반발을 가져왔었습니다. 특히 후계자로 고모의 손녀와 결혼한 몬테네그로의 미르카를 선택하면서 반발은 극에 달했으며 결국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와 그의 아내인 드라가 마신은 살해당하게 됩니다. 

 

알렉산다르 1세와 그의 아내인 드라가 마신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가 죽은뒤 세르비아의 국왕이 된 인물이 바로 엘레나의 아버지인 페타르 1세였습니다. 페타르 1세는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의 뒤를 이어서 세르비아의 군주가 되었던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의 아들이었습니다. 세르비아내에서는 더이상 오브레노비치 가문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았고 이때문에 다른 후보들을 찾아야했는데 페타르의 아버지인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역시 세르비아의 통치 군주였었고 이것은 페타르가 세르비아의 국왕이 될수 있는 명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페타르 1세의 대관식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