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안할려고 했는데 쓰다보니까 왠지 1차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에 대해서 써야할것같더라구요.
1차인 이유는 2차가 있기 때문인데 2차는 데이비드 2세 시기라서 그건 뭐 안해도 될것같습니다.
1차는 하는 이유가 1차전쟁의 시작이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점령이라서 그렇습니다. 스코틀랜드 왕위가 비게 되고 결국 여러 세력들이 잉글랜드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면서 그 결과 로버트 부르스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ㅠ.ㅠ 이거 너무 힘들어요..ㅠ.ㅠ 읽어야할것이 너무 많아요..흑흑흑
유럽의 통치 가문들...번외편6. 1차 스코틀랜드 독립전쟁 (첫번째)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3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고 스코틀랜드의 왕위계승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때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스코틀랜드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국왕을 선출하는 것을 부탁하게 됩니다. 이때 에드워드 1세는 이미 스코틀랜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길 원했으며 이에 잉글랜드에 호의적이었던 존 발리올을 국왕으로 지명하게 되죠. 그리고 그는 존 발리올에게 잉글랜드의 봉신으로 맹세하게 강요했으며 결국 1296년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와서 존 발리올을 퇴위시키고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 충성맹세를 강요해서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의 통치하에 두게 됩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
이런 상황은 당연히 스코틀랜드 내에서 반발을 가져왔으며 잉글랜드 국왕에 대한 거부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특히 1297년 앤드류 머리와 윌리엄 월리스를 중심으로 반란이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스코틀랜드 독립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됩니다.
앤드류 머리는 1296년 잉글랜드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탈출했고 1297년 고향으로 돌아가서 국왕 존발리올의 이름하에 사람들을 모았으며 잉글랜드 수비대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잉글랜드에 대한 저항을 시작하게 됩니다.
윌리엄 월리스는 1297년 라날크의 잉글랜드 관리를 살해했고 이후에 잉글랜드에 대한 저항하는 윌리엄 더글라스 경과 그 동료들에 합류했었습니다.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인물들
그리고 1297년 9월 11일 앤드류 머리와 윌리엄 월리스의 군대는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이 이끄는 잉글랜드 군과 만나게 되었고 전투를 치루게 됩니다. 여기서 잉글랜드 군은 대패했습니다. 스코틀랜드 군의 사상자는 알려져있지 않았는데 아마 얼마 되지 않아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인물이었던 앤드류 머리는 이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고 그해 11월 사망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윌리엄 월리스가 단독으로 스코틀랜드에서 권력자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스터링 전투
윌리엄 월리스는 앤드류 머리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지도자로 인정받은뒤 바로 잉글랜드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고 매우 성공적으로 이를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이제 스코틀랜드의 최고 지위에 오를수 있는 바탕이 되죠. 1298년 3월 윌리엄 월리스는 한 스코틀랜드의 귀족에 의해서 기사로 서임받았으며 곧 스코틀랜드의 섭정이 됩니다. 이것은 국왕이 없었던 스코틀랜드에서 윌리엄 월리스에게 통치자 지위를 부여한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298년 1월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가 스코틀랜드를 배제하게 됩니다. 이것으로 윌리엄 월리스는 아마도 잉글랜드와 일전을 치뤄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1298년 7월 3일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침공을 시작했으며 7월 22일 윌리엄 월리스의 스코틀랜드 군과 만나게 됩니다. 팔리크 전투라고 불린 이 전투에서 에드워드 1세는 2배가 넘는 전력을 가지고도 스코틀랜드 군을 제압할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역시 엄청난 사상자를 냈는데 특히 지휘관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윌리엄 월리스 역시 간신히 목숨을 건질수 있었고 1298년 12월에는 가디언 지위를 사임해야했었습니다.
팔리크 전투
스코틀랜드 상황은 좋지 않았는데 윌리엄 월리스의 지위는 로버트 더 부르스와 존 코민 둘이 이어받았습니다만 둘은 서로 라이벌이었으며 적대적인 인물이었기에 당연히 둘 사이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결국 이 둘을 중재하기 위해 또다른 인물인 세인트 앤드류스의 주교가 이들 둘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또 프랑스와 로마에서 외교적으로 에드워드 1세에게 존 발리올을 석방하라는 압력이 가해지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에드워드 1세가 가볍게 무시했었기도 합니다.
1300년이 되면서 에드워드 1세는 다시 스코틀랜드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엄청난 병력을 동원해서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정복하길 원했으며 스코틀랜드에서 전투를 시작합니다.
이러는 당시에도 여전히 스코틀랜드에서는 로버트 더 부르스와 존 코민 사이의 갈등이 커져갔었습니다. 결국 로버트 더 부르스가 사임했지만 중요한 것은 갈등요소가 여전히 남았고 결국 여러번 가디언이 바뀐뒤에 부르스나 코민 둘다와 관계없는 인물이 섭정이 되었으며 그는 존 발리올을 다시 복위시키려 노력하기도 합니다.
1301년 계속해서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전투를 합니다만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지 못합니다. 성들은 장악해갔지만 스코틀랜드의 병력에 치명타는 입히지 못했었습니다. 결국 1302년 1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9개월간 휴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시기 로버트 더 부르스는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그의 편에 서게 됩니다. 이것은 주변 사람들을 경악시키는 것이었는데 그의 주변에는 스코틀랜드 독립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는데 존 발리올을 돌아오게 하려는 상황은 그가 왕위를 얻을 기회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그랬다는 것과 로버트 더 부르스의 아버지는 늙고 병들었는데 가문의 전통대로 잉글랜드에 우호적이 되길 바랬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로버트 더 부르스는 이에 대해서 자신의 영지에 있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는 이 맹세가 임의적인것으로 그들에게 스코틀랜드를 위해서만 병력으로 소집할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아마도 로버트 더 부르스는 다른 많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처럼 퇴로가 없었기에 잉글랜드 국왕에 충성을 맹세했을 가능성도 있어보입니다.
로버트 더 부르스
로버트 더 부르스 뿐만 아니라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요 동맹인 프랑스를 잃었는데 프랑스의 내부 문제등은 결국 필리프 4세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잉글랜드와 조약을 체결하려하게 됩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프랑스로 사절단을 파견하고 노력했었습니다. 이 와중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휴전기간이 끝났죠. 처음에는 겨울에는 전투를 하지 않으려했지만 결국 전투가 시작되었고 일단 스코틀랜드측이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만, 1303년 5월 프랑스가 결국 잉글랜드와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이것은 이제 프랑스는 스코틀랜드 문제에 도움을 줄수 없으며 잉글랜드는 프랑스를 경계할 필요없이 스코틀랜드를 공격할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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