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스코틀랜드도 점점 다해가긴한데 말입니다.
방대한 스튜어트 가문을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고민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일단은 스코틀랜드 왕가 이전의 스튜어트 가문과 스코틀랜드 왕가인 스튜어트 가문 그리고 단리경네 가문이랑 그외 다른 방계가문들을 좀 봐볼까하는데 가계도 눈빠지게 봐야할듯합니다.
....솔직히 한주에 한가문씩 쓰는데 글읽는거는 제일 많을듯합니다. ㅠ.ㅠ
유럽의 통치 가문들...(16) 부르스 가문 : 스코틀랜드의 왕가
후에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독립을 이끌어내서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된 로버트 부르스는 바로 스코틀랜드에 있는 부르스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이 가문의 기원은 좀 복잡하기도 합니다.
가문의 이름인 부르스는 프랑스어인 de Brus 또는 de Bruis에서 나온것으로 현재 브릭스Brix지방을 의미하는 것이라 추정합니다. 정복왕 윌리엄을 따라온 기사중 한명이 가문의 조상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합니다.
부르스 가문의 배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부르스 가문의 조상은 12세기 스코틀랜드에 아난데일의 첫번째 영주가 되는 로버트 드 부르스Robert de Brus입니다. 그는 잉글랜드 궁정에 피신해있다가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된 데이비드 1세를 따라 스코틀랜드로 온 것으로 데이비드 1세의 군 총사령관이었다고 합니다. 로버트 드 부르스는 데이비드 1세가 잉글랜드를 공격할때, 데이비드 1세를 따르는 것을 거부하고 잉글랜드를 지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두 아들중 로버트(로버트 2세 드 부르스)는 아버지와 달리 스코틀랜드를 지지하면서 스코틀랜드에 남았으며 아버지의 스코틀랜드쪽 영지를 얻었다고 합니다. (부르스 가문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로버트 드 부르스는 스코틀랜드쪽에 선 아들 로버트 2세를 전투에서 포로로 사로잡아서 스티븐에게 넘겼다고합니다 -0-;;)
아난데일 영주 지역
이렇게 스코틀랜드쪽 부르스 가문은 아난데일을 중심으로하는 지역을 확고히 했으며 가문의 영지는 점차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경계 부근으로 넓혀가게 됩니다. 그리고 부르스 가문이 스코틀랜드 왕위계승에 끼어들수 있게 된것은 4대 아난데일의 영주였던 로버트 4세 드 부르스가 헌팅든 백작의 데이비드의 딸인 이소벨과 결혼하면서 였습니다. 이소벨은 데이비드 1세의 증손녀이자 스코틀랜드의 국왕 말콤 4세와 윌리엄 1세의 조카이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연결고리는 알렉산더3세 사후 스코틀랜드의 왕가의 후계자 문제가 발생했을때 부르스 가문이 혈연관계를 통해서 스코틀랜드의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할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될뿐만 아니라 부르스 가문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 넓은 영지를 가질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의 아들인 5대 아난데일의 영주인 로버트 5세 드 부르스는 알렉산더 3세 시기에 후계자지위를 받기도 했었으며 알렉산더 3세 사후에 존 발리올과 함께 스코틀랜드 왕위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로버트 5세 부르스의 씰
6대 아난데일의 영주였던 로버트 6세 드 부르스는 여러 전쟁에 참전한 기사이자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카리크의 여백작이었던 마조리와 결혼했는데, 마조리의 첫번째 남편은 로버트 드 부르스와 함께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던 사이였습니다. 그는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러 갔다가 사망했으며 그 부고를 로버트 6세 드 부르스가 마조리에게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져서 결혼했었다고 합니다. 이 결혼으로 당연히 부르스 가문은 카리크 백작령도 손에 넣게 되죠.로버트 6세 드 부르스는 아마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딸인 이사벨을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알렉산더 3세의 사위이기도 했었던 에릭 2세에게 시집보내기도 했었습니다.
아난데일의 영주로써의 부르스 가문의 문장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점령했던 시기, 부르스 가문은 에드워드 1세를 지지했으며 잉글랜드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었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6세 부르스의 아들이자 어머니가 죽은뒤 카리크 백작 지위를 물려받은 젊은 로버트 부르스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다른 행동을 합니다. 물론 부르스 가문 전체가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할때 젊은 로버트 부르스 역시 함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하지만 1297년 1차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카리크 백작은 다른 이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에서 스코틀랜드 측에 참전하게 됩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잉글랜드 국왕을 지지하길 바랬다고 합니다만 22살의 젊은 백작인 로버트 부르스는 자신의 뜻대로 행동합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세력은 강했고 결국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를 점령합니다. 이때 로버트 부르스는잉글랜드의 국왕과 스코틀랜드의 반란군 사이에서 애매한 행동을 하는데 그는 여전히 반란세력을 도우며 지지했지만 에드워드 1세에 강압에 굴복한 듯한 모습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아마 로버트 부르스는 늙어가는 에드워드 1세가 죽고 나름 능력없어보이는 에드워드 2세가 왕위에 오르길 기다리고 있었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기다림은 위협이 되는데 거기에는 그의 정적인 존 코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은 이전부터 정적으로 오래도록 갈등상황을 유지했었습니다. 이것은 특히 윌리엄 월리스가 섭정 지위를 사임한뒤 둘이 섭정이 된 후부터 계속되었었죠. 결국 로버트 부르스는 정적인 존 코민을 살해해서 제거한뒤 1306년 스코틀랜드의 왕위에 올랐으며 이렇게 부르스 가문이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얻게 됩니다.
로버트 더 부르스
로버트 부르스의 통치 초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잉글랜드는 강력했고 저항하는 스코틀랜드군은 미약해보였죠. 하지만 에드워드 1세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2세가 즉위한뒤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특히 1314년 6월에 벌어진 밴넉번Bannockburn 전투에서 스코틀랜드는 승리를 거두었을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중요한 귀족들이 전사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서 에드워드 2세와 그의 아내인 프랑스의 이자벨 간의 내전이 시작되죠. 아마도 로버트 부르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잉글랜드 북쪽 지방을 공격했습니다. 에드워드 2세는 사망했지만 나라를 안정시켜야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와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에드워드 3세의 동생인 조앤이 로버트 부르스의 아들인 데이비드 2세와 결혼하는것으로 동맹을 결정짓게 됩니다.
프랑스의 국왕을 만나는 데이비드 2세와 그의 아내인 잉글랜드의 조앤(타워의 조앤)
로버트 부르스의 아들인 데이비드 2세는 어린나이에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되었지만 내부적으로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하는 발리올 가문 사람들과 맞닥들여야했고 이후에는 이를 지원하는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3세와도 부딪혀야했습니다. 결국 그는 오래도록 프랑스로 망명해야했으며 이후에는 잉글랜드와의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서 잉글랜드에서 오래도록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잉글랜드에서 풀려난것은 물론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왕권을 강화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왕위는 그의 이복 누이인 마조리의 아들인 스튜어트 가문의 로버트 2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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