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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통치 가문들...번외편12. 스튜어트 가문 : 첫번째 알바니 공작 가문

엘아라 2020. 7. 3.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스튜어트는 얼마나 많은지 족보 따지다가 머리 깨지겠습니다. ㅠ.ㅠ

 

유럽의 통치 가문들...번외편12. 스튜어트 가문 : 첫번째 알바니 공작 가문

 

 

알바니 공작 지위는 스튜어트 왕가 이후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 왕가에서 국왕의 자녀들에게 주던 지위중 하나였습니다.  마지막 알바니 공작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은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였던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되는 카를 에두아르트였습니다. 그는 1차대전때 영국의 적국인 독일에서 싸웠기에 영국에서는 이런 이들의 지위를 박탈했었으며 카를 에두아르트 역시 아버지인 레오폴드에게서 물려받은 알바니 공작 지위를 박탈당했었습니다.

 

스튜어트 가문 출신의 알바니 공작의 문장

 

하지만 이 지위를 처음 받았던 인물은 스튜어트 가문 출신으로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된 로버트 2세의 셋째아들이었던 로버트 스튜어트였습니다. 로버트 스튜어트는 강력한 군인으로 성장하는데 특히 로버트 2세가 즉위한뒤 아버지를 대신해서 형과 함께 불안정한 스코틀랜드 상황을 장악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형인 로버트 3세가 전투중 부상을 입고 난뒤 세력이 약해졌으며 이런 틈을 노려서 그는 점차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특히 조카였던 로스시 공작 데이비드 스튜어트와 마찰을 빚었으며 결국 그가 죽는데 관여를 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로버트 3세가 막내아들이자 후계자가 된 제임스의 안위를 걱정하게 만들었었죠. 결국 어린 제임스는 프랑스로 보내지게 됩니다만, 가다가 잉글랜드 사략선에 붙잡히게 되고 결국 오래도록 잉글랜드의 포로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형인 로버트 3세가 죽고 난뒤 알바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는 이제 스코틀랜드의 섭정으로 스코틀랜드를 통치하게 됩니다. 그는 잉글랜드에 조카인 제임스의 몸값을 내고 돌아오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제임스가 그저 선왕의 아들일뿐이라고 이야기했죠. 이것은 아마도 제임스가 돌아올경우 그의 섭정 지위를 오래 유지 못할것이기 때문인것과 몸값을 낮추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국왕"과"왕자"의 몸값은 당연히 다를테니까요.

 

알바니 공작은 섭정으로 스코틀랜드를 통치했었습니다만 모든 귀족들이 그를 지지한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특히 영지를 두고 여러 귀족들과 분쟁이 있었는데 결국 알바니 공작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알바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는 1420년 사망했으며 그의 지위는 아들인 머독 스튜어트가 이어받게 된다고 합니다.

 

알바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의 씰

 

 

머독 스튜어트는 1402년 전투중 잉글랜드에서 포로로 잡혔으며 이후 10여년 이상을 잉글랜드에서 포로로 지내게 됩니다. 이때 그는 사촌이었던 제임스 스튜어트와도 함께 지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1416년 머독 스튜어트는 잉글랜드의 고위 귀족 포로였던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포로교환으로 풀려나서 스코틀랜드로 돌아갈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420년 아버지인 알바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가 죽자 아버지의 알바니 공작 지위와 스코틀랜드 섭정 지위를 이어받게 됩니다.

 

머독 스튜어트는 아버지인 로버트 스튜어트처럼 여전히 잉글랜드에서 포로로 살고 있는 제임스 1세의 귀환에 대해서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제임스가 돌아올경우 섭정으로 스코틀랜드를 통치하고 있는 그의 권력에 타격이 올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의회의 압력으로 머독 스튜어트는 제임스가 귀환할수 있도록 협상을 진행해야했었습니다.

 

머독 스튜어트의 씰중 일부

 

제임스 1세는 1424년 아내인 조앤 보퍼트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대관식을 치루게 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권력이 없었습니다. 특히 알바니 공작과 그의 지지자들은 강력한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에 더했었죠. 그러나 상황은 바뀌는데 1424년 알바니 공작을 지지하던 군인들과 그 세력들은 100년전쟁에서 동맹인 프랑스 측에 참전을 하고 있었고 1424년 8월 17일 베르뇌유 전투에서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군은 잉글랜드 군에 대패를 했으며 알바니 공작의 핵심 지지세력이었던 버컨 백작 존 스튜어트(알바니 공작의 머독 스튜어트의 동생)과 4대 더글라스 백작이었던 아치볼드 더글라스가 전사합니다. 이로써 알바니 공작의 세력은 크게 흔들리고 제임스 1세는 이를 놓치지 않습니다.

 

제임스 1세는 사촌인 알바니 공작과 그의 아들들을 체포했으며 반역죄로 기소했습니다. 그리고 1425년 두 아들들과 함게 처형하면서 제임스 1세는 알바니 공작 가문에게서 정치적 권력을 되찾았을뿐만 아니라 왕위는 물론 목숨까지 위협하던 이들을 처리했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

 

머독 스튜어트의 아들들중 유일하게 제임스 "모르mor" 스튜어트만이 체포당하는 것을 피해서 도망갔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는 외가의 도움으로 스코틀랜드의 왕위계승을 주장하면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아일랜드로 도망가야했었으며 평생 아일랜드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고 사망했습니다.

 

이렇게 제임스 스튜어트 이후 알바니 공작 가문의 적자인 남성 직계는 단절되게 됩니다. 하지만 제임스 스튜어트는 아일랜드에서 한 여성과 함께 지냈으며 둘은 일곱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중 장남이었던 제임스 "백Beag" 스튜어트는 아버지와 달리 스코틀랜드의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으며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서 국왕들에게 충성스러운 인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제임스의 아들인 윌리엄 스튜어트는 발퀴더Balquhidder의 영주가 되었고 여러 분가를 형성하는 인물이 된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