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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들과 그후손들...(237) 릴리 랭트리 : 에드워드 7세의 정부(네번째)

엘아라 2019. 7. 22.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 어째 하다보니 글이 네개네요 아하하..-0-;;;


정부들과 그후손들...(237) 릴리 랭트리 : 에드워드 7세의 정부(네번째)




릴리 랭트리

Emilie Charlotte Le Breton

Emilie Charlotte Langtry 

 Lillie (or LilyLangtry

(October 13, 1853 – February 12, 1929), 



릴리 랭트리는 미국에서 활동을 했었으며 미국에서 땅과 집도 샀었죠. 이런 상황이었기에 아마도 릴리 랭트리는 미국 시민권을 얻는 것이 활동하는데 더 유리할 것이라 여겼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1897년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됩니다. 미국에 토지와 집이 있었으며 미국 시민권까지 얻게 되면서 릴리 랭트리는 원했던 일을 하게 됩니다. 바로 한결같이 자신과의 이혼을 거부했던 남편 에드워드 랭트리와의 이혼을 추진한 것이죠. 릴리는 미국 시민이었으며 미국 법에 따라 이혼이 가능했기에 남편과 이혼을 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드워드 랭트리는 이것은 미국에서만 인정되는 것으로 만약 영국으로 돌아와서 결혼한다면 중혼이 될것이라고 이야기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릴리 랭트리의 이혼소송 몇달뒤엔 1897년 에드워드 랭트리는 사고로 사망하게 됩니다. 비록 이혼하려고 엄청노력했었지만 정작 이혼해주지 않던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에 릴리 랭트리는 슬픔을 느꼈었다고 합니다.



릴리 랭트리


릴리 랭트리는 남편과 이혼을 한 직후 여러 남자와 다시 염문을 뿌리게 됩니다. 언론등에서는 그녀가 누구와 다니고 그와 결혼할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죠. 릴리 랭트리는 헝가리 귀족출신으로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가문이었던 에스타하지 가문 사람과 함께 다녔기에 그와의 관계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1899년 28살의 휴고 제랄드 드 배테와 결혼을 합니다. 그와 결혼한 후 릴리의 딸인 잰 마리는 따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재미난 것은 릴리 랭트리가 두번째 결혼한 날 그녀의 말이 경주대회에서 우승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899년 12월 휴고 제랄드 드 배테는 자원해서 보어전쟁에 참전하러 가죠. 1907년 휴고의 아버지가 죽고 휴고가 준남작 지위를 계승하자 그의 아내인 릴리 랭트리는 이제 레이디 드 배테로 불리게 되죠.


릴리 랭트리의 남편이 물려받은 영지 사진


릴리 랭트리는 말년에 영국의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모나코로 가서 지내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인 휴고 드 배테는 베네치아등에서 지냈으며 둘은 사교모임이나 사적 모임등에서 만날뿐이었죠. 1차대전이 일어났을때 휴고 드 배테는 프랑스 적십자사의 앰블런스 운전기사로 일하기도 했었습니다. 


아마 릴리 랭트리는 모나코와 인근의 프랑스 휴양지 등에서 편안한 노후생활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녀는 엄청난 재산이 있었으며 이 재산으로 편안한 노후를 즐기고 있었죠. 물론 가끔은 복잡한 문제에 엮이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그녀는 빅토리아 여왕 통치기에 수상을 지냈던 윌리엄 에드워드 글래스톤과 친분관계를 유지했었습니다. 그런데 1925년 죽은 수상에 대해서 그의 행동을 비방하는 책이 발간됩니다. 여기서 글래스톤이 많은 여자들과 문란한 관계를 맺었었다고 주장했죠. 그리고 그 여자들 가운데는 릴리 랭트리도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에 글래스톤의 아들은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했는데 여기에 릴리 랭트리는 글래스톤이 얼마나 훌륭한 인품을 가진 도덕적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편지를 보냈었다고 합니다.


릴리 랭트리


릴리 랭트리는 1929년 모나코에서 사망했으며, 유언대로 저지에 있는 부모 묘 곁에 묻혔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