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있는글들/월요일 : 정부들

정부들과 그 후손들...(234) 릴리 랭트리 : 에드워드 7세의 정부(첫번째)

엘아라 2019. 7. 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자료를 찾거나 읽기가 싫어요 엉엉엉..ㅠ.ㅠ


정부들과 그 후손들...(234) 릴리 랭트리 : 에드워드 7세의 정부(첫번째)




릴리 랭트리

Emilie Charlotte Le Breton

Emilie Charlotte Langtry 

 Lillie (or LilyLangtry

(October 13, 1853 – February 12, 1929), 


어린시절부터 "릴리"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후에 "릴리 랭트리"라는 이름으로 더 잘알려지게 되는 에밀리 샬럿 르 브레튼은 1853년 저지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윌리엄 코벳 르 브레튼은 저지의 교구장을 역임한 고위 성직자이기도 했습니다. 릴리의 어머니인 에밀리 데이비슨 르 브레튼은 당시 미녀로 알려져있었다고 합니다. 1842년 결혼한 릴리의 부모는 일곱아이들을 뒀으며 그중 릴리는 여섯째이자 고명딸이었다고 합니다.


재미난 것은 아마도 드 브레튼이라는 성과 집안이 줄곧 저지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봐서 그녀의 집안은 아마도 11세기 헨리 2세 시절 켄터베리대주교를 살해했었던 네명의 기사중 한명이었던 리차드 드 브레튼의 후손일 것이라고 추정된다고 합니다. 리차드 드 브레튼은 켄터베리 대주교인 토마스 베켓을 암살한후 교황에게 파문당했으며 보속을 위해서는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나라는 명을 바았고 14년간 성지 순례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저지에 정작했었다고 합니다.



토마스 베켓의 살해



릴리 랭트리는 어려서부터 오빠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는데 어린시절 릴리 랭트리는 당대 교육관처럼 처음에는 오빠들과 따로 공부했지만 릴리의 프랑스어 가정교사가 릴리를 제어할수 없었기에 결국 오빠들과 남동생과 함께 수업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릴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당대 다른 많은 여성들보다 훨씬더 많은 지식을 알수 있었으며 지적이고 위트있는 여자를 좋아했던 에드워드 7세의 눈에 띠는 계기중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릴리 랭트리의 어린 시절은 그리 평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녀의 아버지는 고위 성직자였음에도 아내가 아닌 많은 다른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바람둥이"라는 이야기와 사생아들도 많다고 소문이 파다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릴리의 부모의 불화를 가져오게 했을 것입니다. 결국 릴리의 어머니는 딸이 시집가고 막내아들이 대충 혼자 살나이가 된 1880년 남편을 떠나버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파탄은 성직자로써 큰 흠이었기에 릴리의 아버지 역시 자신의 교구를 떠나게 되죠.


1874년 20살이었던 릴리는 자신보다 10살 많은 아일랜드의 지주였던 에드워드 랭트리와 결혼합니다. 에드워드 랭트리는 릴리와는 복잡한 인척관계였었습니다. 릴리의 오빠인 윌리엄은 엘리자베트 프랜시스 프라이스라는 여성과 결혼했는데 이 릴리의 올케 언니였던 엘리자베스의 자매인 제인 프랜시스 프라이스로 에드워드 랭트리의 아내였었습니다.물론 릴리가 에드워드와 결혼할때는 제인은 이미 사망한 뒤였었습니다. 아마도 이 결혼은 에드워드가 재산이 많았기에 성사된 결혼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요트로 아내와 함께 여러곳을 여행하기도 했었습니다.



에드워드 랭트리의 요트



결국 이런 부유한 사람과 결혼은 릴리가 저지를 떠나서 넓은 세계로 나가고 싶어했던 욕구를 채워줄수 있었는데 1876년 부부는 런던에 아파트를 얻었으며 이제 릴리 랭트리는 런던 사교계로 나가게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