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엉엉엉 이동네도 난감합니다.
샤를마뉴부터 하려다가 샤를마뉴는 일부일처제가 아니라서 부인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그 동생인 카를로만부터 할까합니다. 카를로만은 일단 왕비는 한명입니다. -0-;;; (샤를마뉴는 왕비만 네명 ㅠ.ㅠ)
프랑스의 왕비들...(39) 게르베르가 : 카를로만의 아내
게르베르가
Gerberga (8th century)
샤를마뉴의 동생이자 피핀 3세의 아들인 카를로만은 형인 샤를마뉴와 함께 프랑크의 국왕으로 즉위했었습니다. 하지만 두명의 왕이 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권력싸움을 할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게 됩니다. 샤를마뉴와 카를로만은 친형제였지만 서로 명분을 가지고 계승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샤를마뉴는 장자였으며 카를로만은 적자였기 때문입니다.(둘의 부모는 샤를마뉴가 태어난뒤 교회에서 결혼을 인정받았는데 엄격한 의미에서 교회의 인정을 받기 전에 태어난 자녀를 "적자"라고 보지 않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카를로만은 부모가 정식으로 결혼을 인정 받은 뒤에 태어난 아들이라는 의미로 적자라고 주장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형제가 공동 국왕이 된 원인중 하나일듯하고 형제가 서로를 극히 싫어했던 원인이 될수도 있을 것입니다.
카를로만의 은화
게르베르가는 많은 중세의 여성들처럼 출신이 명확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녀는 아마도 카를로만의 아버지인 피핀이 살아있었을때 며느리감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아마도 프랑크 귀족 출신의 여성일 것이라는 정도만 추정할수 있을듯합니다.
게르베르가는 카를로만과의 사이에서 적어도 두명의 아들을 얻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리고 768년 남편인 카를로만이 형인 샤를마뉴와 함께 프랑크 왕국의 공동국왕으로 즉위하자 게르베르가는 카를로만의 아내로 왕비가 됩니다.
샤를마뉴의 은화
하지만 771년 남편인 카를로만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게르베르가는 당연히 자신의 아들이 남편의 뒤를 이어 프랑크의 국왕이 될것이라 여겼으며 자신이 섭정이 될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전에 카를로만을 지지했던 귀족들중 일부는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이들은 어린 국왕이 아니라 샤를마뉴를 지지했으며 결국 게르베르가는 아들들을 데리고 남편에게 충성했던 신하와 함께 도망쳐서 랑고바르디(롬바르드) 왕국으로 가게 됩니다. 랑고바르디의 국왕 데시데리우스는 이전에 샤를마뉴가 자신의 딸을 버린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으며 샤를마뉴와 적이 된 상황이었죠. 그리고 데시데리우스는 교황에게 게르베르가의 아들들이 정식 프랑크 국왕임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하기 까지 했습니다.
773년 샤를마뉴는 랑고바르디로 진격했으며 결국 랑고바르디는 샤를마뉴에게 함락당합니다. 그리고 게르베르가는 아들들과 함께 샤를마뉴에게 보내졌다고 합니다. 이후 게르베르가와 그녀의 아들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아마 샤를마뉴가 제수와 조카를 수도원으로 보냈으리라 추정하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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